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진상' 규명- 자칫 나라 망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오등(吾等)은 자에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권위를 영유케 하노라."
우리가 잘 알고있는 '기미독립선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육당 최남선(崔南善)이 쓴 글이다. 그러나 육당은 그후 일제의 압제에 못 이겨 잠시 '친일'행적을 남겼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기미독립선언문"을 폐기해 버릴 수 있는 일인가. 그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손괴하는 행위로 기록될 것이다.
애국가 작사자는 도산 안창호가 아닌, 윤치호(尹致昊·1865~1946)라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그는 한때 독립신문 사장과 대성학교 교장을 지낸 인물이다. 1888년 미국 테네시에 있을 때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지었다. 그런 그가 일본총독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6년 징역살이를 살게 되자 일본의 압제와 협박에 못 이겨 소신을 굽혔고, 그는 총독부의 귀족명부에 올랐다.
윤치호는 일제의 압박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창씨개명(創氏改名)과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을 '조선인 평등대우론'으로 오판(誤判)하고서 강자의 논리에 동조하여 1941년 총독부 중추원 고문직을 수락했던 것이다. 그것이 '친일'의 단초가 됐다. 그렇다고 우리가 애국가 가사를 바꾸거나 없애는 일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개화기에 '흙' '무정' '유정' 등 많은 명작을 남겼던 소설가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는 3·1운동 한 달 앞서 일어난 동경유학생 독립선언식을 성사시키기 위해 동경과 상해를 밀사처럼 뛰어다녔다. 그러나 그도 그후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참전을 독려해야 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그것으로 그에게는 '친일파' 낙인이 찍혔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의 작품을 모두 불태우고 그를 매장시킨다면 한 시대의 문학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고 최정희 여사와 함께 부부 소설가였던 파인(巴人) 김동인도 친일파로 알려져 있지만, 손기정 선수가 베르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기사를 접하고서 그가 망망대해를 찾아 나서 저녁노을을 등에 지고 펑펑 울었다는 내용의 글을 편지를 써서 그의 아내에게 보냈음이 그의 딸의 수기에서 밝혀진 바 있다. 그는 갔어도 그의 소설 '감자' '배따라기' '운현궁의 봄' 등은 우리의 뇌리에 남아 숨쉰다.
똑같은 이유로 '초대 이대(梨大)총장 김활란(金活蘭)' '시인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봄처녀' '고향의 봄' '봉선화' 등을 작곡한 홍난파(洪蘭坡) 등에 대해서도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잠시의 친일(親日)'을 우리는 관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한때의 과오보다는 이 사회에 남긴 공적을 충분히 고려하는 아량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을 '친일'로 유폐시키는 것은 '민족의 문화 자산'도 함께 내던지는 것이 된다.
흠도 티도 없는 의인(義人)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일제(日帝) 치하에서 그들이 처해 있던 시대적 정황이 정상작인 상황이 아니었음을 고려해야 하고, '적극적 친일'과 '마지못해 협조하는 생계형 친일' 및 '부역' 등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에 대한 과거사 청산이 일회용품 정리하듯 치러질 수는 없다. '과거사'를 청산하자면 무엇보다 먼저 공정하고 균형 잡힌 잣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나라 초대대통령 이승만(李承晩)과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까지도 '친일(親日)'로 모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가 살아온 역정에 비추어 '친일'이어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던 인물이었다.
그는 8·15 이후 이루 말할 수 없이 혼란스러웠던 해방공간에서 그리고 6·25 때 전(全)국토가 자칫 공산화될 뻔했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지킨 인물이다. 그의 반공포로 석방 결단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李)대통령이 '친일'을 단죄하기에 앞서 '반공(反共)'을 국시로 삼은 것은 당시 용공분자 척결이 얼마나 긴박한 과제였는가를 잘 말해준다. 우리가 그를 '건국의 아버지'로 칭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을 치죄(治罪)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결코 친일세력을 중용하는 일은 없었다. 해방공간에서 이 땅에 팽배했던 공산세력을 척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을 뿐이다. 반민특위를 해산하는 결단을 내린 것도 '친일'과 '용공'- 이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북한 역시 그들과 노선을 달리하는 민족주의자들과 지주(地主)계급을 '친일(親日)'로 몰아 내쳤다는 점이다.
6·25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미군을 불러들여 공산군의 도발을 막아냈던 것도 모두 이승만 대통령의 혜안과 지략에 힘입은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런 그를 장기집권과 수하 사람들의 부정선거 조종을 들어 역사에서 매장시켜서야 될 것인가.
박정희 대통령 역시 무능한 정치인들로 인해 이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경제가 몰락할 때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쿠데타를 일으켰고, 경제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개발독재를 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후 '잘 살아 보세'를 외치면서 자본 기술 자원- 그 어느 것 도 구비되어있지 않은 척박한 여건 속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인물이다. 총알 한 개도 만들지 못했던 우리가 무수한 방위산업을 갖추고 탱크 전투기 미사일을 양산하고있는 것도 알고 보면 그의 장기적 안목과 추진력에 힘입은 것이다. 인류 역사상 어느 위인도 18년 동안에 국부(國富)를 20배 이상 키워 놓은 사람은 없었다.
1979년 박정희 서거 후 미국 CIA는 박정희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했다. "독단적이고 자존심이 강한 반면 카리스마와 서민적 이미지를 함께 갖춘 인물이다. 직관력과 통찰력을 겸비하면서 추진력이 강한 인물이었다. 남한의 실질적 발전은 그로 인해 비롯되었고 그의 일반적인 생활은 청렴하기 그지없었다."
당시에도 좌경분자들은 '민주주의'와 '인권' 투사로 위장하고서 '유신(維新)을 마치 한국의 나치정권에 비유하면서 타도를 외쳤었다. 반만 년 역사에 보기 드문 이런 위인들을 '친일파'니 '유신독재'니 해서 두 번 죽이려하는 것은 그야말로 망국적 발상이다.
오늘 이 시점에서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은 정작 '과거의 친일세력'이 아니고, 정적(政敵)과 장애물을 '친일'로 몰아붙여 정치적 소득을 얻고자 하는 '친북세력'이 아니겠는가. 이들의 주된 표적이 '박정희 헐뜯기'와 일제 때 창간을 본 '조선(朝鮮)·동아(東亞) 등 정통보수언론 흠집내기가 과녁의 대상임을 모르는 이는 별로 없다.
친일 진상 규명법안은 싫든 좋든 불원간 그 골격을 드러낼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제한된 인력으로 제한된 기간에 최소 수천 명에서 최대 십만여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60년 이상 묵은 행적을 파헤치는 것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당사자들이 이미 대부분 고인(故人)이 된 터라 더욱 그럴것이다.
60년 전의 수치스러운 과거사를 들추어 현존하는 자손들의 앞날을 매장하려드는 어떤 작태도 온 세계에 나라를 망신시키고 국위를 추락시키는 결과로 끝날 것임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세계 각국이 미래를 향해 숨가쁘게 뜀박질하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호(號)는 유독 과거 속으로, 과거속으로 거슬러 오르고있기 때문이다. (konas)
정준(코나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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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들의 과거를 캐는 법보다 산자들을 위한 법을 우선 만들어야 합니다.정치인들이 현실을 보지 못하고 과거만 쳐다보는 나라꼴이 걱정입니다. 왜 젊은 국회의원들이 과거에만 집착하는지 모를 일이네요...</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4-09-22 오전 10:43: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