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자원 병역이행 병사 군생활 수기⑪]내 평생의 자랑거리
본 내용은 병무청이 주관한 「지원 병역이행 병사 군생활 수기 2016」‘입선’ 글이며, 자원입대한 병사들의 계급은 체험수기 응모 당시의 계급임(편집자 주)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유학 가 있는 누나를 보러 미국에 몇 번 방문한 기억이 있다. 언어를 전혀 몰라도 먼저 웃는 얼굴로 환대해 주는 사람이 가득한 나라. 미국에 대한 내 첫인상이었다. 그 후 운이 좋게도 우리 가족은 먼저 이민 간 막내 이모의 초청을 받고, 초등학교 6학년 겨울에 나는 캘리포니아주 LA근교로 유학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2007년 미국 영주권자가 되었다.
미국에서 오랜 유학생활을 하면서 군대는 내 인생에서 멀고 먼 곳이라고 느꼈다. 또한 당연히 미국 영주권자로서 특혜를 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름이 가까워지면서 내 주변 한국인 유학생 친구들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가기 시작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퉁명스럽게 “이제 슬슬 입대해야 하니까 그렇지. 넌 영주권자이니까 안 가도 돼서 좋겠네?”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그들은 가능하면 피해야 할 곳, 힘든 곳, 시간을 낭비하는 곳으로만 군대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당시에는 윤일병 사건, 임병장 사건과 같은 몇몇 사건사고로 인해 군에 대한 인식이 더욱 좋지 않았다. 친구들의 부러움을 듣고 나는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미국인과 같은 취급을 받으면서도 한국 국적을 가진 나는 과연 어디에 속하는지 말이다.
글로벌한 시대에 미국에서 살고 싶으면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한국에서 살고 싶으면 한국 국적을 유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인지도 모른다. 한국인이고 싶지 않으면 이민을 떠나 거주지의 국적을 취득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오랜 해외 생활은 오히려 나 자신도 모르게 모국에 대한 애정을 더 키웠다. 긴 고민 끝에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나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군대에 입대하기로 결정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험한 곳으로 보내기 싫다는 눈치셨지만, 아버지는 ‘장하다’며 내 의견을 존중해 주셨다. 물론 당당하게 군대에 일대할 것이라고 주변 지인들에게 알렸지만 속으로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교차했다. 군에 대한 두려움이 먼저 앞섰으면서도 6.25 한국 전쟁 때 종군기자로 활동하신 친할아버지와 KLO부대에 근무하며 계급과 군번 없이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외할아버지께 당당한 손자로 설 수 있다는 것에 들떴다. 쌍둥이 늦둥이들이 한꺼번에 부모님을 떠난다는 것에 대해 부모님께 매우 죄송스러웠지만, 나는 쌍둥이 형과 2015년 3월 23일 육군훈련소로 향했다.
쌍둥이 형인 심우현 상병과 같이 육군훈련소에 입소했을 때에도, 17사단으로 전입을 왔을 때에도 언어, 문화, 그리고 정서가 많이 달라서 혼란과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훈련 중 숨이 차서 기절할 것 같으면 기절할 때까지, 다리가 터질 것 같으면 터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내가 맡은 임무는 꼭 완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군 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복무 중 ’15년 을지프리덤 가디언 훈련, 경북 문경 세계군인체육대회 등에서 통역병으로 파견갈 기회를 얻었다. 합동참모본부에서 근무했을 때는 몸이 편해져 나태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군사용어를 공부하였다. 내가 맡은 모든 통번역 내용들과 자료들이 합동참모의장님이 직접 참여하시는 회의에 사용될 때 큰 자부심을 느꼈다.
세계군인체육대회 농구경기 심판 및 의전들을 통역할 때는 내가 대한민국과 다른 국가 사이에 놓인 다리와도 같아 새롭고 흥미로웠다. 이렇게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예전에 나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가지던 시기에 비해 내가 당연히 방위하고 있는 대한민국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2016년 4월, 나는 영주권자 및 재외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모범장병투어’에 선발되는 행운도 얻었다. 용산 전쟁기념관, 천암함의 잔재가 남아있는 평택 2함대, 나라를 위해 산화하신 분들이 계시는 대전현충원,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육·해·공군의 본부가 있는 계룡대까지. 투어를 통하여 내가 가지고 있던 국가관의 기틀을 더욱 굳게 잡게 되었고 애국심과 우리민족에 대한 자긍심이 확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군복무 간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영주권이 있는데 군대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일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신 있게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면 군대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곳이며, 입대는 내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변에서 보내주는 격려는 나를 더욱 의젓하고 탄탄한 대한의 아들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후회를 한 번도 안했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고된 훈련을 할 때는 정말 집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고,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는지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힘든 건 군 생활하는 모든 전우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 자신을 더욱 채찍질하게 되었다.
물론 사회보다 제한된 곳에서 21개월을 생활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사회에서 배울 수 없는 값진 교육을 받았으며, 전역할 때까지 더 많이 받을 것이다. 짧고도 긴 군 생활, 상병인 나는 이제 도달할 계급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비록 전역까지는 시간이 남았지만 내가 접해보지 못한 세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 시간이라 확신한다.
정해진 일과와 아침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통해 규칙적인 아침형 인간이 될 수 있었고, 몸도 마음도 튼튼해졌다. 각종 훈련과 분대장 역할을 통해 올바르고 빠른 의사결정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처음에 군 생활은 쉽지 않았다.
약 10년간의 미국 유학생활이 한국에서의 생활을 낯설게 만들었고, 그와 함께 군 생활 또한 적응하기 어려웠다. 가끔은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들도 있었다. 하지만 중대장님을 비롯한 소대장님과 행정보급관님, 그리고 전우들은 끝까지 나를 보듬어주고 기다려 주었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언제나 내 곁에서 파이팅을 외치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가족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군대는 이제 ‘기피할 곳’에서 ‘자랑스러운 곳’으로 마음 한켠에 자리 잡았다. 또 잊고 지내던 것들을 되새겨 주었다. 예의, 성실, 공동체의식 같은 것들, 조국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까? 빠듯한 일정 속에서 지내다 보니 주위에 간부님들과 다양한 환경에서 온 전우들이 한 가족처럼 느껴졌으며, 나에게 끈끈한 정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 준 곳도 군대였다.
전역까지 약 7개월 정도 남은 기간 동안 군인으로서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 비록 짧지만 성공적인 군 생활을 통해 대한민국의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귀한 자격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치 있고 자랑스러운 일인가를 나의 결정에 반대한 사람들과 군 입대를 기피하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이에게 알리고 싶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국에서의 군 복무는 내 평생의 자랑거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최근 언론에서 시사되는 일련의 사건을 보면 너무 나쁜 점만을 보여주어 군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일부 부정적인 면만으로 군 전체를 판단하고 헐뜯는 것이 여기서 직접 생활하고 있는 입장에서 정말 안타깝다. 내가 생활하고 있는 골육지정(骨肉之情)의 정을 나누는 육군 제17보병사단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언제나 이곳을 그리워할 것이다. 영주권을 가진 후배들에게도 군에 입대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을 끊임없이 권유할 것이다. 그리고 조국과 군을 언제나 사랑하고 그리워할 것이다.(konas)
17사단 보충중대 상병 심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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