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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기념] (30) 故 오규봉 하사 동상

Written by. 인턴기자 주민우   입력 : 2025-11-25 오후 2:2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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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중부 전선의 최대 격전지였던 백마고지, 그곳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장렬히 산화한 한 청년의 동상이 천안시 성환읍 성환초등학교에 세워져 있다. 이번 기사의 주인공인 故 오규봉 하사 동상이다.

 ▲ 천안시 서북구 성환초등학교에 세워진 故 오규봉 하사 동상. 동상 앞에는 태극기 무늬 바람개비가 말없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konas.net

 

1928년 충남 천안군 성환면에서 태어난 오규봉 하사는 백마고지 육탄 3용사 중 한 명이며, 육탄 3용사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적진을 육탄으로 돌파해 고지를 탈환한 강승우 중위, 안영권 하사, 오규봉 하사를 일컫는다.

정전협정을 앞두고 전 전선에 걸쳐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전개되고 있던 곳 중 백마고지는 철원에서 평강까지 이어지는 중부 전선 철의 삼각지대를 아우르는 전초기지이자 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1951년 12월에 오규봉 하사는 부산 피난 당시 자원입대했다. 그때 그의 나이가 24세였다. 

그는 육군 백마부대 제9사단 소속으로 철원 백마고지 탈환 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때의 전투는 진격을 감행하지 않을 뿐, 거의 고정된 전선에서의 근거리 쟁탈전은 치열하였으니 한 능선, 한 고지에서 퇴각과 탈환을 반복하는 게 보통이었다.

 ▲ 고 오규봉 하사 동상과 약력. 백마고지 전투의 전황과 육탄 3용사로서의 전공이 함께 새겨져 있다. ⓒkonas.net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백마고지에 대한 전면 공격을 시작했다. 중공군은 이날 아침부터 9사단 방어선 전역에 집중 포격을 가하고, 북쪽 5km 전방의 봉래호 수문을 폭파했다. 이에 아군 후방을 가로지르는 역곡천이 범람했다.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이 차단된 것으로 판단하고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다. 국군 제9사단은 교대 병력을 투입하며 중공군과 치열한 공방을 이어갔다.

이때 아군 병력은 약 1만 명, 중공군 병력은 약 4만 명으로, 수적으로 매우 열세였다. 그러나 모든 장병은 한마음이었다.

 ▲ 故 오규봉 하사 동상 안내문. 백마고지 전투의 개요와 육탄 3용사의 전공이 적혀 있다.  ⓒkonas.net

 

10월 12일 국군의 역습이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좌절되자 강승우 소위와 안영권 일병, 오규봉 일병은 특공대를 자원하여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휴대하고 육탄으로 적진에 돌진하였다. 

이들은 적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며 장렬히 전사했고, 이들의 희생은 백마고지 탈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써 12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공방 끝에 백마고지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끝을 맺게 되었다.

정부는 3용사의 눈부신 희생정신을 높이 사 1953년 7월 1일, 그들에게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하고, 강승우 소위는 중위로, 오규봉 일병과 안영권 일병은 하사로 추서했다. 

 ▲ 9사단이 남긴 故 오규봉 하사 동상 건립 개요  ⓒkonas.net

 

2013년 9사단 백마부대는 모금 활동을 벌여 추모비 건립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고 천안시가 부지를 제공해 전사 61년 만에 오규봉 하사의 고향인 충남 천안시 동남구 삼룡동 천안삼거리초등학교에 동상을 세웠다.

2018년 6월에는 학생들과 지역민들이 오 하사의 숭고한 애국 희생정신을 기리고 본받고자 동상을 오 하사의 모교인 성환초등학교로 이전했다.
 
오규봉. 그의 이름 석 자는 지금도 국민의 가슴 속에, 그리고 고향 천안 시민들의 기억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konas)

향군 대학생 인턴기자 주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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