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보도] 眞相을 은폐한 濟州4·3事件眞相調査報告書(2)
진상조사보고서의 문제점들①
공산주의자들(남로당)의 활동을 축소 또는 은폐
(1) 사건의 발발원인을 모호하게 제시
보고서에서는 “발발원인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이런 긴장상황을 조직의 노출로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에 접목시켜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4·3무장봉기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다”고 기술하므로서 발발원인을 모호하게 처리하였다. 발발원인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면 핵심 이유가 무엇인가를 제시하여야 하는데, 사건의 시발만 기술하고 발발원인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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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는 1947년의 3·1사건을 계기로 경찰과 좌익이 팽팽히 맞서는 긴장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유엔이 개입하게 되자 남한에 우익정부가 수립되면 입지가 어려워지는 남로당이 2·7폭동지령을 내리면서 제주도당에게도 (비무장)폭동지령을 내렸고, 이의 준비과정에서 220여명의 당원이 경찰에 체포되므로서 조직이 노출되어 와해되려 하자 남로당 제주도당은 2월 중순의 신촌회의에서 경찰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최초의 고문치사사건보다 20여일이 앞서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4·3사건의 발발원인은 중앙당의 폭동지령과 조직의 노출로 수세에 몰린 제주도당이 신촌회의에서 경찰에 대한 무장반격전을 결정하는 등 남로당의 정치투쟁때문이었다.
5·10선거를 파탄시키기 위해서 사건을 일으켰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4월 15일의 제주도당대회에서 향후 투쟁목표로 결정한 것이지 신촌회의에서 거론된 것 같지는 않았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경찰의 탄압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역대 어느정권에서나 있었고, 경찰의 좌익탄압은 체제수호차원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조치였다. 다만 4·3사건 발발 이전에 3건의 고문치사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경찰에 대한 무장공격을 결정한 신촌회의 20여일 이후의 일이어서 경찰의 탄압때문이란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2) 남로당의 폭동지령문을 부정
제주4·3사건에서 쟁점사항중 하나가 ‘남로당 중앙당의 폭동지령설’인데 남로당의 폭동지령문이 경찰이 남로당 회의장을 급습하여 노획한 비밀서류에서 확인되었다. 미군보고서(주한미육군971방첩대 문건과 주한미육군사령부 일일정보보고서)에서 발견된 남로당의 폭동지령문은 (1)1948년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제주도 전역에서 폭동을 시작하라. (2)경찰간부와 고위관리들을 암살하고 경찰무기를 노획하라. (3)유엔(한국)위원단과 총선거, 군정을 반대하라,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라. 등 3개항이었다.
그럼에도 보고서에서는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폭동)지시가 있었다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박갑동의 저서 『박헌영』에 관한 저자의 증언내용과 제9연대의 문상길 중위가 “중앙지시가 없으므로 어찌할 수 없다”고 말한 자료를 제시하였다.
박갑동의 저서에 “그러던 중 중앙당의 폭동지령이 떨어졌다. 아마도 그 지령은 3월 중순쯤에 현지의 무장행동대 김달삼에게 시달된 것으로 안다”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 글을 확인하니 “내가 쓴 글이 아니고 신문에 연재할 때 외부에서 고쳤다”고 저자인 박갑동이 해명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무장대의 내부문건인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는 1948년 2월 말에 육지로 갔다가 보름만인 3월 15일에 제주도에 되돌아온 전남도당이 파견한 지도원이 (제주도당이 결정한 무장공격에 관하여) “국경(국방경비대)프락치는 도당에서 지도할 수 있다. 이번 무장반격에 이것(경비대)을 최대한 동원하여야 한다”고 지시하므로서 박갑동이 저서에서 밝힌 ‘중앙당의 3월 중순 폭동지령설’이 사실이었음이 입증되었다. 다만 전남도당 지도원에 의해 전달된 중앙당의 지령은 무장반란에 관한 최초의 지령이 아니라 제주도당이 신촌회의에서 결정한 경찰에 대한 무장공격과 이의 세부실천내용인 국방경비대(제9연대)와 자체양성한 유격대 등을 동원하는 무장반란에 대한 승인차원의 지령이었다.
그리고 문상길 중위는 ‘경비대를 동원하라’는 제주도당의 명령에 대하여 중앙당의 지시가 없으므로 경비대 동원을 반대한 것이지 남로당제주도당의 무장투쟁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문 중위는 4·3사건 발발 얼마 후인 1948년 4월 20일 경 김달삼과 비밀회합을 한 후로 무기를 무장대에 유출하고, 병사 40여명을 집단탈영시켰으며, 토벌사령관이며 자신의 상관인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하는 등 무장투쟁에 적극 가담한 인물이다.
