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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핵무기를 개발했나

Written by. NEWSWEEK   입력 : 2003-10-25 오후 10:3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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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WEEK

GEORGE WEHRFRITZ 도쿄 지국장
RICHARD WOLFFE 기자


50여년에 걸친 핵 연구와 파키스탄의 도움에 힘입어 핵폭탄 제조 단계에 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How North Korea Got the Bomb



김책공업종합대학 1962년도 졸업생들만큼 북한 정권의 핵개발 야심으로 직접적인 고통을 당한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졸업식 직전 이 대학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의 새 연구소에서 핵 과학자들을 뽑아갈 것이라는 소문으로 술렁였다. 2년 전 탈북한 이 대학의 1962년도 졸업생은 최근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교수들은 핵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학생들 사이에선 차출되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말했다.
그 탈북자는 동창들 중 몇명이나 요절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는 다행히 졸업 후 다른 곳에 배치됐다.



그러나 몇년 후 방사능 노출에 따른 질병으로 피폐해진 동창들과 마주쳤다. “그들의 몰골은 내가 두려워한 바로 그 모습이었다. 상당수는 눈썹이 다 빠졌고 몇몇은 계속 코피를 흘렸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고 그는 돌이켰다. 그는 “한 연구원이 사망하면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면 된다는 게 정권의 논리였다”고 말했다. 사실 이같은 무자비한 논리는 한세대의 북한 물리학자들뿐 아니라 북한 주민 전체를 유린했다. 북한 정권은 주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정상적인 경제를 구축하는 데 쓸 수 있었던 수십억달러를 핵개발에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핵프로그램 자체는 성공했다. 여러 정보를 종합해 볼 때 김일성의 계승자인 김정일이 단추 하나로 핵무기를 터뜨릴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은 듯하다.



북핵 문제는 미국 정부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현안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북한은 세계의 이목이 자국에 집중되는 것을 즐기는 듯하다. 지난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아시아 순방에 오르기 직전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최근 국제사회 일각에서 북한의 핵 억지력 유무에 대한 논의가 있지만 때가 돼서 핵 억지력을 물리적으로 공개하는 조치를 취하면 그런 논의는 더 이상 필요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같은 위협은 주변국들과 미국으로부터 원조와 양보를 이끌어내기 위한 속이 뻔한 허장성세만은 아니다.



북한 핵프로그램의 성공은 세계에서 가장 빈곤하고 낙후되고 고립된 나라들도 작심하면 핵폭탄을 만들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몬터레이 국제관계연구소의 핵확산 전문가 대니얼 핑크스톤은 “경제를 충분히 쥐어짠다면 인구가 2천만∼2천5백만명이 넘는 나라들은 모두 핵개발을 위한 핵심 인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북한이 핵폭탄을 제조했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한국의 한 고위급 군 관계자는 셔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는 “북한 핵프로그램은 이 휴대폰에 비유될 수 있다.



여기서 몇개의 부품을 얻고, 저기서 배터리를 구하는 식이다. 어느 한부분이 부족해도 그럭저럭 작동할 수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고 말했다. 북한 과학자들은 1950년대부터 4대륙 10여개국에서 핵심 부품과 원료 및 정보를 수집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심지어 오스트리아 빈의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보관된 서류들에서 주요 정보를 절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을 믿고 흔쾌히 핵무기 부품 및 기술을 제공하려 한 나라는 거의 없었다. 그것은 북한의 전통적 우방인 러시아와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서방 정보 전문가들은 북한이 엄포를 놓고 있는 게 아님을 확신한다. 지난 10월 3일 북한은 8천17개의 우라늄 연료봉을 무기용 플루토늄(핵폭탄 6개를 만들 수 있는 양)으로 전환시켰다고 발표했다. 북한이 플루토늄을 추출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전략적으로 배치된 탐지기들이 지난 6월 북한 대기에서 플루토늄 추출의 부산물인 크립톤85 동위원소의 흔적을 포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관건은 그 작업이 완료됐는지 여부다. 한국의 안보 전문가들은 북한이 서방에 정확한 정보를 노출시키지 않도록 특수 필터를 사용, 크립톤 방출량을 축소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제 남은 일은 재료들을 조합해 폭탄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을 탄도 미사일 혹은 선적 컨테이너·소형 잠수함처럼 보다 특이한 수송 시스템에 탑재하는 것이다. 가격이 맞다면 테러범들에게 무기를 판매하려 할지도 모른다. 김태효(金泰孝)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북한은 현재 기초적 수준의 핵무기 3∼5개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그들은 이미 핵폭탄을 호놀룰루와 알래스카에까지 발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것은 사정거리가 2천5백km에 달하는 대포동 미사일이 될 수도 있다.



