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기념 시설물 소개」㊲안중근의사기념관
오는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12주기가 되는 날이다. 서울 남산자락에 위치한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찾는 일이 더욱 의미있는 시간으로 다가왔다. 기념관으로 올라가는 길이 꽤나 가팔랐지만 성곽을 따라 도심지의 경치가 펼쳐져 힘들 새 없이 기념관에 다다랐다. 안중근의사의 동상과 저 멀리 우뚝 솟아있는 남산서울타워를 보며, 선열들 덕분에 발전한 나라 대한민국의 현재에 서서 안중근의사의 나라사랑 정신과 세계평화 의지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
기념관은 지하 1층과 지상 1층, 2층의 전시실이 있는데 중앙홀에는 대형 좌상이 있어 참배를 할 수 있다. 전시관 입구인 지하 1층으로 들어가면 제1전시실이 나오는데 이곳은 일제하 시대적 배경과 안중근 의사의 출생, 가문 등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1층의 제2전시실에는 국내외 주요 활동과 동의단지회 내용이 담겨 있다. 2층의 제3전시실에는 하얼빈 의거, 법정투쟁, 옥중에서 남긴 글 등과 안 의사의 순국까지 한편의 영화같은 스토리가 전시되어 관람객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킨다.
|
안중근 의사는 일제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험에 처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려 대한의 민족혼이 살아있음을 세계 만방에 알린 민족의 영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국가보훈처에서 밝힌 자료에 의하면 안중근 의사(1879.9.2.∼1910.3.26.)는 황해도 신천 태생으로 1905년 을사늑약 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국권 회복의 길을 강구하였으며 부친상을 당하고 돌아와서는 사재를 털어 삼흥학교(三興學校)ㆍ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썼다.
|
안 의사는 러시아령의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를 왕래하면서 동지들과 구국의 방도를 모색하였고, 1909년에는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단지 동맹’을 결성하며 일사보국(一死報國)을 맹세하였다.
1909년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 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세웠다.
의거 당일인 10월 26일 9시경, 안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을 쏘아 3발을 모두 명중시켰다. 러시아군이 그를 체포하려고 하자 하늘을 향해 “코레아 우라(대한독립 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다. 이날 의거를 통해 일제의 침략을 전 세계에 알리고 침체된 항일운동을 다시 일으키는 역할을 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헌병대에서 뤼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일본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공박하며 시정을 요구하였고 조국의 완전 독립과 동양 평화의 정착을 주장하였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은 후 3월 26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
이러한 안중근의사의 숭고한 희생과 정신을 기리고자 안중근의사숭모회에서 비대면 온라인 추모식을 진행한다. 3월 26일 오전 10시에 생중계되는 온라인 추모식에 참가하여 안 의사 순국 112주기의 참뜻을 기리는 귀한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외에도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다’ 등의 행사와 ‘English로 배우는 패트리어트 안중근’, ‘안중근의사가 남긴 보물탐구’, ‘나도 큐레이터’ 등의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으니 남녀노소 누구나 관심을 갖고 안중근의사기념관을 방문하여 안중근 의사의 국가독립에 대한 결연한 의지와 헌신을 마음에 새기는 기회를 가져보자.(konas)
향군 대학생 인턴기자 박지호
- 관련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