[2016 자원 병역이행 병사 군생활 수기⑨] 그 무엇보다 대한민국
본 내용은 병무청이 주관한 「지원 병역이행 병사 군생활 수기 2016」‘입선’ 글이며, 자원입대한 병사들의 계급은 체험수기 응모 당시의 계급임(편집자 주)
인생에는 가장 아름다운 시기의 계절이 있다. 우리는 신부시게 아름다운 이 계절을 푸른봄, ‘靑春’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또 우리에게는 뚜렷한 사계절을 자랑하며 어여쁜 산과 들로 둘러싸여 정이 넘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대한민국이 있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춘의 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21개월이라는 시간을 바친다. 대한민국의 위대한 국민으로, 그리고 건장한 남자로 이 땅에 싹을 틔웠다면, 우리 모두가 조국을 지키는 숭고한 의무를 부여받게 된다. 이러한 의무는 어떤 이에게는 부담이, 어떤 이에게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으며, 어떤 이에게는 죽음만큼 피하고 싶은 두려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꿈 많고 열정 넘치는 시기에 세상과 단절된 군에 입대한 수많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청춘들은, 추위와 더위에 맞서 싸우고, 고된 훈련을 받고, 밤잠을 설쳐가며 경계근무를 선다. 그들은 21개월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인내하며 국가를 수호라는 거룩한 의무를 묵묵히 수행해 낸다.
대한민국의 건장한 남자로 태어난 나에게도 역시 같은 의무가 부여되었다. 이 땅에서 첫 발걸음을 뗀 그 순간부터 청춘의 세월 중 21개월이라는 시간은 국가의 것임을 누구나 알았다. 그렇게 군대는 막연히 미래의 일이라 여기며 살아가던 중, 뜻밖의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으로의 이민이었다.
중학교 1학년, 가족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살기로 결정하였고,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던 나는 부모님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친구가 가장 소중한 시기였기에, 그들과 떨어져야 하는 이민은 절대로 반가울리 없었고, 미국에서의 삶은 그렇게 불평과 불만, 그리고 슬픔으로 시작되었다.
영어와 담을 쌓고 지냈던 세월은 고스란히 고통이 되어 돌아왔다. 인사말조차 나누지 못하는 영어실력으로 시작하게 된 미국에서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매일같이 치러지는 전쟁과도 같은 일상에 우울증을 앓았고, 하교 후에는 침대에 멍하니 앉아 허공을 바라보는 일이 습관이 되었다. 우울증은 그대로 어머니의 눈물이 되었고, 어두운 방안에 앉아있는 아들을 보며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신의 아들을 부둥켜안은 채 “엄마가 미안해.”라는 말을 반복하는 일 뿐이었다.
미국에서의 힘겨운 삶은 고스란히 그 땅을 향한 증오로 이어지게 되었다. ‘행복하게 잘 살던 나인데, 왜 이 먼 곳까지, 남의 나라까지 와서 이리도 힘든 시간을 버텨내야 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낯선 땅을 향한 증오와 비례하여 커진 한 가지 마음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내 조국에 대한 그리움’ 이었다. 내가 행복했던 곳, 내가 편하게 지낼 수 있었던 곳, 내가 ‘나’일 수 있었던 곳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고, 그 마음은 자연스레 애국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있었다. “너는 대한민국의 국가대표로 미국에 온 거야. 미국 사람들은 널 보며 대한민국이 어떤 곳인지 판단할 거야.” 라는 말씀이었다. 그때부터 국가대표라는 타이틀을 스스로에게 부여하였고, 국가대표라면 무엇이든 잘해야지, 무엇이든 이겨야지 라는 마음을 가지며 살게 되었다.
시간은 자연스레 흘러 어느덧 미국 생활에도 적응하게 되고, 영어도 배우게 되었다. 언어의 장벽이 사라지며 미국에서도 ‘꽤 편안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국가대표다’ 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는데, 이유는 바로 그 믿음이 미국에서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게 한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10년이라는 세월을 미국에서 보내게 되었다. 10대에 건너갔던 나는 어느새 20대가 되어 있었고, 미래의 일로만 생각되던 군대라는 커다란 장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10년의 세월을 지내며 우리 가족은 자연스레 미국 영주권을 취득하게 되었고, 이는 병역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음을 뜻하였다. 영주권 취득 후 5년이 지나면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게 되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게 되면 자연스레 대한민국 국적이 포기되어 병역의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주변의 친구들, 학우들 대부분이 병역의 의무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고, 나에게도 결정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마치 짠 것처럼 “한국 군대를 가는 것은 미친 짓이다, 시간 낭비밖에 더 되지 않겠느냐” 라며 이구동성으로 말하였고, 아버지 또한 한사코 입대를 반대하셨다.
