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그 자체가 '거짓'의 혼(魂)이었다
월북 미군병사 젠킨슨의 자서전 '고백-To tell the Truth'(2)
Written by. konas
입력 : 2005-11-11 오후 1:02:34
主體사상은 金日成이 창안한 북한版 공산주의 이론
암기 못하면 처벌, ‘個人숭배’의 무게 체감
세계 각국에서 납치해 온 사람 많아, 日本이 자국민 귀환 위해 가장 노력
그러나 겨울이 되자 그 우물도 얼어버렸고 물을 긷기 위해 얼음을 깨야 하기도 했고, 눈이 올 때는 그 눈을 모아 녹여 음료수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 집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의 학습은 한층 더 고도의 내용으로 바뀌었다. 역사나 자유의 전사들 이야기 같은 단순한 내용들은 이미 마스터했고, 주체사상 등 보다 고도의 복잡한 내용을 배워야만 했다. 주체사상이란 다름 아닌 김일성주의이고 김일성이 독자적으로 창안한 북한판 공산주의 이론이었다.
김일성의 이론에 의하면 북한은 모든 일을 자력으로 처리하자는 것으로, 중국이나 소련 등과의 무역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경제적인 상세한 지식은 갖추지 않았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들 뿐이었다.
우리들은 매일 10-11시간씩 학습을 받아야만 했다. 보통 때는 일요일이 휴일이었지만 명령대로 암기하지 못했을 때는 일요일에도 하루에 16시간씩 학습을 받아야만 했다.
만일 우리 4인 중 한 사람이라도 암기를 못하면는 전원이 벌을 받아야만 했다. 내가 김일성의 개인숭배의 무게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어느날 나도 모르게 간부의 한 사람에게 김일성이 죽고 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질문을 했다. 이 질문 때문에 나는 호되게 매를 맞고 고통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매일 4,5명의 장교들이 영어를 배우기 위해 찾아 오곤 했다. 장교들은 지도원보다 약간 부드러운 편이었다.
어느날 우리는 아껴두었던 양말 몇 켤레를 주고 낚시에 사용할 수 있는 작은 배 한 척을 빌렸으나, 그 배는 탈 수 없을 정도로 낡았기에 한밤중에 어떤 건축 현장으로 몰래 들어가서 코르타르를 훔쳐 그 배를 수리하여 낚시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다가 붙잡히면 사형을 받을 수도 있었으나, 너무도 외롭고 고통스러워 자포자기로 저지른 일이기도 했다.
1966년 봄부터 식량배급이 줄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면도칼이나 비누의 배급이 줄고 특히 식량 배급이 줄기 시작했다. 당시 김(金)이라는 지도원이 배급계원과 공모해서 우리에게 돌아올 식량을 가로챈 것을 알았으나 우리의 입장에서 저항할 수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어느 봄날 배급담당 직원이 돼지 새끼 한 마리를 몰고 와서 그것을 길러 잡아 먹으라고 하기에 그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어렵게 먹이를 구해 정성껏 길렀다. 그러나 겨울이 되자 일단의 간부들이 몰려와 뒷마당에서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 돼지를 잡아 ‘조직이 필요로 한다’고 말하며 가져가 버렸다.
이에 아프샤란 친구는 화를 참지 못해 그놈들을 보고 한국말로 ‘개새끼’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몇 명의 간부들이 몰려와서 아프샤를 300m 떨어진 곳에 있는 민가로 끌고 가서 총살시키려고 겨누었다. 그러자 아프샤는 죽은 듯이 서 있었으나 미국인 한 사람의 가치는 북한 주민 100명에 버금가는 것이라면서 총살은 하지 않았다.
그 후 돼지 사건은 우리에게는 견딜 수 없는 분노의 상징이 되었다.