북한이 자국의 핵개발 능력을 축소 발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서들이 있다. 1990년대 후반 북한은 핵폭탄을 터뜨리기 위한 예비 절차로 고폭 실험을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보유 시스템의 실제 작동 능력을 확인하는 실험”이라고 한 서울 주재 서방 외교관은 지적했다. 북한은 약 6개월 전 폐연료봉에 대한 재가공을 시작하기 전부터 한개 이상의 폭탄을 만들 수 있는 재료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이미 북한은 1∼2개 혹은 3∼4개의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원료를 확보한 상태였다. 지금쯤이면 기본적 핵장비에 대한 개발을 완료했을 것”이라고 그 외교관은 지적했다. 북한과 핵기술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파키스탄 등 다른 개도국들의 핵무기 개발 속도를 고려할 때 신빙성이 있는 지적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북한의 핵 개발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시작됐다. 그 계기는 의외로 중국이나 소련이 아닌 일본 제국에 의해 마련됐다. 일제 강점기 한반도의 젊은 엘리트 과학자 상당수는 일본에서 유학했다. 북한이 기본적인 핵 연구를 시작한 1950년대 이들 과학자는 북한 과학계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과학자이자 발명가이며 북한 핵 개발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고 이승기(李升基) 박사도 교토(京都)제국대학 화학공학과 출신이다.



북한 산악지대에서 비밀리에 핵 개발을 추진하던 일본은 2차대전 이후 그 잔재인 우라늄 광산과 가공 시설들을 남겨두고 철수했다. 그후 북한은 이 장비들을 이용해 우라늄을 소련으로 수출했다. 전직 러시아 외교관으로 현재 하와이에 있는 아시아-태평양 안보연구센터에서 북한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알렉산드르 Y. 만수로프는 “북한이 1950년 남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군사력을 증강시킬 수 있었던 데는 우라늄 수출의 공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북한은 [한국전쟁에 사용할] 무기와 군량(軍糧) 대금을 충당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그 이후 북한의 핵개발에 도움을 준 나라는 미국이었다. 당시 남한에서 갓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미국이 남한의 교육제도 개편을 위해 마련한 ‘국립대학안’을 수용했다. 반대세력은 이 계획이 좌파 교수들을 제거하려는 술책이라고 비난하면서 이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뒤떨어져 있는 남한의 과학 분야가 더 약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강행되면서 서울대학에서만 38명의 과학자와 공학자들이 해임됐다.



이렇게 해임된 교수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소규모 실업계 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것이 고작이었다. 북한은 공작원을 파견해 이들에게 월북을 권유했다. 김근배 전북대 과학사 교수는 이들이 내세운 선전문구는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무관했다고 설명했다. 북한이 과학 육성을 위해 자금을 지원할 것이라는 약속이 이들이 내세운 전부였다. 김교수는 “한국전이 끝날 무렵 약 80명의 과학자, 즉 남한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한 인력의 40% 정도가 월북했다”고 말했다.



