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혁당 조작설은 소가 웃을 일
김정일체제가 교체된 후에나 시인하려는가
Written by. 홍진표
입력 : 2005-08-22 오전 9:37:23
국가정보원이 과거사 진상규명차원에서 선정한 7가지 우선조사대상에는 지난 99년 밝혀진 민족민주혁명당(이하 ‘민혁당’)사건이 포함되어 있다. 남로당 이후 최대의 좌익지하당으로 알려진 민혁당은 그 전신인 반제청년동맹(이하 ‘반청’)이래 약 10년 동안 노출되지 않은 채 활동한 주사파 조직이다.
주사파의 대부로 알려진 김영환, 하영옥 등이 주도한 민혁당은 북한노동당과 직접 연계를 가졌으며, 하영옥과 접촉을 한 북한공작원이 탄 잠수정이 침몰되어 인양되는 바람에 단서가 잡혀 그 실체가 공개된다.
총책 김영환은 97년 민혁당을 해체하고, 전향한 것이 참작되어 공소보류 처분을 받았고, 민혁당의 재건을 추진했던 하영옥은 대법원까지 가는 공방 끝에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구성죄' 등이 인정되어 8년형을 선고받았다가 지난 2003년 3월 노무현대통령 취임기념 특사로 석방되었다.
국정원은 민혁당 관련자들과 인권단체들이 끊임없이 조작의혹을 제기하는 바, 거리낄 것이 없는 자신있는 사건으로 판단하여 민혁당사건을 조사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추측된다. 국정원이 선정한 7개의 우선조사대상 중 민혁당 사건만이 유일하게 DJ정부에서 취급되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건 1
1989년 4월 15일 전국 대학가에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장군님의 77회 탄생일을 축하드린다'는 유인물을 살포하면서 조직의 실체가 알려진 반청은 하영옥(서울법대 82학번)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주사파n핵심들의 지하조직이다. 89년 출소한 김영환(서울법대 82학번)은 나중에 이 조직에 합류하여 총책이 되고, 91년에는 밀입북하여 김일성과 두 차례 면담을 갖기도 한다.
92년 3월 반청은 민혁당으로 개편되었는데, 중앙위원은 김영환, 하영옥, 박모 등 3명이었고. 김씨는 재야와 지역적으로는 전북위원회를 관장했고, 하씨는 영남위원회와 경기 남부지역을 관장했다. 영남위원회 산하에는 부산위원회, 울산위원회, 마산·창원·진주 지부가 있었다.
필자는 90년에 김영환의 권유로 반청에 가입한 후 재야의 통일운동분야를 담당하였으며, 민혁당에 합류하여 96년까지 활동하였다. 그런데 김일성을 직접 만나보는 등 북한사회를 체험한 후 북한체제에 대해 회의를 갖기 시작한 김씨는 한편 북한과 거리를 두어가고, 민혁당 내부적으로는 기관지 기고를 통해 수령론, 한국식민지론, 프롤레타리아독재론 등에 대해 단계적으로 문제제기를 해나갔다.
직접적 비판은 반발을 살 수 있는 만큼 매우 조심스러운 과정을 밟아간 것이다. 그러다 결국 민혁당 내부적으로 북한체제에 대한 입장을 둘러싸고 노선투쟁이 격화되면서 김씨는 97년 7월 하씨의 반대에도 불구 중앙위원회에서 2:1의 표결로 민혁당 해체를 결의한다.
그러나 하씨는 이에 반발하여 자신이 관리하던 영남위원회, 경기남부 조직, 대학생 조직 등을 이끌고 민혁당의 재건을 추진한다. 김영환그룹을 변절자로 낙인찍고, 이른바 Go!를 외친 것이다.
사건 2
지난 97년 10월말 최정남, 강연정 부부간첩이 검거되었다. 이들이 울산의 주사파인 정대연에게 접근하자 정씨는 안기부의 함정공작이라고 오인하고 경찰에 신고를 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부부간첩이 정씨에게 '김영환의 소개로 찾아왔다'고 말하는 바람에 김씨의 집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루어졌다.
공교롭게도 김씨는 중국에 체류하면서 무역업을 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고자 출국한 상태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김씨는 모씨를 시켜 ‘나는 너에게 장미화원을 약속하지 않았다’는 소설책 한 권을 숨기라고 부탁했는데, 결국 실패했다. 그 문제의 책은 북과 교신할 때 암호를 해독하는 난수표였던 것이다.
