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국회 시절 南勞黨 프락치사건에서 배워야 한다
이철우 의원의 북한 노동당 입당설을 둘러싼 여야 공방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여당은 색깔론을 응징하겠다고 벼르고 있고, 야당은 이 의원의 사상 성향에 의문을 표시하며 공천 과정을 밝히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쉽게 꺼질 수 있는 불길이 아니다.
그는 법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고 이미 형을 복역한 데다 사면 복권된 뒤 지난 총선에서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1992년 4월 '민족해방애국전선'에 가입하면서 노동당기와 김일성 부자 초상화 밑에서 충성을 맹세(판결문 내용)했던 인물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고있다. 그가 과연 과거 '주체사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1948년 제헌국회 시절 원내 급진세력이 남로당원들의 사주를 받아 국회장악을 시도하려했던 공안사건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른바 '국회 프락치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당시 김약수(金若水) 국회부의장을 중심으로 한 동성회(同成會)소속 소장파 의원들이 남로당의 지휘 아래 국회 내에 프락치를 형성하고서 정부수립 직후부터 좌파(左派)논리를 전개해오다 검거됐다.
이들은 '자유주의에 입각한 진보적 민주정치 실현'을 표면에 내세우고 국정운영의 '7원칙'을 앞세워 국회장악을 시도했다. ① 외국군대(미군)의 완전 철수 ② 남북한 정치범석방 ③ 반(反)민족자 처단 ④ 조국방위군의 재편성 ⑤ 보통선거에 의한 최고입법기관의 구성 ⑥ 남북 정당단체 대표에 의한 정치회의구성 ⑦ 헌법개정 등이 바로 그것이다.
노일환 등 이들 47명의 국회의원들은 1948년 10월13일 실제로 외군철수 긴급동의안을 제출했다. 그들은 남로당 중앙위원 이삼혁(李三赫·일명 河西福·특수공작부 국회담당책) 등이 전달하는 지령에 따라 움직였던 것이다. 미군은 그로부터 8개월만인 1949년 6월 이들의 선동에 밀려 '미·소 양군(兩軍)의 한반도 동시 철수'조건을 받아들여 완전 철군(撤軍)했었다. 6·25전쟁이 발발한 것은 그로부터 정확하게 1년 후였다.
이들이 남로당 프락치임이 드러난 것은 공안경찰의 수사로 여간첩 정재한의 음부(陰部)에서 비밀 암호 문건이 발각되어 사건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나면서부터였다. 이 사건으로 49년 5월18일 이후 네 차례에 걸쳐 김약수 부의장 등 14명의 의원이 구속되었다. 남로당 지시를 받고 제헌국회에 침투하여 공작을 펴다 일망타진됐던 것이다.
1950년 2월 서울지방법원은 이들에게 2년형(刑)에서 최고 징역 12년형까지 선고했다. 이들은 1심 판결에 불복 항고하여 2심에 계류 중 6.25를 맞아 동란의 와중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대부분 월북하여 재북평화통일협의회 간부 등을 지낸 후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에서는 이 사건 관련 국회의원 중에 반민특위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소장의원이 많이 포함되어있음을 들어 당시 '반민(反民)특위 무력화' 음모의 일환으로 조작됐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경위야 어찌됐든 '최초의 국회 프락치사건'임에는 틀림이 없다.
7년 전의 상황을 잠시 돌이켜보자. 1997년 11월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대공수사실장(고성진)은 서울대 고영복(高泳復)교수의 간첩혐의 발표와 관련하여 마련한 기자회견 석상에서 '국내에 고정간첩은 얼마나 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우리는 현재 국내 좌익세력을 핵심 1만명, 동조 3만명으로 보고 있다. 고(高)교수처럼 보수로 위장한 인사들까지 포함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북한에 포섭돼있는지 가늠할 수 없다. 좌익세력과 고정간첩이 전국 각지의 기간산업에 박혀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북한의 대남 침투세력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빠른 증가를 보였을 것으로 예상되는데도 1998년 DJ정권이 들어선 이후 간첩사건 수사결과는 공개된 일이 거의 없고, 간첩검거실적 역시 눈에 띄게 줄어드는 추세를 보여왔다.
실제로 간첩 검거실적은 98년 20명, 99년 15명 등 두 자리 숫자에서 2000년 들어 3명, 2001년 4명, 2002년 2명, 2003년 3명 수준으로 급감했다. 관계당국은 올해에도 2명을 검거(국회 정보위에의 지난 10월 간첩검거 현황 보고)했다고 밝혔지만, 6.15 공동선언 이후 북한이 직접 침투시킨 공작원을 잡은 사례는 한 건도 없고, 해외유학생 포섭 등 '우회공작' 적발이 전부였다. 2000년 이후 5년간의 간첩 검거실적이 1999년 한해 실적을 밑돌고있는 실정이다.
북한이 국내 고정간첩이나 친북 지하조직에 보내는 것으로 추정되는 지령(指令)통신은 매년 8만건에 이르고있음을 감안한다면 북한이 화해협력 분위기를 중시하여 대남 직접공작을 중단했다고 판단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통독(統獨) 이전의 서독 지식인사회에서도 동독(東獨) 편을 들어주고 인정해야 '진보적인 인사' 또는 '진보적인 사고'로 평가받는 사회분위기가 있었다.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 창설 후 서독에서 활동한 동독 고정간첩은 약 2만∼3만명으로 추산됐으며, 이들의 활약상은 가히 서독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만큼 충격적이었다. 동독의 현역 육군 대위 '기욤'이 위장간첩으로 브란트 서독 총리의 보좌관으로 들어가 암약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흐름 속에서 나타났었다.
휴전 후의 월남(越南)을 패망으로 몰아간 것 역시 공산당 프락치들이었다. 당시 천주교, 불교 및 사이공대학·시민단체 등이 참여하여 결성한「구국(救國) 평화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 세력」이라는 반(反)부패운동 시민연대에 공산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반체제 세력으로 변질시키고, 끝내는 자유월남을 패망으로 몰고 갔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똑같은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konas)
정준(코나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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