이 월북 교수들은 북한 정권과 마찰만 일으키지 않는 한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1956년 소련 정부는 갓 신설한 두브나 핵연구소에 월북 교수들을 초빙했다. 러시아 일간지 이즈베스티야에서 기자로 활동했던 알렉산드르 제빈에 따르면 약 2백5명의 북한 과학자들이 이 연구소에서 연구했다. 나중에 소련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팀이 북한 영변 지역에 2메가와트 실험용 원자로를 건설할 수 있도록 도왔고 1965년 이 원자로가 완성되면서 북한의 핵 연구는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영변 시설을 9559호(소련이 북한과 맺은 기술 지원 계약들에 매긴 코드 번호)라고 불렀고 북한은 ‘가구 공장’이라고 불렀다. 이후 영변 지역은 우라늄 광산과 처리 시설, 연료 가공 시설 및 사용된 연료봉에서 무기용 플루토늄을 뽑아내는 재처리공장을 연결하는 북한 핵산업의 핵심이 됐다. 이 시설은 소련제 설비들을 북한 과학자들이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모스크바에 있는 국제응용연구소(IAIR)의 부소장 유리 페데로프는 “원자력의 평화적인 사용과 반평화적인 사용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북한이 지닌 핵 지식과 전문 기술들이 소련에 의해 제공됐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련은 북한에 핵 폭탄은커녕 원자력 발전소를 설계하는데 필요한 전문 기술조차 제대로 이전하기를 거부했다. 1970년대 지정학적 이유로 소련과 북한 사이가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1974년 인도가 아무런 사전 예고 없이 핵실험을 감행하자 미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나서 국제 핵확산금지조약(NPT)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조선 노동당 내 친소 성향의 파벌들을 숙청하면서 소련과의 관계는 더 틀어졌다. 북한은 소련 과학자들을 초빙해 핵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시키는 대신 주체 사상의 일환으로 자체 핵 기술 개발을 시도했다. 1970년대 들어 북한은 영변 원자로의 생산능력을 두배로 늘렸다.



1980년대가 되자 북한은 구식 영국제 원자로 모델을 바탕으로 5메가와트 흑연 원자로를 추가로 건설했다(사실상 이 원자로는 핵무기 연료 생산용이었다). 김일성은 1987년 “핵에너지의 급속 확보”를 촉구하며 핵에너지 산업이 “미래지향적이며 공산주의에 부합하는 산업”이라고 천명했다. 북한의 핵 개발 프로그램 발전은 최학근 전 원자력 공업부장 같은 북한 외교관 출신들의 공이 컸다. 1974~78년 IAEA 본부에 파견됐던 최학근은 IAEA의 자료를 비롯한 많은 핵 기술 자료들을 수집했다. 한국은 1980년대 초까지 그의 활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한국의 한 원로 과학자는 “IAEA가 북한에 준 자료들을 보고 무척 놀랐다. 그러나 당시 IAEA의 최우선 목표는 핵 기술의 규제가 아닌 보급에 있었다”고 말했다.



북한이 핵폭탄 개발에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것은 소련권이 붕괴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약 10년 전이었다. 소련과 그 위성국에서 들어오던 원조 물자와 무역 보조금이 중단됐다. 그와 함께 북한이 오랫동안 누렸던 안보 보장도 사라졌다. 그러자 북한은 자체적인 능력 강화를 위해 새로운 사업에 나섰다. 이 가운데 하나는 탄도 미사일에 초점을 맞췄다(국방과 수출 둘 다를 노린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화학 및 생물 무기 생산을 크게 늘렸다.



그때 이미 북한은 핵발전소 건설에서 핵폭탄 개발로 눈을 돌린 상태였다. 북한 과학자들은 핵발전소 연료에 의존하는 플루토늄 무기 개발 외에도 고농축 우라늄을 사용하는 무기도 제조하려고 했다. 고농축 우라늄 무기를 제조하려면 재처리 기술이 필요했다. 재처리는 북한이 1985년 서명한 NPT를 위반하는 것이었다. 러시아와 중국은 북한 정권의 노골적인 의도를 점차 묵인하기 어려워지자 북한과 한층 더 거리를 뒀다.