제3장 탈출 계획
수개월 후 우리는 북한 노동당의 행태를 폭로할 계획으로 소련대사관을 찾았다. 외교적 루트를 이용하여 소련으로 가서 미국으로 송환될 것을 기대하고 대사관안으로 곧장 들어갔더니 우리를 러시아 사람으로 알았던지 보초도 그냥 통과시켜 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우리는 망명을 요구했다. 놀란 대사관 직원이 통역관을 데리고 와 약 2시간 가까이 심문을 계속하면서 러시아제 담배와 몇 해 동안 맛보지 못했던 커피를 한 잔씩 나누어 주었다. 심문을 마친 외교관은 조용히 그러나 진지한 어조로 다시는 이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제4장 탈출의지 접다
그 뒤로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얻었다. 북한땅을 탈출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 더욱이 우리처럼 색다른 서양인으로서는 더더욱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번에 옮겨온 집 근처에는 몇 가구의 민가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근처에 가까이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저 가옥들을 바라볼 수 있을 뿐 그 근처에 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언덕 너머 약 300m 전방에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약 1, 2주 전 우리는 육군 병사들이 산 중턱에 구덩을 파는 것을 목격한 바 있었다.
도레노스크와 바릿슈가 호수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 구덩이가 묻혀 있었고 흙이 덮여 있는 것을 목격했다. 함께 가보자고 하여 걸어서 그곳에 가봤더니 개가 흙을 파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죽은 사람의 오른쪽 다리 두 개가 나와 있었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봤더니 2.5m 정도의 무덤에 약 10명 가량의 사람들이 묻혀 있는 것이 보였다. 며칠이 지난 다음 한 젊은 여인이 흐느껴 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뒤 얼마 후에 군인들이 찾아와서 그 부근의 개를 총으로 쏴 죽여버리는 것이었다.
제4장 푸에블로호 사건
1968년 1월 북한이 푸에블로호라는 미국 군함을 나포한 사건이 뉴스에 나왔다. 며칠 후 간부 몇 명이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찾아 와서 자랑을 늘어 놓았다.
‘영웅적인 인민 해군이 침략자 미국의 간첩선을 나포했다’는 영어로 된 팜플렛을 가지고 와서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국제수역에서 타국의 배를 나포한다는 것은 불법행위인 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가증스럽기 그지 없었다.
1992년 북한이 이 사건을 영화로 제작할 때 나를 엔터프라이즈호의 함장으로 등장시키기 까지 했다. 1968년의 뉴스는 푸에블로호 사건 일색이었다.
제5장 살인 목격
1969년 우리는 다시 평양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화천(貨泉)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어느날 북한의 죄수 한 사람이 탈옥해서 도주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들이 겁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총소리가 나서 돌아 봤더니 그 도망자는 즉석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튿날 간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간수는 말하기를 도망자에게 제 손으로 구덩이를 파게 하고는 총살시키고 그 자리에 묻어버렸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제6장 납치
1971년 돌연 몇 사람의 간부들이 일본인 두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날 밤 일본인들의 말에 의하면 한국으로 가던 상선(商船)에 타고 있다가 기관 고장으로 몇일 동안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겨우 상륙해봤더니 그것이 한국이 아니고 북한이었다는 이야기였다. 조직은 그들을 간첩으로 몰아서 체포했다는 것이다.
1971년 말부터 1972년에 이르기 까지 우리의 교육은 더욱 강화되었고 그 교육을 통과한 다음 그해 6월 13일에 ‘김일성 동지의 동정어린 애정으로 시민권이 부여된다’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만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하고 내가 질문을 했더니 한참 째려보다가 ‘그렇게 되면 너는 내일부터 이곳에 있지 못할 걸’ 하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냥 그 시민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제7장 도끼 만행
1976년 8월 18일 북한의 경비대원이 DMZ에서 미군 장교 2명과 한국군 병사 4명을 도끼로 쳐죽인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시계(視界)를 가로막고 있는 미루나무를 자르다가 일어난 불상사였다. 그날부터 평양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등화관제가 실시되고 사관학교의 수업도 중지되었다.
