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칼럼] 베트남, 적국(敵國)에서 ‘사돈의 나라’로
“우리 여행가자!”
친구와의 간단한 의기투합으로 비행기에 몸을 싣고 도착한 곳은 베트남의 허리쯤에 있는 ‘다낭’이었다.
베트남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자 중부지역의 최대 상업도시인 다낭은 1965년 미국이 3,500여 명의 지상 전투부대를 상륙시켜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곳이다. 우리나라 청룡부대가 주둔했던 곳이기도 하다. 2017년 차기 APEC 정상회의가 이곳 다낭에서 개최된다.
다낭의 중심에는 한강이 흐른다. 다낭이란 이름도 ‘큰 강의 입구’라는 뜻이다. 내셔널지오그래픽트래블러는 ‘완벽한 여행자가 일생에 꼭 가봐야 할 곳 50선’에 다낭을 올렸고,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지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6대 해변으로 다낭의 미케비치를 선정했다.
베트남전쟁과 라이 따이한, 호치민, 1년에 3모작이 가능한 더운 나라, 아오자이, 그리고 공산국가. 이것이 내가 베트남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지만 이번 여행에서 티엔무 사원을 둘러본 후 베트남을 새롭게 생각하게 됐다.
베트남 마지막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에 위치한 티엔무 사원은 남베트남의 부패한 독재정권 ‘응오 딘 디엠(Ngo Din Diem)’에 항거해 소신공양을 택했던 ‘틱광덕(釋廣德 Thich Quang Duc)’스님이 수행했던 곳이다.
소신공양(燒身供養). 부처에게 공양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것을 말한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디엠이 국민 80%가 믿는 불교를 탄압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고, 지역 대주교로 임명된 디엠의 형이 석가탄신일 봉축행사를 금지시키며 이에 반발하는 승려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틱광덕 스님은 1963년 6월 11일 대낮에 호치민(구 사이공) 시내에 위치한 베트남주재 미국대사관 부근의 교차로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군과 경찰의 강제 진압을 막기 위해 많은 비구와 비구니 스님을 불러 십자대로의 주변을 막았다.
제자 승려가 스승의 온 몸에 가솔린을 흠뻑 부었다. 스님은 준비했던 라이터를 꺼내 자신의 가사에 점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라이터가 켜지지 않자 주위에 있던 누군가가 성냥갑을 건네주었다. 스님이 직접 성냥을 그어 가사에 점화하자 화염이 치솟았다.
불길에 휩싸인 스님은 자세 하나 흐트리지 않았다. 스님은 그 전날 제자들에게 “만약 내가 소신공양 중 앞으로 넘어지면 나라가 흉하게 될 것이니 그때는 해외로 망명하라. 내가 뒤로 쓰러지면 우리들의 투쟁은 승리하고 평화를 맞게 될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가면서도 미동은 커녕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는 스님의 모습은 지금도 인터넷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다.
불길이 거세지자 스님의 상반신이 잠시 앞으로 기울었으나 스님은 다시 허리를 곧추세워 가부좌를 했고 마지막 순간 뒤로 조용히 넘어졌다. AP통신의 베트남 특파원 말콤 브라운 기자는 스님의 분신 전 과정을 사진촬영하는 데 성공, 1964년 퓰리처상(국제보도부문 공동수상)을 수상했다.
수많은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님의 온 몸은 불타고 사그라졌건만 신기하게도 스님의 심장만은 불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디젤유로 6시간을 태워도 스님의 심장은 타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스님의 심장은 하노이 국립은행으로 옮겨져 보관되어지고 있다고 하니 언젠가 꼭 볼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스님의 소신공양을 두고 당시 영부인 역할을 했던 디엠의 남동생의 부인인 쩐레수언(陳麗春, 마담 누 혹은 드레건 레이디로 불림. 디엠은 독신이었음)이 “땡중의 바베큐 쇼”라 비난하자 대학생과 시민들의 격렬한 반정부 투쟁이 전개됐다. 틱쾅덕 스님에 이어 46명의 스님이 분신을 했다.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기 위해 디엠정권을 지지했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결국 디엠 정권에 대한 지원을 철회했고 1963년 11월 1일 군사 쿠데타로 디엠은 살해됐다. 미국을 등에 업은 디엠의 독재정치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현재 티엔무 사원에는 스님이 사이공으로 떠날 때 몰고 갔던 하늘색 자동차(오스틴)와 분신 장면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약 1천년 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고, 100년 간은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놓였다가 1940년부터 일본이 2차대전에 패망하기까지 일본이 점령했다. 1979년 2월에는 중국과 전쟁을 치뤘다.
때문에 베트남 국민들은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긴장하고 있다는 가이드의 말에, 전쟁 중임에도 이를 잊고 사는 우리 국민들과 비교됐다.
한반도 못지 않게 굴곡진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데올로기로 인해 남과 북이 갈라졌다는 점은 한국과 닮았지만, 외부의 적을 맞아 내부가 똘똘 뭉친 역사는 베트남 국민들의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1200년대 세계 최강의 제국을 이룬 원나라의 쿠빌라이 황제는 세 차례에 걸쳐 베트남을 침공했으나 모두 패배했다. 베트남은 1960∼70년대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고 1979년 중월전쟁에서도 승리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제국주의 세력을 자기 힘으로 물리친 나라다.
그런데 역사는 참 아이러니하다. 40여년 전 총구를 겨눴던 베트남과 미국이 손을 잡고 있다. 남중국해를 둘러싼 중국의 패권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지난 5월23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에 대한 살상무기 수출 금지 조치 해제하고, 다낭에 군수 물자를 사전 배치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우리나라도 베트남과는 인연이 깊다. 베트남전에 의료진을 중심으로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 30만 명이 넘는 전투병력을 파병했다. 참전과 젊은이들의 희생 대가로 우리가 확보한 '달러'는 한국 경제성장의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미안하고도 고마운 나라다.
그리고 현재 한국은 베트남의 최대 투자국이다. 베트남에 공적개발원조를 제공하는 국가 중 2번째로 큰 금액의 나라가 한국이다. 베트남은 우리의 새마을운동과 산업인력 양성 과정을 도입하는 등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을 하나의 모델로 삼고 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 셈이다. 그렇다고 베트남 국민들이 과거의 뼈아픈 상흔을 잊은 것은 아니다. 국익을 위해 참고 있는 것뿐.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을 만난 쯔엉 떤 상 베트남 국가주석은 정상회담에서 한국을 “진정한 친구가 왔다” “사돈의 나라”라며 친근감을 표했다. 약 5만 명의 베트남 여인이 한국인과의 국제결혼을 통해 다문화가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인구 9,500만 명에 국민 평균연령 30세의 청년 베트남. 강한 민족성으로 1980년대 도이모이정책 이후 급성장하고 있는 나라가 내가 본 베트남이다.(konas)
코나스 최경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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