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기념] (56) 동작 학도의용병 현충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정립된 국제법에서는 15세 미만을 징집하는 것을 전쟁범죄로 간주하고, 18세 이하까지는 징병하되 보호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동과 청소년을 징집하는 것은 비인도적일 뿐만 아니라, 해당 국가의 미래 인력을 소모하는 일이라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6.25 전쟁 초기 풍전등화였던 대한민국 정부도 절대로 18세 미만으로는 징집을 실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린 학생의 신분으로 전쟁에 지원한, “학도의용군”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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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국군이 혼란을 수습하고 방어전에 돌입한 1950년 7월부터, 모든 학도의용군에게 복교령이 내려졌던 1951년 3월까지는 전방에 2만 7천여명에서 최대 5만명, 후방 지원 부대에 20만명의 청소년들이 있었다.
이들은 제일 어린 자가 12살, 최연장자가 대학생일 정도로 연령대가 다양했다. 그리고 학도의용병의 제일 큰 의의는 바로 “자발적”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맞서 싸웠다는 점이다.
과거 세계대전 당시 멸망 위기에 몰린 많은 국가들이 어린 청소년들을 무차별적으로 징병한 것과는 대비되게 절대다수의 학도의용병들은 의용군 혹은 자원입대 형태를 띄었다.
대표적으로 6월 29일 수원에서 중학생을 중심으로 한 구국비상학도대가 조직되었고, 7월에는 부산에서 7백여명, 8월에는 인천에서 1천여명, 부산에서 8백여명, 강원도에서 9백여명, 그리고 대구에서 6백여명의 학도병이 의용군 형태로 국군에 편입되었다. 심지어는 일본에 거주중이던 재일교포 청소년들이 대한민국까지 와서 자원입대하는 일도 있었다.
특히, 대구 출신의 학도의용군 중 71명은 국군 3사단 휘하에 배속되었는데, 이들은 다른 아군의 지원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북한군 정규병력에 맞서 포항여중을 4번이나 사수하는데 성공하며 국군과 유엔군의 포항 사수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희생 역시 적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불과 1년 남짓한 기간에 치열한 전투를 거치며 약 7000명의 학도의용군이 희생되었는데 일례로 직전 문단에서 언급한 포항여중 전투에서도 결국 71명 중 48명의 학도의용군이 전사하고 말았다.
또한 전투를 겪은 상당수의 학도병들은 오랫동안 그 충격으로 사회와 학교로 돌아가서 학업을 이어가는 것을 어려워했다고도 전해진다.
하지만, 전쟁터를 피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진해서 입대해 대한민국을 사수하는데 공헌한 그들의 희생 정신과 용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과 좋은 본보기가 되었고, 그랬기에 현재에도 대한민국 곳곳에 이들 학도의용군을 기리는 기념비와 현충비가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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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비석은 정전협정 3년뒤인 1955년, 학도위용군과 같은 나이대였던 전국 청소년 학생들의 모금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대표적으로 이번에 필자가 취재한 동작 학도의용군 현충비는 바로 이러한 수많은 현충비 중 하나이며, 아직도 전투가 벌어졌던 전적지 혹은 해당 학도병들이 재학했던 학교에서는 자체적으로 학도의용군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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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 혹은 재학했던 학교에 학도의용군 출신자가 있었는지 살펴보고, 만약 있다면 그들의 용감함과 희생을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우리 모두가 학생 신분으로 학업에만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스스로 학업을 내려놓고 싸웠던 덕분이었으니까. (konas)
향군 대학생 인턴기자 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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