하지만 나의 결정은 처음부터 확고했다. “말로만 애국, 애국하지 말아라” 라는 사람들의 말에 “언젠가는 행동으로 보여줄 것이다” 라며 받아쳤던 중학교 시절부터 나의 입대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고 3학년을 마친 후 대한민국 군에 자원입대 하겠다.’는 중학교 시절의 계획에 따라, 대학교 3학년을 마친 2015년 봄, 휴학신청을 한 후 입국 준비를 하게 되었다.
2015년 5월, 귀국한 후의 일들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해외 영주권자 자원입대 프로그램을 통하여 신속하게 신체검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입대 날짜 또한 빠르게 결정되었다. 2015년 7월 20일, 나는 육군훈련소로에 입소하게 되었다. 드디어 대한민국 육군으로서 조국을 지키는 숭고한 의무를 다하게 된 것이다. 남들보다 조금 늦은 20대 중반의 나이에 입대하게 되어, 3~4살 어린 동기, 선‧후임들과 지내게 된 군 생활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분명 크나큰 위기도 있었고, 심신이 지치는 일들 또한 있었다. 상명하복의 군대 문화는 미국에서 10여 년을 보냈던 나에게 분명 쉽사리 적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자원입대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온전한 나의 선택과 나의 의지였기에, 후회가 된다면 그것은 누구에게도 전가할 수 없는 온전한 나만의 책임이었다.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고, 누구에게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훈련이 힘들고, 몸이 고될 때, 정신적으로 힘들 때에도 부모님께 할 수 있는 말은 “나는 괜찮다”라는 말 뿐이었다. 모든 것이 나의 의지이자 나의 결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남들과는 다르게 자원입대를 하였던 나였기에, 스스로에게도 ‘넌 잘 해내야 해’ 라는 말을 주문처럼 하였고, ‘결코 불만을 가져서는 안 돼!’라는 생각 또한 습관처럼 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결코 쉽지 않은 군 생활은 그러한 의지를 자꾸만 무너뜨리곤 하였다.
나도 남들처럼 서서히 불평, 불만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이 힘든 군 생활은 언제 끝나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결정한 입대임에도 불구하고, 분명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영원히 멈춰 있을 것 같은 국방부의 시계도 어느덧 꽤 많이 돌아갔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훈련병의 시절도 끝이 났고, 어느덧 상병을 바라보고 있는, 어엿한 대한민국 육군 일병이 되어 있었다. 군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군대 왜 왔어?” 라는 질문이다. 그때마다 장난스럽게 오른쪽 팔을 가리키며 “여기에 태극기 달려고 왔다!” 라고 말하곤 한다. 장난스런 말이지만, 분명 많은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는 말이기도 하고, 나의 입대 이유를 가장 적절히 표현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어떠한 대가를 바라고 온 것도, 누군가 시켜서 온 것도 아니기에 다른 말로는 입대 이유를 쉽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 나는 나의 조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입대를 결정한 것이고, 대한민국의 한 남자로서 당당히 의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온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분명 오른쪽 팔에 태극기를 달기 위해 군에 입대한 것이 틀림없다. 육군훈련소에서 열심히 훈련받던 시절, 소대원들과 오와 열을 맞추어 분대장의 인솔에 따라 저녁을 먹고 생활관으로 복귀하는 길에, 생활관 앞에서 힘차게 펄럭이던 태극기를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있다. 어떠한 이유도 없이 일어난 일이기에 너무나도 특별한 기억이고, 사실 남들에게 말하기는 조금 민망한 기억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내가 왜 이곳에 와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일이었다.
거대한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먼 타국에서, 남의 나라에서, 남의 민족 틈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며 마음속으로 그리워하였던 내 조국과 내 민족, 그리고 내 땅, 바로 그 대한민국의 땅 위에 내가 서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대한민국을 내가 지켜내고 있다는 그 사실을 태극기가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10개월의 남은 군 생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분명 또 불평할 것이고 불만을 토로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내가 오른쪽 팔에 달고 있는 이 태극기가 나를 지금껏 있게 해준 내 인생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나를 있게 해준 나의 조국을 위해,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남은 군 복무에 최선을 다할 것이며, 기꺼이 나의 청춘을 바칠 것이다. 그리고 자랑할 것이다. 나의 청춘에서 가장 중요하였던 것은 ‘그 무엇보다 대한민국’이었다고.(konas)
55사단 171연대 일병 박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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