그 주 토요일 밤 몇 사람의 장교가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학교는 영구히 폐쇄되었다고 전했다. 영웅적인 사건이었다고 자랑을 늘어 놓았으나 북한측에 잘못이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이 사건은 2004년 탈출 후에야 처음으로 그 진상을 알 수 있었다.
제8장 여러 나라에서 납치되어 온 사람들
그로부터 수년간 나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 학습이었다. 그 외에는 Voice of America나 일본군에 의한 미군을 향한 방송이나 NHK 등 영어의 라디오 방송을 간부들을 위해 한국말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이 작업은 내가 즐겨하는 일이었다. 진지한 뉴스를 들으면 또 자신이 정말 세계에 연결된 것으로 느낄 수 있었다. 보다 균형 잡힌 뉴스를 전달한다고 하는 것은 가령 상대가 북한의 엘리트들에게 한정된 것이기는 해도 나쁜 것은 아니었다. 북한이라고 하는 나라 자체가 거짓의 혼이라는 것은 가령 한 사람의 간부라도 깨닫게만 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1978년 어느날 바릿슈와 아프샤, 도레스노크 세 사람이 평양 시가지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외국인 아내를 얻어서 생활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지도원들의 말에 의하면 이프샤의 요리인(식모)이 자신도 모르게 임신을 하게 된 후로 북한 여성을 식모로 둔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레바논 출신의 아랍인 여성을 우리를 위해 데려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흥미가 없다고 대답했다. 왠지 모르지만 결혼 같은 것은 싫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나 한 사람만 입석리(立石里)에 그냥 남게 되었다. 도레스노크는 어떤 것인가 알아보겠다고 하고 평양으로 떠났다. 그 후 세 사람을 1년반 동안 만날 수가 없었다.
그들에 의하면 북한과 교류가 있었던 레바논의 브로커가 일본에 가면 월수(月收) 1,000달러 받는 비서직이 있다고 해서 네 사람의 레바논 여성을 설득했다. 네 사람의 레바논 여인은 기꺼이 브로커와 계약을 맺었으나 비행기에 타고 보니 행방이 동경이 아니고 평양이었다는 것이다. 그 네 사람을 우리의 아내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네 사람 중 둘은 시하므와 하이파라는 이름이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로 북한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네 사람의 여성은 하층계급 출신인 것처럼 보였다. 내가 이름을 모르는 두 사람은 레바논의 권위 있는 자의 여동생이었다는 사실이 판명됐다. 때문에 두 여인은 레바논으로 돌려보내져서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었다.
한편 이태리 거주인인 시하므의 어머니는 사설 탐정에게 딸의 행방을 찾았다. 시하므의 어머니도 권위 있는 루트가 있어, 북한정부에 외교적인 압력을 행사하게 되어 시하므와 하이파는 이태리로 출국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미 바릿슈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알려지자 모친은 즉시 시하므를 평양으로 돌려 보내서 바릿슈의 아내가 되게 했다.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이 북한에 납치되기도 했고 속기도 하여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홍콩이나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로부터 유인되어 온 사람 여럿을 만나볼 수 있었다. 또 때로는 북한에서 친해진 사람들도 여러 사람 있었다.
볼 수 있었던 사람 가운데는 유럽이나 중동 출신의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왜 납치되거나 구속된 자국민을 귀환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직 일본만이 자국민을 귀환시키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하고 있을 뿐이다.
북한땅에는 세계 각국에서 납치해온 사람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고준미라는 식모 아주머니는 성격이 고약했다. 나는 간부들에게 이 사람을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
1980년 1월 15일 그 사람을 어느 직물공장으로 보내고 1980년 6월 30일 또 다른 여인을 데리고 와서 동거하게 했다. 그는 일본에서 납치해 온 소아 히도미라는 젊은 여성이었다.
