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기념 시설물 소개」 (2) 남한산성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이라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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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삼전도의 굴욕으로 기억되는 이 말과 함께 병자호란의 아픔을 지닌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1636년 당시 인조 14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했지만 산성 내 물자가 떨어지자 인조는 성문을 열고 삼전도(지금의 송파)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청태종에게 치욕의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청나라와 조공책봉관계를 맺게 된다.
당시 남한산성에는 50여일을 버틸 수 있는 식량과 13,000여명의 군사가 있었고 초반 공방전에서는 조선군이 선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남한산성 외부에 있던 식량을 내부로 운반하지 못한데다가 강추위까지 겹치는 등 악재가 쌓이면서 45일만에 패하게 되었다. 결국 인조가 항복하면서 조선은 청의 신하가 되었고 항복의 대가로 배상금과 함께 소현세자, 봉림대군, 척화파 신하들과 20만여명의 백성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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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간에 배웠던 이런 내용을 알고 남한산성에 오르면 나지막한 성벽 하나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남한산성을 방문하는 사람들 대부분 인증샷을 남기는 배경으로 ‘수어장대’가 있다.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으로 성내를 지휘하는 장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장엄한 분위기를 풍기는 수어장대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물론이고, 이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 역대의 국왕이 남한산성을 찾을 때 반드시 올라서 옛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였던 곳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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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아있는 남한산성의 각종 시설은 험한 지형을 활용해 성곽과 방어시설을 구축해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단계를 잘 나타내는 좋은 자료로 인정받아 2014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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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웃나라끼리는 친하기가 정말 어렵다고 한다. 서로 얽힌 과거역사, 영토분쟁, 군사문제 등이 얽혀 적대적이거나 긴장상태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조선을 둘러싼 주변 강대국의 지역패권 다툼이 현재의 우리나라 안보상황과 겹쳐보인다면 억지스러운 것일까?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분쟁이 단순한 양국의 싸움이 아닌 새로운 질서를 결정하는 과정이라는 것이 정말 안타깝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 우리나라가 평화와 안정 속에 남한산성이 겪었던 가슴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정말 튼튼한 안보태세를 갖추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konas)
향군 대학생 인턴기자 양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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