북한은 그들 대신 새 파트너를 찾았다. 파키스탄이었다. 인도의 정보 소식통은 북한과 파키스탄의 접촉이 1988년 베나지르 부토가 총리가 된 후부터 시작됐다고 전했다. 이슬라마바드의 한 서방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파키스탄 핵 프로그램의 아버지 압둘 카디르 칸이 직접 1993년 북한 정권과 접촉했다. 칸은 자신이 개발하고 있는 무기를 발사할 수 있는 미사일 시스템이 필요했는데 북한이 바로 그것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 사망 후 정권을 물려받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칸에게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대포동 탄도 미사일의 파키스탄 제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설계도와 부품을 넘겨주기로 동의했다. 그 외교 소식통은 그 대가로 북한은 우라늄 농축에 필요한 원심분리 기술을 넘겨달라고 파키스탄에 요구했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그런 거래를 강력히 부인했다. 지난 1월 그는 “파키스탄과 북한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을 4백% 보장할 수 있다. 핵기술 이전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칸은 파키스탄 핵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북한을 13차례나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칸은 파키스탄 스타일의 원심분리기(하나의 핵무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핵분열 물질을 얻으려면 원심분리기가 수백개 필요하다) 설계도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특수 핵 설비 부품 구입 방법에 대한 매우 귀중한 정보도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파키스탄의 물리학자 페르베즈 후드보이는 “세계 곳곳을 다 뒤지고 거금을 들여도 그런 것은 구입하기 어렵다. 따라서 필수적인 전자장치, 하드웨어, 컴퓨터 코드, 스위치, 자석을 구매하는 데 관계하는 사람은 희소 가치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런 거래가 실제로 이뤄졌다면 그것은 북한과 미국이 1994년 서명한 제네바 기본 합의를 계속 무시한 것이다. 제네바 합의의 골자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기로 약속하는 대가로 미국은 북한이 1천 메가와트짜리 원자로 2기를 건설할 수 있도록 돕고 그 원자로가 완공될 예정인 2003년까지 매년 50만t의 중유를 대체에너지로 북한에 제공하는 것이다.



이 합의는 2002년 하반기 미국 정보당국이 북한의 비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발견한 뒤 깨어지기 시작했다. 부시 행정부 관리들은 북한이 파키스탄으로부터 원심분리기를, 러시아로부터 스펀 알루미늄 튜브를 사들이는 것을 적발했다고 말했다. 북한은 그런 주장에 맞서 유엔 핵 사찰단원들을 추방하고, NPT에서 탈퇴했으며, 폐연료봉을 폭탄으로 만들기 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어쩌면 북한은 제네바 합의 서명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그것을 어기기 시작했을지 모른다. 1990년대 후반 실시된 수십건의 고폭 실험은 핵 기폭장치를 완성하려는 작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에 영변 핵시설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한 여성 과학자는 비밀 무기개발을 감추기 위한 계획을 설명했다. 지난해 중국으로 탈출한 뒤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녹취록에서 그녀는 자신이 일했던 304 연구소의 은폐 계획을 설명했다(뉴스위크는 그녀의 한국 망명을 주선한 한 단체를 통해 그 문서를 입수했다.



그 연구소는 “핵 및 화학 무기 둘다를 만드는 데 관계했으며, IAEA 사찰에서 발각되지 않기 위해 모든 재료와 장비를 지하 동굴로 옮겼다”고 그녀는 말했다. 마침내 ‘8월 시설’이라고 불리는 새 공장이 건설됐다. “그 장소는 숲속에 은폐돼 있으며 다른 시설과는 새로 놓인 철로로 연결됐다. 거기서는 다른 연구소에서 사용되는 우라늄을 처리했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북한이 핵폭탄 제조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증거가 점점 드러나는 데도 서방은 계속 북한 정권이 생각을 바꿀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외교 관측통들은 북한이 빠르면 다음달 제2차 6자회담 개최에 동의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사실 북한의 핵 위협은 그 정도를 넘을 수 없다. 김정일 위원장은 ‘핵 억지력’을 테스트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사용한다면 권력·특권·나라·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다. 그도 김책공대 1962년도 졸업생들과 같은 운명이 되기를 원치는 않을 것이다.



With HIDEKO TAKAYAMA in Tokyo, B. J. LEE in Seoul,

RON MOREAU and SUDIP MAZUMDAR in New Delhi,

ZAHID HUSSAIN in Islamabad, and STEFANIE MCINTYRE in Mosc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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