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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6·25같은 전쟁 일어난다면 기꺼이 참전할 것"

재일학도의용군 유승호 회장 인터뷰

Written by. 윤경원   입력 : 2005-06-24 오후 5:3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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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학도의용군의 6·25참전은 애국정신의 귀감이자 재일동포사회의 자랑”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유승호(81) 회장은 6·25전쟁 당시 재일동포 젊은 학도들이 전장에 뛰어들어 펼친 용전분투에 대해 이같이 평가했다.

 55년 전 북한군의 전쟁 발발로 대한민국의 존망이 위기에 처하자 당시 국내·외의 어린 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학생의 신분으로 자진 참전(參戰)했다. 이 중에는 현해탄을 넘어온 재일유학생 수백 명도 포함돼 있었다.

▲유승호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장이 <코나스>와의 인터뷰를 갖고 있다.ⓒkonas.net
 이들은 왜 학업과 생업을 포기하고 죽음이 난무하는 전쟁터로 달려왔을까? 지난 13일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유 회장은  “전쟁 당시 공산군의 남침으로 수도서울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에 재일동포 청년학도들은 좌시할 수 없어 ‘내 한목숨 바쳐서라도 내 조국을 지키겠다’며 궐기하기 시작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런 일환으로, 당시 ‘재일본 대한민국거류 민단’ 중앙본부는 지원병 모집을 위해 지원병 지도본부를 설치, 취지문과 격문 등을 일본전역에 배포했고, 이에 일본 전국에서는 1000여명의 청년들이 ‘피 끓는 충정’으로 의용군에 자원했다. 

 유 회장은 “우리 청년학도들은 병역의무도 부여되지 않았지만 누구의 요청이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닌, 오로지 조국수호와 반공투쟁 일념으로 지원했다”며 “아무런 조건과 장래에 대한 보장도 없이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이별하고 학업과 직장을 포기하는 등 온갖 개인적인 인생을 정의로운 조국보위 성전에 바치겠다는 집념으로 참전을 결심했던 것”이라며 참전의지의 순수함을 강조했다.

 동경, 대판, 구주 등에서 몰려온 학도병 지원자 중 신체검사 등을 거쳐 의용군으로 확정된  653명은 그러나, 어린 학생들의 장래를 염려한 유엔군 총사령부의 거절로 참전 요청이 수차례 무산되기도 했었다.

 유 회장은 “참전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우리는 미국 극동지구 유엔사령부에서 고위 장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혈서로 자원참전을 결의했고, 우리 청년들의 애국 충정심에 감탄한 미국 장성들이 결국 지원요청을 받아들이게 됐다”고 설명했다. “많은 학도병들이 가족들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었다. 그러나 전쟁에 참여하고자 하는 열망이 얼마나 강했냐면, 같이 참전한 전우 중에 치질을 앓는 친구가 있었는데 치질은 당시 미군이 아주 싫어하는 병이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어떻게든지 가겠다고 각오를 보여, 단측에서 실시한 신체검사에서 ‘양호’판정이 나도록 조작을 하기도 했다.” 

 이로서 의용군들은 동경에 주둔한 미 제1기갑사단과 미 제3사단에서 기초훈련을 받고 1진 280명이 유엔군에 편입되어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고, 2진은 9·28 서울탈환작전에, 3진은 9·27일 경기도 이천에서 미 제7사단에 편입되어 원산상륙작전 등에 참가한 후 풍산을 거쳐 갑산, 혜산진까지 진격하여 용맹을 떨쳤다.

 공병대로 투입됐었다는 유 회장은 “우리가 조국전선에 투입됐을 때 조국은 겨울에 접어들었고, 북한군이 수원 아래쪽까지 밀고 내려올 시점”이었다며 “당시 조국강토는 모든 게 파괴됐고 사람들은 상처투성이였으며, 눈물겨운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당시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단지 내 조국이 위기에 있으니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맡기자는 정신으로 싸웠다”고 당시 마음가짐을 떠올렸다.

 유 회장은 한 가지 재밌는 일화를 소개했다. 대부분이 일본에서 출생해 교육을 받은 의용군은 모국어의 소통이 어려워 습관적으로 통상 일본어를 사용했고, 이런 상황이 북측에 흘러들어가 북한군과 중공군은 일본군의 대병력이 투입된 것으로 알고 후퇴하기도 했다는 것.


 전장에서 한창 맹위를 떨치고 있던 중 재일학도의용군은 1951년을 고비로 일부 미군부대가 작전상 일본으로 이동하게 되자 268명이 일본으로 귀환했고, 그들 중 58명은 다시 육군 제2훈련소에 입교해 훈련을 받고 하사관으로 전선에 배치됐으며, 30명은 육군종합학교에 입교해 장교교육을 받아 이후 각 부대에 투입,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재일학도 의용군은 135명의 전사자와 많은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살아남은 의용군은 일본으로의 귀환을 시도했지만, 1952년 5월 미.일 센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정부는 조약체결 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출국했던 재일학도의용군들에 대한 일본재입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군에 편입됐던 재일학도의용군 226명은 일본에 있는 가족들과 헤어져 살아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으며, 국내에 마땅한 생활거처조차 없는 상황에서 생계유지를 위한 자립대책을 강구하는 등 심신의 고생을 겪기도 했다.