이와 같이 폭동지령문이 문서로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팀장은 유독 이 지령문을 이런 저런 이유를 붙여 한사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미군자료라면 꺼벅하던 그가 미군자료중 ‘폭동지령문’만을 문제삼는 것은 ‘제주4·3사건이 남로당 중앙당의 폭동지령 때문에 발발하였다’는 주장을 반대하려는 저의였다. 그렇게 해야만이 제주4·3사건이 남로당 중앙당과는 무관하며, 미 군정의 억압과 폭정에 맞서 남로당제주도당이 주민들과 함께 봉기했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목적을 위해서는 미군자료까지도 자의로 부정하였다.
(3) 남로당중앙당과 전도당에서 파견한 지도원의 역할을 무시
4·3사건 전개과정에서 남로당제주도당과 무장대의 지휘체계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들의 지휘체계를 들여다 보면 제주도민들이 제주도당위원장직과 무장대사령관직을 맡고 있어 이들이 사건을 지휘하는 것 처럼 보이나 실상은 상급당인 전남도당과 중앙당에서 지도원이 파견되어 투쟁에 관하여 중요한 업무를 처리하였으므로 실질적인 지휘자는 중앙당과 전남도당에서 파견된 지도원이었다. 제주도당 간부였던 모 증언자는 ‘지도원은 상급당의 특명전권대사와 같아서 그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으며, 한달간격으로 교대하였다’는 증언이 있었다. 그리고 수집된 자료에는 4명의 전남도당과 중앙당 지도원이 생포되어 이들의 인적사항과 사진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자가 인터부하여 일간지에 보도된 내용도 있다.
그런데도 보고서에서는 지도원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았으며, 어떤 내용을 입증하기 위한 제주도당 간부의 증언에 ‘지도원은 항상 있었다’는 한귀절이 있을 뿐이다.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려면 정부에 맞선 남로당제주도당이나 무장대의 지휘체계를 연구하고 이를 밝히는 작업은 상식에 속하는데 이를 무시하고 본인이 수정안에서 제시한 자료까지 묵살한 것은 집필자가 진상규명을 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보였다.
(4)주요정책을 결정한 남로당제주도당대회를 은폐
4·3사건이 발발한지 10여일만인 1948년 4월 15일에 제주도당대회가 중앙당의 지시로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지금까지의 투쟁결과를 분석하고 5·10 선거저지대책을 강구하는 한편 당과 유격대의 조직개편을 단행하는 등 향후대책을 결정하였다.
주요투쟁목표로는「반 미, 반 이승만, 구국투쟁」의 일환으로 5·10 단독선거저지에 두었으며, 조직개편의 방향은 도당에 군사부를 공식적으로 편성하고, 면당에 소속되어있는 유격대와 자위대 일부를 도당에 편입하여 3개연대를 편성한다는 내용이었다. 도당에 3개연대를 편성한다는 것은 무장대의 주력을 도당에서 직접지휘한다는 중요한 조치였다.
도당대회의 의미는 남로당 중앙당이 사후수습으로 투쟁방향을 중앙당의 노선에 귀일시켰다는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는 중앙당이 비무장폭동을 지령하기는 했으나 제주도당에서 무장투장을 일으킨데 대한 사후수습책이라 할 수 있다.
남로당 제주도당대회는 중앙당이 4·3사건의 투쟁방향을 조정하는 등 사건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는 사건이므로 보고서에 이를 반드시 반영해야만 하였다.
그런데도 수정안에 포함된 제주도당대회는 묵살되었다. 보고서작성팀장은 남로당측의 최고위급 정책조정회의를 은폐하므로서 4·3사건의 진상규명 의지가 없을을 확실히 하였다.(계속)
나종삼(前 4.·3위원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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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작성팀이 공산주의자들 이라는 주장인가요? 억울한 누명으로 반세기를 살아온 제주도민의 원한을 풀어주려는 정부의 노력을 폄하하지 마시오. 진상을 정확히 밝힌 건데 왜 딴지를 거는지 모르겠소. 당신들이 이렇게 수구적인 태도로 나오는 한 영원히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할거요!!</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
2005-04-19 오전 8:34:09우리의 현대사관이 자유민주주의적 역사관에서 이제는 김일성사관, 북한식 사관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 문제다. 전교조의 집요한 활동이 이뤄낸 결과이다. 친북적 정치인들의 노력의 결과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위기이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5-04-18 오후 4:4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