암기 못하면 처벌, ‘個人숭배’의 무게 체감
세계 각국에서 납치해 온 사람 많아, 日本이 자국민 귀환 위해 가장 노력
그러나 겨울이 되자 그 우물도 얼어버렸고 물을 긷기 위해 얼음을 깨야 하기도 했고, 눈이 올 때는 그 눈을 모아 녹여 음료수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 집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의 학습은 한층 더 고도의 내용으로 바뀌었다. 역사나 자유의 전사들 이야기 같은 단순한 내용들은 이미 마스터했고, 주체사상 등 보다 고도의 복잡한 내용을 배워야만 했다. 주체사상이란 다름 아닌 김일성주의이고 김일성이 독자적으로 창안한 북한판 공산주의 이론이었다.
김일성의 이론에 의하면 북한은 모든 일을 자력으로 처리하자는 것으로, 중국이나 소련 등과의 무역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경제적인 상세한 지식은 갖추지 않았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들 뿐이었다.
우리들은 매일 10-11시간씩 학습을 받아야만 했다. 보통 때는 일요일이 휴일이었지만 명령대로 암기하지 못했을 때는 일요일에도 하루에 16시간씩 학습을 받아야만 했다.
만일 우리 4인 중 한 사람이라도 암기를 못하면는 전원이 벌을 받아야만 했다. 내가 김일성의 개인숭배의 무게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어느날 나도 모르게 간부의 한 사람에게 김일성이 죽고 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질문을 했다. 이 질문 때문에 나는 호되게 매를 맞고 고통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매일 4,5명의 장교들이 영어를 배우기 위해 찾아 오곤 했다. 장교들은 지도원보다 약간 부드러운 편이었다.
어느날 우리는 아껴두었던 양말 몇 켤레를 주고 낚시에 사용할 수 있는 작은 배 한 척을 빌렸으나, 그 배는 탈 수 없을 정도로 낡았기에 한밤중에 어떤 건축 현장으로 몰래 들어가서 코르타르를 훔쳐 그 배를 수리하여 낚시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다가 붙잡히면 사형을 받을 수도 있었으나, 너무도 외롭고 고통스러워 자포자기로 저지른 일이기도 했다.
1966년 봄부터 식량배급이 줄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면도칼이나 비누의 배급이 줄고 특히 식량 배급이 줄기 시작했다. 당시 김(金)이라는 지도원이 배급계원과 공모해서 우리에게 돌아올 식량을 가로챈 것을 알았으나 우리의 입장에서 저항할 수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어느 봄날 배급담당 직원이 돼지 새끼 한 마리를 몰고 와서 그것을 길러 잡아 먹으라고 하기에 그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어렵게 먹이를 구해 정성껏 길렀다. 그러나 겨울이 되자 일단의 간부들이 몰려와 뒷마당에서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 돼지를 잡아 ‘조직이 필요로 한다’고 말하며 가져가 버렸다.
이에 아프샤란 친구는 화를 참지 못해 그놈들을 보고 한국말로 ‘개새끼’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몇 명의 간부들이 몰려와서 아프샤를 300m 떨어진 곳에 있는 민가로 끌고 가서 총살시키려고 겨누었다. 그러자 아프샤는 죽은 듯이 서 있었으나 미국인 한 사람의 가치는 북한 주민 100명에 버금가는 것이라면서 총살은 하지 않았다.
그 후 돼지 사건은 우리에게는 견딜 수 없는 분노의 상징이 되었다.
제3장 탈출 계획
수개월 후 우리는 북한 노동당의 행태를 폭로할 계획으로 소련대사관을 찾았다. 외교적 루트를 이용하여 소련으로 가서 미국으로 송환될 것을 기대하고 대사관안으로 곧장 들어갔더니 우리를 러시아 사람으로 알았던지 보초도 그냥 통과시켜 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우리는 망명을 요구했다. 놀란 대사관 직원이 통역관을 데리고 와 약 2시간 가까이 심문을 계속하면서 러시아제 담배와 몇 해 동안 맛보지 못했던 커피를 한 잔씩 나누어 주었다. 심문을 마친 외교관은 조용히 그러나 진지한 어조로 다시는 이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제4장 탈출의지 접다
그 뒤로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얻었다. 북한땅을 탈출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 더욱이 우리처럼 색다른 서양인으로서는 더더욱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번에 옮겨온 집 근처에는 몇 가구의 민가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근처에 가까이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저 가옥들을 바라볼 수 있을 뿐 그 근처에 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언덕 너머 약 300m 전방에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약 1, 2주 전 우리는 육군 병사들이 산 중턱에 구덩을 파는 것을 목격한 바 있었다.