 이들 중 41명은 조총련의 재일동포 북송사업을 저지하기 위한 한국정부의 요청을 수락, 특별교육을 받고 공작요원으로 일본에 파견하는 등 반공일선에서 투쟁을 계속했고, 이들 중 7명이 임무수행 중 순직했다. 남은 생존자들은 소기의 임무를 예정대로 진행했으나, 본국의 4.19사태로 모든 활동이 중단, 부득이한 장기체류로 인해 불법입국과 일본의 관계법에 의해 체포돼 혹독한 고문과 공정치 못한 재판으로 형을 받아 장기간 옥고를 당하는 비운을 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이들은 1965년 9월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를 설립, 국가보훈단체로 등록했고, 1962년 1월에는 대통령으로부터 전회원에게 무공방위표장이 수여됐다.

 유 회장은 “재일학도 의용군들은 이렇듯, 1950년대 국가의 비운을 개인적 비운으로 체험했다”며 “우리는 부모형제 또는 선후배의 지도도 기대할 수 없었고, 학교조차 마치지 못한 반쪽 인생으로서 직업도 없이 불리한 사회여건 하에서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자신들의 발전을 위해 투자하지 못해 결국 일생을 고달픈 삶으로 마감하고 있다”고 술회했다. 

 그는 자신들의 시대적 불운을 아쉬워하면서도 재일학도들의 의용군참전 의의에 대해 “미군을 비롯한 UN 16개국 참전용사들에게 자유에 대한 귀중함과, 조국을 사랑하는 우수한 민족성을 지닌 것을 인식시켰고, 조국과 민족을 보위하고자 하는 투철한 호국신념을 가진 위대한 민족임을 세계 우방에 과시했다”고 평가했다.

 또, “국내적으로는 해외동포들의 조국관에 대해 재인식을 하게했고, 전세 불리에서 오는 실망과 좌절감, 패배의식을 가지고 방황하는 민심의 혼란을 새로운 봉기와 희망 그리고 승리의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또, 국군장병에게는 필승의 사기를 고취시켰고, 해외동포들에게는 무언의 조국애을 가슴깊이 심어주는데 초석이 됐다”고 자평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최근 일어난 국적포기 사태에 대해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국적포기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행이며, 단지 코앞에 닥친 달콤한 상황만을 생각하는 근시안적 행동이다. 조국이 있어야 내가 있고 가족이 있는 것 아닌가. 유학생활을 포기하고 조국을 구하고자 현해탄을 건너서까지 전장에 뛰어든 우리 학도 의용군들로써는 안타까움과 배신감마저도 느껴진다.”

▲ 재일학도의용군 전몰용사 위령비
 꽃다운 20대 때 전장에서 용맹을 떨치던 학생들은 어느새 백발이 성성한 80세를 넘겨 55년 전의 일을 회상하고 있다. 유 회장은 “하나 둘씩 죽어가는 동지들이 이제 남아있는 동지들보다 많아졌다”며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6·25같은 전쟁이 일어난다면 또다시 기꺼이 참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일학도의용군. 조국을 사랑하고 그 애국심을 행동으로 옮긴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은 오늘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었고, 그들이 보여준 호국정신은 조국이 있는 한 영광된 표상으로 영원히 회자될 것이다.(konas)

 윤경원(코나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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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bbn2000   

    젊은 애들은 전쟁나면 도망치겠다던데 할아버지들은 용기가 좋네.. 허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군대에서 받아주기나 하겟어..</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5-06-24 오후 8: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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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eterans    수정

    조국을 위해 순국한 호국영령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과 같은 자유민주주의국가와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아픔과 눈물의 6월을 '희망과 기쁨의 6월'로 바꿔나가자...</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5-06-24 오후 6: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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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대로    수정

    6.25때 미군 사망자 숫자가 5만4천명이란 것은 잘못된 것이다. 잘못된 이 숫자는 한국전쟁 기간에 한국전과 아무 상관없이 전 세계 미군가운데 심장마비, 자살, 교통사고 등으로 사망한 사람까지 포함된 것이다. 이것이 그동안 한국전 미군 사망자 숫자로 통용돼다 90년대 중반 미 국방부가 새로운 집계를 통해 약 3만6천명으로 바로 잡았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

    2005-06-24 오후 5:50:08
    찬성0반대0
  • 참전용사    수정

    오늘날 북한 사람들이 못먹고 못사는 것은 그 나라에 자유가 없기 때문이지 우리가 도와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55년전 자유없는 북한 공산주의를 없애기 위해 피흘리며 목숨바쳐 싸웠던 것이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5-06-24 오후 5: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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