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의 달빛'
2004. 9월 00일 저녁녘에 평택항을 출항한 phoenix호(대북쌀지원선)는 자정이 가까워지자 서해5도를 지나 N.L.L(북방한계선)로 향하고 있었다.
한밤중인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어선들이 집어등을 켠 채 조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밤바다는 그야말로 불야성이었다.
"이제 곧 N.L.L을 통과합니다". "전원 정위치" 선장이 선내방송을 했다.
배가 N.L.L을 넘는 순간 그때부터 북한해역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휩싸였다.
적막강산 그 자체였다.
배는 분명히 북한 연안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데 어느 쪽이 육지고 어느 쪽이 바다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사방어디에도 불빛하나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것이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브릿지에 있는 무전기를 통해 투박한 북한말씨가 들려왔다.
"여기는 인민공화국해군, 지금 항해하고 있는 선박은 어디국적이며 어디로 가는 배입네까?" "이 선박은 대한민국의 phoenix호로 쌀을 싣고 남포로 가는 중입니다". "수고많수다. 잘다녀오시라요". 하고는 무전이 뚝 끊겼다. 그것이 전부였고 그 이튿날 새벽 남포외항에 도착할때까지 더 이상의 무전도 단 한척의 배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갑판에 나갔다. 바닷바람은 몹시 차고 매서웠다. 하늘엔 무수한 별들이 쏟아질 듯 가까이서 반짝거렸다.
불야성을 이룬 남쪽바다와 칠흑 같은 북쪽바다, 엄청난 수의 배들이 왕래하는 남쪽해로와 너무 한가한 북쪽해로, 이것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인가?
아침식사시간에 맞춰 북측도선사가 승선했다. 배에서 식사를 마친 그들의 안내로 남포갑문을 통과한 우리 배는 저녁6시가 돼서야 부두에 접안할 수가 있었다.
꼬박 하루가 걸린 셈에다 북측의 쌀 인수단 3명 승선했다.
쌀 5,000톤(40kg*125,000포)이 인도, 인수서에 쌍방 서명 날인했다.
그리고 상호간의 체제나 제도의 비판등 정치선전을 삼가하며 상대방 지도자에 대한 폄하성 발언을 삼가 한다는 내용의 약정서에도 서명했다. 우리는 준비된 두 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초대소로 향했다. 초대소는 남포항영내에 있는 3층 건물이었다.
2층 숙소로비에는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한 대형 김일성, 김정일 부자 유화가 벽면 가득히 걸려있었다. 지금 내가 온 곳은 어느 외국이나 남한내의 유명 관광지가 아니고 이들 부자가 통치하는 우리와는 체제가 다른 공화국에 와있다는 생각이 들어 약간의 긴장감이 들기 시작했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3층 식당에서 북측이 마련한 환영만찬회가 열렸다. 북한 술에 육류안주, 각종 해산물, 떡 등이 식탁에 올랐다.
북측에서 인수단 3명과 무역일꾼 3명 남측에서 우리 인도단 4명과 선장, 선원등 20여명이 참석했다.
먼저 북측 단장이 인사말을 시작했다.
"서해바다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동포애를 발휘하여 먼 길을 마다않고 여기까지 찾아주신 남측대표단과 선원들에게 감사드린다. 우리측(북)에 몇 년간 기후관계로 흉작이 되어 남측에서 이렇게 도와주니 큰 힘이 되고 있다" 라는 요지의 인사를 하고는 말미에 느닷없이 "북남은 연방제로 통일하여야 한다". 하고는 환영사를 끝냈다. 순간 나는 아차 이 친구들에게 속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한 시간전에 분명히 약정서에 서명하길 상대방의 체제나 제도 등에 대한 정치적 발언을 삼가 하기로 약조하질 않았는가? 곧이어 남측 단장인 내가 답사를 할 차례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들과 똑같은 식으로 우리(남)의 통일방안을 이야기해야 할 것인가? 금방 한 약속을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파기해 버리는 이들의 비신사적 행위를 보고 나도 그들과 똑같이 해야 되나? 하지 말아야 하나? 잠시 마음이 심히 혼란스러웠다.
말자, 아량을 보이자. 어차피 포옹해야 할 동포 아닌가? 나는 그들의 체면을 세워주는 말부터 시작했다. "80년대 중반 남측 중부지방에 대홍수가 났을 당시 북측으로부터 많은 양의 쌀과 포목을 보내와 우리를 도와줬다. 우리는 그때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콩 한쪽이라도 나눠먹고 어려울 때 서로 도와주는 것이 우리 민족의 고유한 미풍양속아닌가? 부디 하늘이 도와서 내년에는 북녘땅에도 대풍이 들기를 기원한다" 라는 요지의 말을 하고 말미에 "남북의 100만이 넘는 젊은이들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다. 우리는 절대로 상호간에 무력을 동원한 통일시도를 해서는 않된다. 반드시 평화통일을 해야 한다" 라는 말로 답사를 끝냈다.
