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反美)세력이 알아야 할 '한미(韓美)관계사'
'반미(反美)세력이 반미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즐겨 인용하는 사례가 있다. 다름 아닌 1905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密約)'이다. 그들은 미국이 일본과 맺은 이 밀약으로 인해 한국이 일본에 합방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38선 분단 책임까지도 미국에 떠넘기고 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1905년(광무 9년) 7월 29일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루스벨트의 특사인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 Taft)와 일본의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가 도쿄(東京)에서 은밀하게 맺은 협약이다.
이 비밀협약은 일본이 필리핀을 침공하지 않으며, 필리핀을 미국의 영향하에 두는 대신 미국은 한국을 일본의 보호 아래 두는 것을 묵인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또한 극동의 평화유지를 위해 미국·영국·일본이 동맹관계를 확보해야 한다는 합의도 포함되어 있다.
반미세력은 바로 이 부분에 집착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 당시 상황은 이렇다. 가쓰라·태프트 협약은 러·일전쟁이 일본과 영일(英日)동맹의 승리로 돌아가자 미국이 일본의 팽창 위협으로부터 '필리핀을 지키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지배' 인정에 주안(主眼)을 둔 협약이 아니었던 것이다.
1905년은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의 전초전 성격을 띈 1년7개월간의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한국에서의 지배권과 만주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러시아에서는 패전의 영향으로 혁명운동이 가속되었고, 미국으로서는 일본과의 대립이 시작됐던 첫해였다.
일본의 한반도 합방은 오히려 당시 세계의 맹주(盟主)였던 영국의 비호 아래 묵계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에 이르기까지 세계는 지금과는 달리 영국이 주도하는 패권주의 영향 아래 있었다.
당시 영국은 이 맹주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의 남진(南進)을 저지해야 했고, 그 임무는 청일(淸日)전쟁에서 이긴 일본에 돌아갔다. 일본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영국의 배려는 1902년 1905년 1911년- 세 차례에 걸친 영일(英日)동맹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당시만 하더라도 이 세력판도에 끼어 들 처지가 되지 못했다. 미국으로서는 필리핀이나마 일본의 수중에 넘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 한반도의 안위(安危)는 당시로서는 미국의 1차적인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반미주의자들은 영일(英日)동맹은 언급조차 하지 않으면서 세계사적 본류(本流)에서 벗어나 있던 이 미일(美日)간의 협약으로 인해 한국이 일본에 합방되는 원인을 제공한 것처럼 강변하고 있다. 실상(實相)에서 크게 벗어난 궤변이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1914년 이전의 세계는 이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38선 분단 책임문제만 해도 그렇다. 한반도 분단에서 6·25남침(南侵) 등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사태는 '러시아 제국(帝國)주의 부활이 한반도에 미친 재앙이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소련의 북한지역 점령정책의 결과였다. 따라서 한반도 분단의 책임을 가릴 때 미국을 소련과 동일선상에 놓고 논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
UN에서 소련에 거부권을 부여한 것도 미국이 세계질서를 운영함에 있어서 소련을 참여시키고자 했던 미국의 원려(遠慮)였다. 한반도문제와 관련하여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의 합의에 의하여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미소(美蘇)공동위원회를 출범시킨 것 역시 미국의 그런 배려의 결과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얄타회담 합의를 깨고 그해(1945년) 6월 동구(東歐)에서 폴란드에서부터 세력팽창정책을 펴기 시작했고, 한반도에서는 해방 한달 남짓 경과한 1945년 9월30일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을 지시함으로써 이미 공산 치하의 단독정부 수립이 추진되고 있었다.
냉전(冷戰)은 미국이 소련의 이 같은 야욕을 깨달으면서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미국정부가 맥아더 사령부에 내린 '일반명령 1호'가 전(全) 한반도가 소련의 지배 하에 떨어지기 직전 소련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한 절묘한 시점에서 취해진 조치였음을 알아야 한다.
영일(英日)동맹이 우리에게 미친 재앙은 일제(日帝) 치하 36년간으로 그치지 않고 한반도 분단과 6·25로 이어졌던 것이다. '한반도 분단'은 그런 냉전 상황에서의 불가피한 결과였을 뿐이다. 우리가 그 재앙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거의 전적으로 한미동맹에 힘입은 바 크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기보다는 차라리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말은 휴전 이후 미국의 대한(對韓)원조가 계속되는 가운데에도 정치와 경제가 뒤뚱거리는 어지러운 상황을 빈정댄 윈스톤 처칠의 고언(苦言)이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개화는 이처럼 요원해 보였는데도 미국은 국제사회의 냉소 속에서도 한국의 민주주의 지원을 위해 지속적으로 경제지원(해외원조)을 해주었고 한국은 끝내 '한강의 기적'과 '자유민주주의의 개화'로 보답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오늘은 지속적이고도 우호적인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우리 국민의 피땀의 결정'이다. 한미공조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리를 존중하는 인류 공통의 가치에 바탕을 둔 탁월한 선택이었다. 온갖 역경 속에서 승리를 엮어온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konas)
정준(코나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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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플때 아쉬운 소리하다가 이제 미국의 도움과 지원으로 배불러지니까 배신 때리는 소리가 나오고 있지요. 미국에게 할말은 해야되고 대등한 입장에서 관계유지도 필요하지만 反美만으로는 우리가 모든걸 잃게된다. 자주도 미국을 버리고는 이룰수 없는 과제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
2005-04-11 오전 9:4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