91년 5월 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하여 북과 연계를 갖고 있던 김씨는 안기부에서 상당한 단서를 확보하고 접근한 것으로 알고 그 후 중국에서 도피하며 지냈다. 그러나 안기부는 부부간첩이 상부의 지시로 편의상 김씨를 거론하며 정대연에게 접근하였다는 사실 외에 김씨의 밀입북이나 민혁당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만 문제의 난수표를 발견하여 북과 연계를 갖고 있을 것이라는 심증을 굳혔다. 다만 그 난수표의 해독에는 실패했다.
사건3
1998년 12월18일 남해상에서 해군에 의해 북한 반(半)잠수정이 격침되고 인양되면서 민혁당의 단서가 포착되었다. 이 잠수정에서 민혁당 재건조직의 총책인 하영옥의 연락처 등이 나오면서 국정원의 수사가 시작되었다.
수사과정에서 하씨가 잠수정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진운방(원진우라는 남한의 실존인물로 위장)이라는 간첩과 승용차로 동승하면서 검문에 걸린 기록과, 과속 카메라에 잡힌 사진 등이 발견되었다. 이때부터 국정원은 하씨에 대한 24시간 밀착감시로 하씨와 접촉하는 민혁당 관계자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북한의 대남공작기관에서 김영환과 연락이 잘 안되고, 김씨가 공개적으로 ‘수령론은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등의 북한정권비판을 가하자 김씨를 대신할 사람으로 하씨를 선정하고 접근한 것이다.
간첩 진운방은 87년 말레이시아인으로 위장하여 남파된 후 김씨와 북한과의 오프라인 연락책을 맡았었고, 92년 이선실 사건이 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출국했다가, 하씨를 월북시키기 위해 남파된 것이다.
기왕에 하씨는 97년 김씨가 민혁당을 해체하자고 하자 "조선노동당의 정통성을 인정하라. 아니면 무전기와 현지 지도원 접촉선을 우리에게 넘기라"며 반발했던 만큼 독자적인 대북라인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98년에 남파된 진운방과 쉽게 연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하씨는 진운방과 함께 월북하려고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미루었고 진운방 혼자 북으로 귀환하다가 잠수정이 침몰한 것이다. 이때 당국은 잠수정이 남으로 침투하다가 침몰한 것으로 의도적으로 거짓 발표를 하여 하씨는 안심하고 경계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건 4
김영환은 2년 정도 독일, 중국 등에 체류하다가 99년 귀국한다. 김씨는 잠수정 침몰로 이미 하씨 등이 민혁당 관계로 당국에게 파악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밀입북 사실 정도를 밝히고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으면서, 무언가 파악되어 있다는 낌새를 채고 '말'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간첩사건이 조작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출국하려는 시도를 하다가 구속된다. 이는 민혁당 관계자들에게 도피하라고 경고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당황한 수사당국은 의도적으로 잡지 않고 있던 하씨를 긴급히 체포하고, 민혁당 사건을 공개적으로 수사하기 시작한다. 상당기간 수사에 협조하지 않던 김씨는 결국 민혁당의 존재를 진술한다.
그 후 김씨는 민혁당 해체 이후에도 활동을 계속한 하씨 계열의 민혁당 조직원들에 대한 수사에 협조하지 않아, 이른바 수사당국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 김씨는 ‘자신의 지시에 따라 활동한 사람들에 대해 유죄입증에 협조하는 일은 할 수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영옥은 국정원조사에서 간첩 진운방과의 접촉 등을 시인한 후, 변호인 접견을 통해 수사관들이 제공한 드링크류를 먹고 조사에 임했는데 이후 정신이 혼미하고 몽롱한 상태에서 사실과 다른 진술을 했다는 주장을 편다.
기왕의 공안사건에서 고문에 못 이겨 거짓진술을 했다는 주장은 흔하게 있었지만, 약을 먹고 진술을 유도당했다는 주장은 생소하다. 아마 이 약이 진실만을 말하게 하는 약이라면, 국정원은 이 약을 세계시장에 내놓아 외화를 벌어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씨의 주장대로 정신을 몽롱하게 하는 약이라면, 그 상태에서 도대체 구체적인 진술이 가능할 수 있을까?
