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 취약한 국보법 폐지 주장 - '국민의 오판(誤判)' 강요야말로 엄청난 중죄(重罪)이다
"적(敵)들의 심리전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투철한 반제(反帝)계급의식'과 '높은 대적(對敵)관념'을 가져야 한다. 특히 미제(美帝)와 일제(日帝) 남조선(南朝鮮) 괴뢰놈들을 총대로 무자비하게 쓸어버릴 결사의 각오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 글은 북한당국이 내부의 사상적 동요를 막기 위해 북한 각급 부대에 배포한 '군관(장교), 장령(장성)'용 '학습제강'(사상교육 자료)의 한 대목이다. C일보는 '우리 내부를 와해·변질시키려는 적들의 모략 심리전을 단호히 짓부셔버릴 데 대하여'라는 제하(題下)의 B5용지 13매 분량의 이 문건을 입수하여 지난 3일 보도했다.
"남조선 괴뢰놈들을 총대로 무자비하게 쓸어버려라"
'내부결속용'이라고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적화통일 하고자 하는 야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오히려 노동당 규약 전문(前文) 내용에 비해 훨씬 더 노골적이고 생생하다.
이 문건에는 이런 내용도 담겨있다. "적들의 '대화'나 '평화' 타령에 추호도 귀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 "적에 대한 환상은 곧 죽음의 길, 멸망의 길이다. 노래를 하나 불러도 전투적인 노래를 불러야 한다" "맨밥을 찬물에 말아서 된장을 찍어먹어도 혁명해야한다는 혁명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이런 메시지가 우리 군(軍)내에서 일어났다면 그야말로 '수구(守舊)꼴통'이라는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을 것이다. 그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변할 의사도 없으며, 이렇듯 이중적인 태도로 남한을 농간(弄奸)하면서 대남(對南)적화 야욕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고도 북한은 지난 4일 "남조선 당국이 대화재개를 바란다면 보안법을 철폐하는 용단을 내려야 한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북한 민족화해협의회 대변인 담화 형식으로 발표했다. 국가보안법 개폐논쟁에 정식으로 끼어 든 것이다.
"보안법을 철폐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남측 내부의 일개 법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북남(北南)관계의 전도(前途)를 좌우하는 관건적 문제"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이 문제와 남북대화를 연계하겠다는 의사를 강도 높게 밝히고 있다.
이 담화는 "보안법 폐지를 반대해 온 사람은 누구든 공화국(북한)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으며 우리와 상종할 체면도 없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당국 간 대화 재개뿐 아니라 민간교류와 접촉도 보안법과 연계시키겠다는 의미가 실려있다. 전례가 없는 '공갈조의 위협'이고 엄청난 '내정간섭'이다.
지난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처음으로 다시 보안법 폐지를 남북관계 발전과 연계시키고 있는 것은 물론, 이 메시지가 과거 대남공세의 일환으로 요구했었던 단순한 보안법 철폐주장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의 메시지에 장단맞추기라도 하듯 한 반응
더욱 놀라운 것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북한의 메시지에 일침을 놓기보다는 마치 장단맞추기라도 하듯이 국보법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MBC의 대담 프로그램이 5일 밤에 방영됐다는 점이다. 대법원이 판결문을 통해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 지 3일 만이다.
노 대통령의 국보법 폐기 주장은 행정 입법 사법부가 둘로 나뉘어 정면충돌해보자는 제언이나 다름없다. 이 시점에서 대통령이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어 가며 과연 그렇게 해서 좋을 일이었는가. 대통령으로서 국론(國論) 봉합 차원이 아니라, '편 가르기'에 나서야 할 일인가.
대통령의 국보법 폐지 주장 명분은 이렇다. "국보법이 정권을 반대하는 사람 탄압용으로 많이 쓰여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권존중의 시대'이므로 낡은 유물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펴기도 했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문명국가로 간다"고도 했다.
대통령은 답해야 한다
대통령에게 묻고자 한다. 지난 88년 이후 대법원이 이적(利敵)단체로 판정한 전대협(全大協) 한총련(韓總聯) 등을 제외한다면 정권유지를 위한 편법으로 쓰여진 적이 있었던가를- 후방안보의 버팀목인 국보법을 사문화시키고 '낡은 유물'로 만든 것은 'DJ시대 이후'가 아니었던가.
인권문제라면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일본이나 중국보다도 더 존중받는 선진국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일본은 과거사(過去事)가, 중국은 천안문사태와 티베트인 박해 등이 '인권의 볼모'가 되어있다. 우리가 인권(人權) 선진국이다. 북한주민들의 인권에 대해 애써 외면해온 노 대통령이 인권문제를 들어 국보법 폐기를 주장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니질 않는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냉전적 상황'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가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은 국가안보의 틀을 더욱 공고히 구축하는 일일 뿐,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눈을 감는 일이 아닐 것이다.
전후 반세기동안 최전선을 지킨 것은 우리 국군과 주한미군이지만, 후방안보는 '국가보안법'의 몫이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인공기(人共旗)가 나부끼고 적기가(赤旗歌)가 울려 퍼질 경우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대법원은 지난 2일 판결문에서 “북한의 우리 체제 전복 시도가 여전히 열려 있다”고 국보법 폐지론에 대한 강한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은 사법부의 충고도 외면하고서 "국보법을 법리적으로만 따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노 대통령의 이 발언은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이 나라 헌법체제에 대한 도전이 될 수도 있는 독선(獨善)인 것이다. 
북한은 과연 변했는가- 전혀 아니다
우리 정부 당국자들은 북한이 변했다고 한다. '남북이산가족 상봉'이나 '아테네 올림픽 공동입장' '개성공단 개발 인프라 건설' 등에 우리는 번번이 뒷돈을 대고 있다. 공짜로 내미는 고깃덩이를 마다 할 고양이는 어디에도 없다.
실익(實益)이 있을 때만 반응하는 북한을 두고 정부당국자들이 "북한이 변했다"고 말하는 것은 난센스이다. 우리 정부 당국자가 '그들의 변화를 말하는 것'은 국민의 오판(誤判)을 강요하는 것이나 진 배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중죄(重罪)로 기록될 것이다.
북한이 변화하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는 안보에 관한 한, 단 한치도 북한의 장단에 놀아나거나 뒤로 물러나서도 안 된다. (konas)
정준(코나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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