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 당시의 민족정기 어디로 갔나
절기상으로 봄은 3월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 봄의 첫날이 3·1절이다. 올 3·1절은 '그날' 이후 여든여섯번째이고, 해방 이후로는 60회째가 된다. 우리는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관습적으로 3·1절을 맞고있지만, 남과 북의 3·1정신 해석이 다르고, 역사인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 어줍잖은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한반도 안보 정세가 심상치 않은 이 시기에 국내 정치인들이 우리의 과거사에서 배우려하기보다는 과거사 파헤치기 작업을 위한 국력 쏟을 준비에 몰두하는 등 1백년 전 을사(乙巳)조약 당시와 다름없이 좌우파로 나뉘어 이념을 달리한 채 정쟁(政爭)에 몰두하고 있는 점이 더 없이 안타깝기만 하다.
86년 전 그해 3월1일 이후 전국을 휩쓴 시위운동은 집회 1,542회에 참가인원은 무려 202만3,089명을 헤아렸다. 이 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했고, 1만5,961명이 부상했으며, 5만2,770명이 검거됐다. 당시 일본측 발표가 그렇다. 어디 그뿐인가. 교회 47개소와 학교2곳 그리고 민가715채가 불탔다.
이 거국적 시위를 두고 우파에서는 '민족독립운동'이라고 부르지만, 좌파는 '민족해방투쟁'이라고 부른다. 명칭부터가 이처럼 다르다. 우리는 이처럼 거족적 독립운동을 일으키고도 일제의 탄압으로 많은 희생자를 낸 채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내외적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선명히 드러냄으로써 멀리 해외에까지 우리 근대민족주의 운동의 시발점으로서의 족적을 남긴 것이다.
3·1운동 후 일제는 한반도에서 무단정치를 끝내고 교활한 '문화정치'를 등장시켰다. 우리는 그 여세를 몰아 대외적으로 '상해(上海) 임시정부'를 탄생시켰고, 해외 무장독립운동(독립군)을 강화할 수 있었다.
3·1운동은 아시아지역의 반(反)식민지 민족운동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무저항 배영(排英)운동(사타그라하 운동) '이집트의 반영(反英) 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중동지역의 민족운동이 모두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촉진됐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작 3·1운동에 대한 우리의 역사인식은 어떠한가. 북한은 이 민족적 분노가 '러시아의 사회주의 10월혁명의 영향으로' 1919년 전민족적 3·1봉기로 폭발한 것이라고 그들의 역사사전과 정치사전에 기술하고 있다. (金昌順옹의 글 참조)
또한 "역사적 3·1봉기는 평양(平壤)에서의 대중적 반일독립만세 시위투쟁을 첫 봉우리로 하여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평양에서의 대중적 반일 독립만세 시위투쟁은 우리나라 반일해방투쟁의 탁월한 지도자 김형직(金亨稷)선생님께서 일찍이 반일독립투쟁의 믿을만한 거점으로 꾸려 놓으신 평양 숭실학교의 애국적 청년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일어났다"고 했다. '김형직'(金亨稷)은 바로 김일성의 아버지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역사변조인가. 저들의 국립사회과학연구소가 펴낸「조선전사」(朝鮮前史)에 그렇게 곡필하고 있다.
해방 이듬해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수십만 서울시민의 반일시위로부터 시작되었다. 시위군중은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성난 파도와 같이 일제침략자들을 맞받아 나갔다"고 했던 저들이 70년대 들어 말을 바꾼 것이다.
북한당국자들의 역사변조는 이것뿐이 아니다. "민족대표로 자처하던 부르주아 사대주의자들은 투항주의적이고 무(無)저항주의적이며 외세의존적 방법으로 '독립'을 얻으려고 시도하다 시민들의 세찬 시위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겁을 먹고서 즉시 일제에게 투항했고, 인민들의 투쟁은 계속되었다"고 했다. 우파 민족주의를 의도적으로 헐뜯고 인민민주주의의 계급투쟁사관을 도입하여 짜 맞추고 있다.
김일성은 생전에 "3·1봉기를 계기로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시기는 종결되고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기치 밑에 노동계급을 선두로 하는 조선인민의 민족해방투쟁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역설했다. 우파(부르주아) 민족주의는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다는 뜻이다. 민족주의의 열기를 애써 의식화된 기저층(基底層)의 운동으로 변질시키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굳이 민초들의 민족주의 정신 점화시기를 들자면 19세기말의 '만민(萬民)공동회' 시절로 거슬러올라야 한다. 3·1봉기가 '최초'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를 우파입장에서 보자면 해석은 확연히 달라진다. 한국의 사회발전사는 3·1운동을 분기점으로 급진적 졸속주의에 입각한 계급투쟁의 민족해방이 아닌, 계급을 초월한 민족단일전선의 필요성이 요청되는 시기로 적고 있다. 3·1독립운동 이후 신간회(新幹會) 상해임정(上海臨政)이 나오게 된 것은 모두 이같은 시대적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선구적 민족지도자들에 의한 상해임정의 공화체(共和體)정신을 계승한 것이 대한민국인데도 저들은 3·1운동을 우파(부르주아)민족주의 행로의 종말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중국은 차후 북한을 접수할 야욕을 갖고 고구려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시키고자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날조된 드라마 만들기에 집착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주한 일본대사가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겁도 없이 "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억지주장을 펴고있는 요즈음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가. 국민의 귀에는 여야의 정치적 선제(先制)를 위한 기(氣)싸움 소음만 요란할 뿐, 정부가 중·일의 이런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에 정치력을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조선 말기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도 한가롭게 과거사 파헤치기 등에 국력을 낭비할 시기가 아닌 것이다. 한강수(漢江水)가 수많은 지류(支流)를 큰 품으로 끌어안고 흐르듯 정치인들은 한껏 분열된 국론을 한데 모아 국가의 미래를 열어나가는 선각자적 안목과 지혜를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이 나라 역사에 진정한 지도자로 남기를 원한다면 국민을 분열과 갈등의 골짜구니로 몰아가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konas)
정준 (코나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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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3.1운동을 자기에게 유리한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으니 한심 스럽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김일성이 우상화에 현재 남한내의 좌경화(진보파)는 친일 청산 기치를 내걸고 자기식으로 해석하며 국론을 분열하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오! 일본의 총칼 앞에 맞선 우리 선혈들이 울고 계신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
2005-03-03 오전 2:28: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