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장군과 한국전쟁
Written by. 전인영
입력 : 2005-10-18 오후 1:11:51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1880-1964)은 한국전쟁 특히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군인 가정에서 태어나 군인으로 일생을 마쳤으며 아시아와 각별한 인연을 맺은 카리스마적 존재다. 맥아더는 1880년 1월 26일 남부 아칸소 주 리틀록에서, 아서 맥아더(1845-1912)의 아들로 태어났다. 맥아더의 군 경력은 순탄하고 화려했다. 그는 1903년 6월 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그 해 가을 필리핀으로 간 맥아더 중위는 부친인 아서 맥아더 장군 밑에서 부관 생활(1905-1906)을 했다. 부친 맥아더는 남북전쟁 말기인 1865년 5월 20세 나이에 대령이 되어 '소년 대령'의 별명을 얻었던 인물이다. 아버지는 1866년 정규군 중위로 인생을 다시 시작하여, 1898년 여단장으로 필리핀으로 파견되어 마닐라를 방어(1899. 2)했으며 5월에 필리핀 점령군 사령관 겸 군정장관에 올랐다.
필리핀 근무를 마친 맥아더는 테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관 생활(1906-1907)을 하기도 했다. 베라크루스 원정(1914. 4월-11월)에서는 공을 세워 명예훈장을 수여 받기도 했다.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1917년 10월 '무지개 사단'의 참모장으로 프랑스에 파견되었고, 1918년 11월 사단장이 되었고 독일 점령 임무를 수행하다 1919년 4월 귀국했다. 맥아더 장군은 귀국 후 육사 교장(1919-22)을 거쳐, 소장으로 필리핀(1922. 10-1925. 1)에서 근무했으며, 육군참모총장(1930. 11-1935. 10)으로 국가에 헌신했다.
그는 1935년 10월 필리핀 독립을 위한 방위 임무 조직을 위해 영구 소장 계급으로 그 곳에 갔으며, 1936년 8월 필리핀 정부로부터 원수계급을 수여 받았다. 1937년 12월 말 필리핀 임무 수료를 위해 퇴역을 택했으나, 미-일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 정부는 1941년 7월 26일 그를 중장으로 승진시키고 극동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12월 8일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바탄(1941. 12-1942. 1)에서 패한 후, 지시에 따라 필리핀을 포기(1942. 3. 11)하고 오스트랠리아로 후퇴했다. 그렇지만, 맥아더 장군은 "나는 돌아올 것이다"라는 그의 약속대로 필리핀을 다시 탈환(1945. 2-45. 8)했다. 일본침공을 앞둔 1945년 4월에 맥아더는 태평양전역 지상군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일본 항복(9월 2일)을 앞두고 육군대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종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일본의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했다.
맥아더 장군의 일본 체류는 한국전쟁 전개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당직 사령의 긴급 전화 때문에 잠을 깬 맥아더 장군은 악몽과 같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마닐라 호텔에서 그의 잠을 깨웠던 긴급전화를 떠올리면서 재판이 아니라 꿈이기를 바랐지만, 벌써 알몬드 참모장이 나타나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초 주한 미대사의 요청을 받아 맥아더는 즉시 2천명에 이르는 미국인들 및 유엔 요원들을 한국에서 철수시키기 위해 수송기와 선박 동원을 명했고, 작전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인민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공격을 감행했고, 전선은 급속히 붕괴되고 있었다. 경무장의 4개 사단규모 한국 군대는 경비임무에 적합한 수준이지, 중무장에 잘 훈련된 인민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맥아더는 한국군을 위해 탄약 등을 수송선에 적재할 것을 명하고 이를 호송케 했으며, 한국전선 실황파악을 위해 처치 장군을 급파했다. 처치는 28일 원상복구를 위해서는 미군 투입이 필요하다는 그의 평가를 알렸다. 맥아더는 29일 오전 자신이 직접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전용기를 타고 수원 비행장으로 왔으며, 차로 한강변까지 올라가 전황을 살피고 전략을 구상했다. 그 역시 지상군 투입 없이는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이를 합참에 건의했다.