도레노스크와 바릿슈가 호수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 구덩이가 묻혀 있었고 흙이 덮여 있는 것을 목격했다. 함께 가보자고 하여 걸어서 그곳에 가봤더니 개가 흙을 파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죽은 사람의 오른쪽 다리 두 개가 나와 있었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봤더니 2.5m 정도의 무덤에 약 10명 가량의 사람들이 묻혀 있는 것이 보였다. 며칠이 지난 다음 한 젊은 여인이 흐느껴 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뒤 얼마 후에 군인들이 찾아와서 그 부근의 개를 총으로 쏴 죽여버리는 것이었다.
제4장 푸에블로호 사건
1968년 1월 북한이 푸에블로호라는 미국 군함을 나포한 사건이 뉴스에 나왔다. 며칠 후 간부 몇 명이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찾아 와서 자랑을 늘어 놓았다.
‘영웅적인 인민 해군이 침략자 미국의 간첩선을 나포했다’는 영어로 된 팜플렛을 가지고 와서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국제수역에서 타국의 배를 나포한다는 것은 불법행위인 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가증스럽기 그지 없었다.
1992년 북한이 이 사건을 영화로 제작할 때 나를 엔터프라이즈호의 함장으로 등장시키기 까지 했다. 1968년의 뉴스는 푸에블로호 사건 일색이었다.
제5장 살인 목격
1969년 우리는 다시 평양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화천(貨泉)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어느날 북한의 죄수 한 사람이 탈옥해서 도주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들이 겁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총소리가 나서 돌아 봤더니 그 도망자는 즉석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튿날 간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간수는 말하기를 도망자에게 제 손으로 구덩이를 파게 하고는 총살시키고 그 자리에 묻어버렸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제6장 납치
1971년 돌연 몇 사람의 간부들이 일본인 두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날 밤 일본인들의 말에 의하면 한국으로 가던 상선(商船)에 타고 있다가 기관 고장으로 몇일 동안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겨우 상륙해봤더니 그것이 한국이 아니고 북한이었다는 이야기였다. 조직은 그들을 간첩으로 몰아서 체포했다는 것이다.
1971년 말부터 1972년에 이르기 까지 우리의 교육은 더욱 강화되었고 그 교육을 통과한 다음 그해 6월 13일에 ‘김일성 동지의 동정어린 애정으로 시민권이 부여된다’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만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하고 내가 질문을 했더니 한참 째려보다가 ‘그렇게 되면 너는 내일부터 이곳에 있지 못할 걸’ 하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냥 그 시민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제7장 도끼 만행
1976년 8월 18일 북한의 경비대원이 DMZ에서 미군 장교 2명과 한국군 병사 4명을 도끼로 쳐죽인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시계(視界)를 가로막고 있는 미루나무를 자르다가 일어난 불상사였다. 그날부터 평양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등화관제가 실시되고 사관학교의 수업도 중지되었다.
그 주 토요일 밤 몇 사람의 장교가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학교는 영구히 폐쇄되었다고 전했다. 영웅적인 사건이었다고 자랑을 늘어 놓았으나 북한측에 잘못이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이 사건은 2004년 탈출 후에야 처음으로 그 진상을 알 수 있었다.