그 조직원이 100여 명에 이르렀고, 김영환 뿐 아니라 그 중 10여 명 이상이 수 년 전에 이미 전향을 했고 사건이 나자 자수까지 한 사건을 조작이라고 우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들은 북한의 김정일체제가 교체되고 대남공작문서가 공개되면 그때 가서는 과연 시인을 할까? 아마도 또 다른 조작설을 ‘조작’할지 모르겠다. (www.new-right.com)
홍진표 (자유주의연대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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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책 김영환은 97년 민혁당을 해체하고, 전향한 것이 참작되어 공소보류 처분을 받았고, 민혁당의 재건을 추진했던 하영옥은 대법원까지 가는 공방 끝에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구성죄' 등이 인정되어 8년형을 선고받았다가 지난 2003년 3월 노무현대통령 취임기념 특사로 석방되었다.
국정원은 민혁당 관련자들과 인권단체들이 끊임없이 조작의혹을 제기하는 바, 거리낄 것이 없는 자신있는 사건으로 판단하여 민혁당사건을 조사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추측된다. 국정원이 선정한 7개의 우선조사대상 중 민혁당 사건만이 유일하게 DJ정부에서 취급되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건 1
1989년 4월 15일 전국 대학가에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장군님의 77회 탄생일을 축하드린다'는 유인물을 살포하면서 조직의 실체가 알려진 반청은 하영옥(서울법대 82학번)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주사파n핵심들의 지하조직이다. 89년 출소한 김영환(서울법대 82학번)은 나중에 이 조직에 합류하여 총책이 되고, 91년에는 밀입북하여 김일성과 두 차례 면담을 갖기도 한다.
92년 3월 반청은 민혁당으로 개편되었는데, 중앙위원은 김영환, 하영옥, 박모 등 3명이었고. 김씨는 재야와 지역적으로는 전북위원회를 관장했고, 하씨는 영남위원회와 경기 남부지역을 관장했다. 영남위원회 산하에는 부산위원회, 울산위원회, 마산·창원·진주 지부가 있었다.
필자는 90년에 김영환의 권유로 반청에 가입한 후 재야의 통일운동분야를 담당하였으며, 민혁당에 합류하여 96년까지 활동하였다. 그런데 김일성을 직접 만나보는 등 북한사회를 체험한 후 북한체제에 대해 회의를 갖기 시작한 김씨는 한편 북한과 거리를 두어가고, 민혁당 내부적으로는 기관지 기고를 통해 수령론, 한국식민지론, 프롤레타리아독재론 등에 대해 단계적으로 문제제기를 해나갔다.
직접적 비판은 반발을 살 수 있는 만큼 매우 조심스러운 과정을 밟아간 것이다. 그러다 결국 민혁당 내부적으로 북한체제에 대한 입장을 둘러싸고 노선투쟁이 격화되면서 김씨는 97년 7월 하씨의 반대에도 불구 중앙위원회에서 2:1의 표결로 민혁당 해체를 결의한다.
그러나 하씨는 이에 반발하여 자신이 관리하던 영남위원회, 경기남부 조직, 대학생 조직 등을 이끌고 민혁당의 재건을 추진한다. 김영환그룹을 변절자로 낙인찍고, 이른바 Go!를 외친 것이다.
사건 2
지난 97년 10월말 최정남, 강연정 부부간첩이 검거되었다. 이들이 울산의 주사파인 정대연에게 접근하자 정씨는 안기부의 함정공작이라고 오인하고 경찰에 신고를 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부부간첩이 정씨에게 '김영환의 소개로 찾아왔다'고 말하는 바람에 김씨의 집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루어졌다.
공교롭게도 김씨는 중국에 체류하면서 무역업을 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고자 출국한 상태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김씨는 모씨를 시켜 ‘나는 너에게 장미화원을 약속하지 않았다’는 소설책 한 권을 숨기라고 부탁했는데, 결국 실패했다. 그 문제의 책은 북과 교신할 때 암호를 해독하는 난수표였던 것이다.
91년 5월 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하여 북과 연계를 갖고 있던 김씨는 안기부에서 상당한 단서를 확보하고 접근한 것으로 알고 그 후 중국에서 도피하며 지냈다. 그러나 안기부는 부부간첩이 상부의 지시로 편의상 김씨를 거론하며 정대연에게 접근하였다는 사실 외에 김씨의 밀입북이나 민혁당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만 문제의 난수표를 발견하여 북과 연계를 갖고 있을 것이라는 심증을 굳혔다. 다만 그 난수표의 해독에는 실패했다.