맥아더는 신속하게 행동했다. 그는 공식 허가 전에 논란의 소지가 있는 38선 이북 지역 폭격을 명했다. 7월 1일 그는 24사단 소속 스미스 대대(540여명)를 한국으로 파견하여, 정찰업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스미스 부대는 8월 5일 오산 북방 죽미령에서 10여 대의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 병력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첫 전투에 돌입했다. 경무장에 평시라 전투 훈련을 등한시했던 미 24사단은 오산과 조치원 전투에 이은 7월 20일의 대전 전투에서도 연패했으나, 일본 주둔 제1기갑사단과 25사단 병력을 상륙시켜 낙동강 전선을 구축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제공했다. 맥아더가 땅 보다 시간을 필요로 했었음을 생각할 때, 비록 패배했으나 딘 소장의 24사단은 나름대로 임무를 수행한 셈이다.
낙동강 전선 상황 악화로 워커 중장이 사령부의 부산 이전을 건의하자, 맥아더는 7월 27일 대구를 방문하여 격려하면서, '한국 덩커크는 없다'는 말로 사수 의사를 분명히 했다. 워커 장군은 맥아더의 결의를 받들었다.
이틀 후, 워커 장군은 킨 25사단장 및 참모들에게, "더 이상의 후퇴나 철수 또는 방어선 재조정은 없다. 우리 뒤에는 물러설 곳이 없다. 덩커크나 바탄 철수는 없다. 부산으로의 후퇴는 역사에 남을 대 살육이 될 것이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워야 한다."라는 비장한 사수명령(Stand or Die)을 내렸다.
낙동강 전선이 위태로운 중에도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구상을 그대로 추진했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은 적의 의표를 찌르는 인천상륙을 감행하여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켰다. 10월 1일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개시했으며,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했다. 맥아더는 북진을 계속하여 남북통일을 이룩한 후, 미군 장병들이 크리스마스까지는 귀향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는 중공군의 무력개입 가능성과 규모를 과소평가하는 과오를 범했다. 유엔군의 11월 공세는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 좌절되었다. 미 1기갑사단은 운산 전투에서, 미 2사단은 군우리 전투에서, 그리고 미1해병사단은 장진호 전투에서 고전했다. 중국의 참전은 인천상륙으로 치솟은 맥아더의 명성에 큰 타격을 가했다. 맥아더는 '새로운 전쟁' 대처 방안을 놓고, 확전을 우려한 대통령 및 합참 측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1951년 4월 11일 맥아더는 해임 통보를 받았으며, 다음날 리지웨이 장군이 지휘권 인수를 위해 동경에 도착했다. 미 국민은 쓸쓸히 귀국한 맥아더를 전쟁영웅으로 열렬히 환영했다. 맥아더가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을 한 30분 동안, 그는 박수 때문에 50차례나 연설을 중단해야 했다. 뉴욕에서는 750만 명으로 추산되는 엄청난 인파가 그를 맞아 환호했다.
이제 '노병'은 사라졌고, 그의 화려한 군 경력과 업적도 잊혀가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 맥아더 동상 철거 문제를 둘러싼 논쟁과 충돌로 심한 진통을 겪고 있음은 아이로니컬하다. 이들에 의한 맥아더 폄하나 동상 철거 움직임은 불행히도 전통적 한·미 동맹 관계를 크게 해치는 행위다. 동상보존 중요성은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항의 서한 및 모리스 주한 영국대사의 충고 서한에 잘 나타나 있다. 방치하면, 우리가 은혜와 의리도 모른 채 위급할 때 도움을 준 국가와 국민을 모독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한국 국민은 미국과 영국 등 참전국이 한국 전쟁에서 치룬 엄청난 인명 피해를 모른척하거나 폄하하면 안 된다. 사람 따라 인간적 강·약점이 있고 개성이 너무 강한 맥아더라는 인물을 안 좋아 할 수는 있으나, 절망상태의 한국을 구한 그의 공로를 잊어서는 안 된다.
