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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보도] 眞相을 은폐한 濟州4·3事件眞相調査報告書(3)

진상조사보고서의 문제점들②

Written by. 나종삼   입력 : 2005-04-24 오후 12: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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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무장투쟁방법을 결정한 무장대와 경비대푸락치간의 대책회의를 은폐

 (가) 김달삼과 문상길과의 대책회의

 미 군정장관은 남로당의 무장공격을 경찰력만으로는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경비대에 출동명령을 내렸으며, 제5연대에서는 오일균 소령이 지휘하는 1개대대를 제주도로 이동시켰는데, 이 병력은 4월 19일 진해를 출항하여 20일 아침에 제주항에 입항하였다.

 그런데 이런 정보를 사전입수한 프락치인 9연대 3중대장 문상길 중위는 무장대사령관 김달삼에게 긴급연락하여 대책을 논의하였다.(제9연대와 대정중학교는 구 일본군 병영을 함께 쓰고 있었으므로 제9연대의 문상길 중위와 대정중학 교사였던 김달삼은 잘 아는 사이임)

 두사람의 회합에서는 4·3발발시의 경비대 동원실패에 관한 토론을 한 듯하며 “국경의 세포는 중앙 직속(경비대내 남로당의 장교조직은 중앙당에서, 하사관 조직은 지방당에서 관장)이므로 도당의 지시에 복종할 수는 없으나 행동의 통일을 위하여 밀접한 정보교환, 최대한의 무기공급, 탈영병 추진, 교양자료의 배포 등을 합의하였고, 최후단계에서는 경비대도 총 궐기하여 인민과 더불어 싸운다”고 결정하였다.

 김달삼과 문상길 간의 합의사항은 대부분 실행되었는데, 경비대가 작전을 하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별 성과를 얻지 못하였고, 문상길 중위는 4월중에 99식 소총 4정을 무장대측에 공급했으며, 5월 21일에는 문상길 중위의 지시로 9연대 병력 41명이 집단탈영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탈영병들은 대정지서를 덮쳐 ‘지원나온 경비대’라 속이고 경찰 등 5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중상을 입혔으며, 서귀포경찰서에 들려서는 ‘출동중인 경비대’라 속이고는 차랑 1대를 지원받아 유유히 사라졌다.

 이런 중요한 사태가 발생한 것은 무장대사령관 김달삼과 경비대프락치 문상길 간의 대책회의 결과로 발생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러한 대책회의를 보고서에 누락시켰을 뿐만 아니라 팀장은 보고서에 추가하여야 한다는 필자의 수정안마저 거부하였다.

 (나) 김달삼과 오일균과의 대책회의

 미 군정은 군정장관 딘 소장이 주관하는 군·경 최고위급 4·3사건 대책회의를 1948년 5월 5일 오전에 제주도청에서 열었다. 그런데 회의도중 조병옥 경무부장과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이 의견충돌 끝에 육박전을 전개함으로서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회의는 중단되었다. 이 결과 다음날인 5월 6일부로 김익렬은 연대장직에서 해임되고 후임으로 박진경 중령이 항공편으로 제9연대장으로 부임했다.

▲ 5·5 최고수뇌회의 참석차 제주에 온 수뇌부들. 좌측에서 두번째 군정장관 딘 소장,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조병옥 경무부장, 맨 오른쪽이 김익렬 연대장.

 남로당은 무장대에 우호적이던 김익렬을 이용할 가치가 있는 인물로 평가하여 4·28평화회담에 응한바 있었다. 그런데 김익렬이 해임되자 부랴부랴 지도원을 제주도에 보내어 대책을 강구토록 하였는데, 박진경을 뒤따라 5월 7일에 제주에 도착한 중앙당 지도원은 “국경프락치는 도당에서 지도할 수 있다”고 하면서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 결과 제주도당 대표와 국경프락치 대표간의 회담이 투표일인 5월 10일에 제주읍에서 있었다.

 제주도당 대표로 군책 김달삼과 조직책 김양근 그리고 국경프락치 대표로 5연대 대대장 오일균 소령과 제9연대 정보과장 이윤락 중위가 대책을 협의하고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① 국경지도문제는 도당에서 지도할 수 있다고도 하고, 중앙직속이라고도 하므로 해결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행동의 통일을 위하여 각각 소속당부의 방침 범위내에서 최대한의 협조를 하여야 한다.

 ② 미 군정과 통위부는 전면적 포위  토벌작전을 지시하고 있는데, 이것이 실행되면 결국 투쟁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국경(프락치)은 토벌작전에 대하여 적극적인 사보타주 전술을 쓰며, 국경의 호응투쟁을 중앙에 건의한다. 특히 대내 반동의 거두 박진경 연대장 이하 반동장교들을 숙청하지 않으면 안된다.

 ③ 최대한의 힘을 다하여 상호간의 정보교환과 무기공급 그리고 가능한 한도내에 있어서의 탈출병을 적극 추진한다.

 이 합의내용은 4월 20일의 김달삼-문상길 간의 합의내용에 토벌작전에 대한 사보타주 전술 사용과 박진경 연대장 등 반동장교들의 숙청을 가미한 것이었다. 앞으로의 사건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친 박진경 연대장을 숙청하기로 합의한 것은 중요한 내용이었다.

 이는 미 군정이 제주도에서 대책회의를 하고 연대장을 강성인물로 교체시킨데 대한 남로당 제주도당 차원의 역대책으로서 앞으로의 투쟁방향을 결정한 중요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팀장은 이런 중요한 대책회의를 은폐하였고, 이를 보고서에 반영하자는 수정안을 거부하였다.