사건3
1998년 12월18일 남해상에서 해군에 의해 북한 반(半)잠수정이 격침되고 인양되면서 민혁당의 단서가 포착되었다. 이 잠수정에서 민혁당 재건조직의 총책인 하영옥의 연락처 등이 나오면서 국정원의 수사가 시작되었다.
수사과정에서 하씨가 잠수정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진운방(원진우라는 남한의 실존인물로 위장)이라는 간첩과 승용차로 동승하면서 검문에 걸린 기록과, 과속 카메라에 잡힌 사진 등이 발견되었다. 이때부터 국정원은 하씨에 대한 24시간 밀착감시로 하씨와 접촉하는 민혁당 관계자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북한의 대남공작기관에서 김영환과 연락이 잘 안되고, 김씨가 공개적으로 ‘수령론은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등의 북한정권비판을 가하자 김씨를 대신할 사람으로 하씨를 선정하고 접근한 것이다.
간첩 진운방은 87년 말레이시아인으로 위장하여 남파된 후 김씨와 북한과의 오프라인 연락책을 맡았었고, 92년 이선실 사건이 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출국했다가, 하씨를 월북시키기 위해 남파된 것이다.
기왕에 하씨는 97년 김씨가 민혁당을 해체하자고 하자 "조선노동당의 정통성을 인정하라. 아니면 무전기와 현지 지도원 접촉선을 우리에게 넘기라"며 반발했던 만큼 독자적인 대북라인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98년에 남파된 진운방과 쉽게 연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하씨는 진운방과 함께 월북하려고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미루었고 진운방 혼자 북으로 귀환하다가 잠수정이 침몰한 것이다. 이때 당국은 잠수정이 남으로 침투하다가 침몰한 것으로 의도적으로 거짓 발표를 하여 하씨는 안심하고 경계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건 4
김영환은 2년 정도 독일, 중국 등에 체류하다가 99년 귀국한다. 김씨는 잠수정 침몰로 이미 하씨 등이 민혁당 관계로 당국에게 파악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밀입북 사실 정도를 밝히고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으면서, 무언가 파악되어 있다는 낌새를 채고 '말'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간첩사건이 조작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출국하려는 시도를 하다가 구속된다. 이는 민혁당 관계자들에게 도피하라고 경고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당황한 수사당국은 의도적으로 잡지 않고 있던 하씨를 긴급히 체포하고, 민혁당 사건을 공개적으로 수사하기 시작한다. 상당기간 수사에 협조하지 않던 김씨는 결국 민혁당의 존재를 진술한다.
그 후 김씨는 민혁당 해체 이후에도 활동을 계속한 하씨 계열의 민혁당 조직원들에 대한 수사에 협조하지 않아, 이른바 수사당국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 김씨는 ‘자신의 지시에 따라 활동한 사람들에 대해 유죄입증에 협조하는 일은 할 수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영옥은 국정원조사에서 간첩 진운방과의 접촉 등을 시인한 후, 변호인 접견을 통해 수사관들이 제공한 드링크류를 먹고 조사에 임했는데 이후 정신이 혼미하고 몽롱한 상태에서 사실과 다른 진술을 했다는 주장을 편다.
기왕의 공안사건에서 고문에 못 이겨 거짓진술을 했다는 주장은 흔하게 있었지만, 약을 먹고 진술을 유도당했다는 주장은 생소하다. 아마 이 약이 진실만을 말하게 하는 약이라면, 국정원은 이 약을 세계시장에 내놓아 외화를 벌어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씨의 주장대로 정신을 몽롱하게 하는 약이라면, 그 상태에서 도대체 구체적인 진술이 가능할 수 있을까?
그 조직원이 100여 명에 이르렀고, 김영환 뿐 아니라 그 중 10여 명 이상이 수 년 전에 이미 전향을 했고 사건이 나자 자수까지 한 사건을 조작이라고 우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들은 북한의 김정일체제가 교체되고 대남공작문서가 공개되면 그때 가서는 과연 시인을 할까? 아마도 또 다른 조작설을 ‘조작’할지 모르겠다. (www.new-righ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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