제8장 여러 나라에서 납치되어 온 사람들
그로부터 수년간 나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 학습이었다. 그 외에는 Voice of America나 일본군에 의한 미군을 향한 방송이나 NHK 등 영어의 라디오 방송을 간부들을 위해 한국말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이 작업은 내가 즐겨하는 일이었다. 진지한 뉴스를 들으면 또 자신이 정말 세계에 연결된 것으로 느낄 수 있었다. 보다 균형 잡힌 뉴스를 전달한다고 하는 것은 가령 상대가 북한의 엘리트들에게 한정된 것이기는 해도 나쁜 것은 아니었다. 북한이라고 하는 나라 자체가 거짓의 혼이라는 것은 가령 한 사람의 간부라도 깨닫게만 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1978년 어느날 바릿슈와 아프샤, 도레스노크 세 사람이 평양 시가지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외국인 아내를 얻어서 생활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지도원들의 말에 의하면 이프샤의 요리인(식모)이 자신도 모르게 임신을 하게 된 후로 북한 여성을 식모로 둔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레바논 출신의 아랍인 여성을 우리를 위해 데려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흥미가 없다고 대답했다. 왠지 모르지만 결혼 같은 것은 싫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나 한 사람만 입석리(立石里)에 그냥 남게 되었다. 도레스노크는 어떤 것인가 알아보겠다고 하고 평양으로 떠났다. 그 후 세 사람을 1년반 동안 만날 수가 없었다.
그들에 의하면 북한과 교류가 있었던 레바논의 브로커가 일본에 가면 월수(月收) 1,000달러 받는 비서직이 있다고 해서 네 사람의 레바논 여성을 설득했다. 네 사람의 레바논 여인은 기꺼이 브로커와 계약을 맺었으나 비행기에 타고 보니 행방이 동경이 아니고 평양이었다는 것이다. 그 네 사람을 우리의 아내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네 사람 중 둘은 시하므와 하이파라는 이름이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로 북한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네 사람의 여성은 하층계급 출신인 것처럼 보였다. 내가 이름을 모르는 두 사람은 레바논의 권위 있는 자의 여동생이었다는 사실이 판명됐다. 때문에 두 여인은 레바논으로 돌려보내져서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었다.
한편 이태리 거주인인 시하므의 어머니는 사설 탐정에게 딸의 행방을 찾았다. 시하므의 어머니도 권위 있는 루트가 있어, 북한정부에 외교적인 압력을 행사하게 되어 시하므와 하이파는 이태리로 출국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미 바릿슈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알려지자 모친은 즉시 시하므를 평양으로 돌려 보내서 바릿슈의 아내가 되게 했다.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이 북한에 납치되기도 했고 속기도 하여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홍콩이나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로부터 유인되어 온 사람 여럿을 만나볼 수 있었다. 또 때로는 북한에서 친해진 사람들도 여러 사람 있었다.
볼 수 있었던 사람 가운데는 유럽이나 중동 출신의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왜 납치되거나 구속된 자국민을 귀환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직 일본만이 자국민을 귀환시키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하고 있을 뿐이다.
북한땅에는 세계 각국에서 납치해온 사람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고준미라는 식모 아주머니는 성격이 고약했다. 나는 간부들에게 이 사람을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
1980년 1월 15일 그 사람을 어느 직물공장으로 보내고 1980년 6월 30일 또 다른 여인을 데리고 와서 동거하게 했다. 그는 일본에서 납치해 온 소아 히도미라는 젊은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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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해일 회장 |
나는 그녀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책임을 맡았다. 히도미는 아주 예뻤다. 그녀를 나와 결혼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그녀와 밤을 새워 여러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1978년 8월 12일(당시 19세)에 그녀의 어머니 미요시 씨(당시 46세)와 집근처 식료품상회에 갔다가 북한공작원에게 감쪽같이 잡혀 왔다. 그녀의 집은 사도오시마(佐渡島)라는 곳에 있었다.
두 남매 중 장녀인 그녀는 간호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느날 저녁 모녀가 식료품을 사러 갔다 오다가 뒤에서 낯선 청년 세 사람이 갑자기 달려들어 납치해서 손을 묶고 입을 틀어 막아 자루에 담아서 어디론지 사라졌던 것이다. 그 이튿날 아침에 도착한 곳이 북한의 청진항이었다.
번역·요약/ 최해일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회장
출처: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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