맥아더는 1962년 육사를 다시 방문하여 의무와 명예 및 조국을 강조하고, 군인의 희생에 관하여 역설했었다. 이제 그 '노병'은 사라져 버렸지만, 그의 공적은 남아 있다. 맥아더 동상을 역사의 현장을 굽어보는 인천 자유공원에 그대로 보존한채,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한 그의 공로를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이다. (출처: 영원한 친구들, KAFS)
全寅永(서울대교수, 국제정치학)
필리핀 근무를 마친 맥아더는 테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관 생활(1906-1907)을 하기도 했다. 베라크루스 원정(1914. 4월-11월)에서는 공을 세워 명예훈장을 수여 받기도 했다.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1917년 10월 '무지개 사단'의 참모장으로 프랑스에 파견되었고, 1918년 11월 사단장이 되었고 독일 점령 임무를 수행하다 1919년 4월 귀국했다. 맥아더 장군은 귀국 후 육사 교장(1919-22)을 거쳐, 소장으로 필리핀(1922. 10-1925. 1)에서 근무했으며, 육군참모총장(1930. 11-1935. 10)으로 국가에 헌신했다.
그는 1935년 10월 필리핀 독립을 위한 방위 임무 조직을 위해 영구 소장 계급으로 그 곳에 갔으며, 1936년 8월 필리핀 정부로부터 원수계급을 수여 받았다. 1937년 12월 말 필리핀 임무 수료를 위해 퇴역을 택했으나, 미-일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 정부는 1941년 7월 26일 그를 중장으로 승진시키고 극동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12월 8일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바탄(1941. 12-1942. 1)에서 패한 후, 지시에 따라 필리핀을 포기(1942. 3. 11)하고 오스트랠리아로 후퇴했다. 그렇지만, 맥아더 장군은 "나는 돌아올 것이다"라는 그의 약속대로 필리핀을 다시 탈환(1945. 2-45. 8)했다. 일본침공을 앞둔 1945년 4월에 맥아더는 태평양전역 지상군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일본 항복(9월 2일)을 앞두고 육군대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종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일본의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했다.
맥아더 장군의 일본 체류는 한국전쟁 전개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당직 사령의 긴급 전화 때문에 잠을 깬 맥아더 장군은 악몽과 같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마닐라 호텔에서 그의 잠을 깨웠던 긴급전화를 떠올리면서 재판이 아니라 꿈이기를 바랐지만, 벌써 알몬드 참모장이 나타나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초 주한 미대사의 요청을 받아 맥아더는 즉시 2천명에 이르는 미국인들 및 유엔 요원들을 한국에서 철수시키기 위해 수송기와 선박 동원을 명했고, 작전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인민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공격을 감행했고, 전선은 급속히 붕괴되고 있었다. 경무장의 4개 사단규모 한국 군대는 경비임무에 적합한 수준이지, 중무장에 잘 훈련된 인민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맥아더는 한국군을 위해 탄약 등을 수송선에 적재할 것을 명하고 이를 호송케 했으며, 한국전선 실황파악을 위해 처치 장군을 급파했다. 처치는 28일 원상복구를 위해서는 미군 투입이 필요하다는 그의 평가를 알렸다. 맥아더는 29일 오전 자신이 직접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전용기를 타고 수원 비행장으로 왔으며, 차로 한강변까지 올라가 전황을 살피고 전략을 구상했다. 그 역시 지상군 투입 없이는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이를 합참에 건의했다.
맥아더는 신속하게 행동했다. 그는 공식 허가 전에 논란의 소지가 있는 38선 이북 지역 폭격을 명했다. 7월 1일 그는 24사단 소속 스미스 대대(540여명)를 한국으로 파견하여, 정찰업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스미스 부대는 8월 5일 오산 북방 죽미령에서 10여 대의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 병력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첫 전투에 돌입했다. 경무장에 평시라 전투 훈련을 등한시했던 미 24사단은 오산과 조치원 전투에 이은 7월 20일의 대전 전투에서도 연패했으나, 일본 주둔 제1기갑사단과 25사단 병력을 상륙시켜 낙동강 전선을 구축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제공했다. 맥아더가 땅 보다 시간을 필요로 했었음을 생각할 때, 비록 패배했으나 딘 소장의 24사단은 나름대로 임무를 수행한 셈이다.