 (6) 제주도를 적화하려 했던 군.경푸락치사건을 은폐

 남로당제주도당은 4·3사건을 일으키면서 유격대는 물론 경비대까지 동원하여 일거에 제주도 전역을 장악하려다가 실패한바 있거니와 정부수립 이후인 10월 1일의 도전을 계기로 정부의 대대적인 토벌이 가까워지자 군·경내에 있는 프락치들과 합세하여 11월 1일을 기하여 군·경을 장악하여 제주도 전역을 다시 장악하려 하였으나 사건이 미리 발각되므로서 실패로 돌아갔는데,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가) 군 프락치 사건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여·순반란의 여파로 갑자기 제주도경비사령관이 되어 제주도지역 진압작전의 총책을 맡게 되었다. 그는 여·순반란을 역이용하려고 일부병력을 반란부대로 위장시켜 무장대나 좌익을 유인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경찰과 협의하기 위하여 전화기를 들자 합선으로 인한 모 하사관의 통화내용을 듣게 되었는데, 하사관은 연대장을 사살하는 등 무장대에게 작전계획을 누설하고 있었다. 이에 연대장은 헌병으로 하여금 교환병과 통화자들을 조사케 하고, 비상대기하고 있던 1개중대로 영내에 있는 제주출신이 많은 제1대대원을 조사토록 하여 많은 동조자를 체포하였다. 군은 이 사건으로 부대장병 80여명을 체포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여기에는 유인부대로 선정된 부대원들도 끼여있었다.

 미군은 “10월 28일 밤 송 소령은 1대대원 17명을 공산주의 세포라고 체포하였다... 송 소령은 29일 밤 주모자들 중 6명을 처형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처형된 주모자중에는 연대구매관 강의원(4기) 소위와 박격포 소대장 박노구(5기) 소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9연대는 29일에는 공산주의자들 200명 이상이 모여 회합하는 장소를 급습하여 치열한 교전 끝에 135명을 사살하고 “섬 전체를 전복하려는 공산주의자의 음모를 분쇄했다”고 보고하기도 하였다.

 이로서 섬을 장악하려던 공산무장대의 음모가 사전 저지되었으나 아직은 공산주의자들의 음모가 완전히 분쇄된 것은 아니었다. 뒤이어 경찰 프락치 사건이 터졌다.

 (나) 경찰 프락치 사건

 여·순반란사건의 반란병력 일부가 제주도에 상륙할 것이란 유언비어가 있자 경찰은 병력 일부를 해안선에 배치하였었다. 경찰청 구내이발관에 근무하던 S순경이 10월 말 오전 10시경에 교대차 해안선으로 가다가 모 통신사 기자를 만났는데, 그로부터 “제주가 곧 해방된다. 지금 당장 총을 가지고 산으로 가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경찰청으로 되돌아가 득문사항을 보고하였다. 이를 빌미로 경찰이 조사를 벌여 기자가 회합하는 장소를 덮쳐 수명을 체포하고 이들로 부터 “오늘밤 10시에 무장대가 제주시를 총 공격하여 완전 해방시킨다”는 자백을 받았다. 이에 경찰은 비상배치하면서 협의자들의 자백에 따라 경찰내부의 가담자들부터 체포하기 시작하였는데, 수사는 급진전되어 하루밤에 경찰청, 경찰서, 세무서, 검찰청, 법원, 읍사무소, 해운국 등에서 83명을 체포하였다. 그 뒤에도 수사는 한달여동안 계속되면서 서귀포 등 제주 일원에서 1,000여명의 가담자를 검거하였다.

 미군은 이 사건에 대하여 “경찰 및 정부관리를 암살하고, 동시에 폭동과 혼란을 일으켜 제주도에 인민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음모가 유격대의 작전개시 30분 전인 11월 1일 새벽 4시에 밝혀졌다. 이 음모에 연루된 사람 75명이 체포되었으며, 그 중에는 경찰도 몇 명 포함되어 있었다”고 11월 3일자 보고서에 기록하였다.

 군·경 프락치 사건은 4월 3일의 경찰공격사건과 더불어 제주도 전역을 장악하려던 남로당의 두 번째 기도로서 4·3전개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新天地』1949년 9월호에 “남로당 지령하에 수개월간 계획한 전 제주를 완전히 인민공화국화 하려던 대 음모사건으로서 여·순사건과 비교할 바가 아닌 대대적 음모다”라고  소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고서에 누락시켰으므로 필자는 이를 수정안에 포함시켰으나 집필자는 “제주도를 장악하려고 기도한 것만으로는 혐의의 진위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붙여 이를 수정을 거부하였다.

 미군까지도 섬 전체를 전복하려는 음모라고 인정하고 있는데,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제로 섬을 장악하지 않았다고 해서 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정요구마저 거부하므로서 공산주의자들의 기도를 은폐한 것은 진상규명을 외면한 팀장과 집필자의 저의로 보였다.(계속)

 나종삼(前 4.·3위원회 전문위원)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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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   

    북한이 제주도를 유달리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항미 민중운동의 근거지라는 것 때문이다. 무고하게 희생당한 제주도민들이야 정부가 보상과 명예를 회복시켜 줘야겠지만 공산당 활동에 가담하다 죽은 빨갱이들까지도 명예회복의 대상이 돼서는 안된다. 명명백백히 가려서 보상과 처벌을 구별해 줘야한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

    2005-04-25 오전 9:5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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