낙동강 전선 상황 악화로 워커 중장이 사령부의 부산 이전을 건의하자, 맥아더는 7월 27일 대구를 방문하여 격려하면서, '한국 덩커크는 없다'는 말로 사수 의사를 분명히 했다. 워커 장군은 맥아더의 결의를 받들었다.
이틀 후, 워커 장군은 킨 25사단장 및 참모들에게, "더 이상의 후퇴나 철수 또는 방어선 재조정은 없다. 우리 뒤에는 물러설 곳이 없다. 덩커크나 바탄 철수는 없다. 부산으로의 후퇴는 역사에 남을 대 살육이 될 것이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워야 한다."라는 비장한 사수명령(Stand or Die)을 내렸다.
낙동강 전선이 위태로운 중에도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구상을 그대로 추진했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은 적의 의표를 찌르는 인천상륙을 감행하여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켰다. 10월 1일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개시했으며,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했다. 맥아더는 북진을 계속하여 남북통일을 이룩한 후, 미군 장병들이 크리스마스까지는 귀향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는 중공군의 무력개입 가능성과 규모를 과소평가하는 과오를 범했다. 유엔군의 11월 공세는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 좌절되었다. 미 1기갑사단은 운산 전투에서, 미 2사단은 군우리 전투에서, 그리고 미1해병사단은 장진호 전투에서 고전했다. 중국의 참전은 인천상륙으로 치솟은 맥아더의 명성에 큰 타격을 가했다. 맥아더는 '새로운 전쟁' 대처 방안을 놓고, 확전을 우려한 대통령 및 합참 측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1951년 4월 11일 맥아더는 해임 통보를 받았으며, 다음날 리지웨이 장군이 지휘권 인수를 위해 동경에 도착했다. 미 국민은 쓸쓸히 귀국한 맥아더를 전쟁영웅으로 열렬히 환영했다. 맥아더가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을 한 30분 동안, 그는 박수 때문에 50차례나 연설을 중단해야 했다. 뉴욕에서는 750만 명으로 추산되는 엄청난 인파가 그를 맞아 환호했다.
이제 '노병'은 사라졌고, 그의 화려한 군 경력과 업적도 잊혀가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 맥아더 동상 철거 문제를 둘러싼 논쟁과 충돌로 심한 진통을 겪고 있음은 아이로니컬하다. 이들에 의한 맥아더 폄하나 동상 철거 움직임은 불행히도 전통적 한·미 동맹 관계를 크게 해치는 행위다. 동상보존 중요성은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항의 서한 및 모리스 주한 영국대사의 충고 서한에 잘 나타나 있다. 방치하면, 우리가 은혜와 의리도 모른 채 위급할 때 도움을 준 국가와 국민을 모독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한국 국민은 미국과 영국 등 참전국이 한국 전쟁에서 치룬 엄청난 인명 피해를 모른척하거나 폄하하면 안 된다. 사람 따라 인간적 강·약점이 있고 개성이 너무 강한 맥아더라는 인물을 안 좋아 할 수는 있으나, 절망상태의 한국을 구한 그의 공로를 잊어서는 안 된다.
맥아더는 1962년 육사를 다시 방문하여 의무와 명예 및 조국을 강조하고, 군인의 희생에 관하여 역설했었다. 이제 그 '노병'은 사라져 버렸지만, 그의 공적은 남아 있다. 맥아더 동상을 역사의 현장을 굽어보는 인천 자유공원에 그대로 보존한채,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한 그의 공로를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이다. (출처: 영원한 친구들, KAFS)
全寅永(서울대교수, 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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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대한민국이 자유와 풍요로움을 누리고있는것도 맥아더장군의 덕이라는것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있는데.... 어쩌다가 저련 변종이 나와서 국론을 양극화시키고 한미혈맹을 깨뜨리고있는지 참말로 어지럽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5-10-18 오후 9:5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