60년 가까이 서로 앙숙이 되어 싸우고 다투며 왕래도 하지 않다가 이제 남북간에 교류협력이 활발해져 도와주는 입장에서 북녘땅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게 됐으니 감회가 새롭고 만감이 교차됐다. 나는 북측인사들에게 일일이 술을 따르며 남쪽의 자유스러움과 삶의 여유를 보여주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들과 좀더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길 원했다.
가져간 담배를 권하고 간단한 선물들을 돌렸다. 초저녁 북측 단장이 인사말에서 다소 생뚱맞은 소릴 하긴 했지만 못 들은 척 모르는척하고 지나쳤다.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남포의 밤은 이렇게 지나갔다.
이튿날 평상시대로 아침 여섯시 반경에 눈이 떠졌다. 나는 북녘땅에서의 첫 아침을 맞아 숙소 창문의 커텐을 제쳤다.
그때 왠 젊은 여자 둘이서 군복을 입고 창문 밖을 지나고 있었다. 호기심에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그들이 총을 메고 가는데 그 총끝에 대검이 꽂혀 있었다.
순간 섬뜩한 마음이 들었다. 왠 여군들이 북한으로 봐서는 최후방인 이곳에서 전시도 아닌 평시에 총에 착검을 하고 다닐까?
아침식사에 나온 북측인사에게 그들이 누구인지 물어보니 처녀들로 구성된 남포항보위대원들이라고 했다.
오전내내 부두에서 쌀 하역작업을 확인하고 사진을 찍고 점심식사를 위해 초대소로 돌아오는 길에 이번에는 소대규모의 남자군인들이 붉은 표지의 책을 옆구리에 끼고 큰소리로 구호를 외치면서 구보를 해나갔다.
남한의 햇볕정책이란 봄바람 속에 북한이라는 얼음은 녹는 것이 아니라 더욱 단단히 얼어붙고 있었다.
그동안 우리가 북한의 변화에 많은 노력을 해왔고 또한 기대해 왔던 바와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어 나는 뜨악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철옹성이 따로 없군. 3일 동안 우리는 남포항영내에서 한발짝도 밖으로 나갈수가 없었다. 외출은 물론이고 사진촬영도 금했다.
쌀 하역작업촬영이 끝나면 카메라를 봉인해버렸다. 나는 점심시간 후 짬을 내 혼자서 정문쪽으로 나갔다. 20세전후의 옛 된 병사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남에서 온 인사라는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것저것 그에게 말을 붙여보았다. 그는 별 경계심 없이 응답을 해주었다.
"여기는 군대복무기간이 몇 년인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시 물어보았다. "십년간이다"그러면 이 청년이 서른 살이 넘어야 제대한다는 말 아닌가? "집은 어딘가?""평양근방이다". "애인은 있는가?" "아직없다". "여기 내가 보니까 예쁜 여군들이 많던데 어떻게 한번 꼬셔보지그래" "꼬시는게 뭐예요?" "나는 자식보다 어린 병사에게 별 이야기를 다 한다싶어 얼른 눈길을 돌려 정문에서 쭉 뻗은 도로를 바라보았다.
이 도로와 남포시내를 관통하는 도로와 마주치는 지점에 거대한 청동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김일성동상이구나 싶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동상을 가르키며 그 보초병에게 물었다. 저게 김일성수령 동상인가? 그랬더니 그가 나에게 정색을 하면서 나무랐다.
이게 뭡네까 이게.. 이렇게 하셔야지요. 하며 손바닥을 높이 쳐올려 보았다. "그래, 저기 좀 가 볼 수 없을까?" "안내원 동무를 데리고 오시오. 그렇지 않고는 나갈수가 없습네다".
저녁 7시가 되자 예외 없이 초대소에도 정전이 됐다. 나이 많은 지배인 동무가 가느다란 초를 가져왔다. 잠시후 다시 전깃불이 들어오고 나는 바람도 쐬고 낮에 봐두었던 울타리 옆에 붙은 인민들의 아파트도 한번 볼 겸해서 슬며시 초대소를 빠져나왔다. 주위가 캄캄해서 아파트 쪽으로 바짝 붙기는 쉬웠다. 나는 도둑고양이마냥 발끝을 세워 방안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 사진이 거실 전면에 붙어있고 희미한 백열등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나는 방안에 무슨 가재도구가 있나 하고 손으로 울타리를 짚고 더높이 까치발을 했다. 그때 난데없이 "꽥꽥"하고 어디서 오리우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베란다쪽을 쳐다보니 베란다 난간에 울타리를 치고 오리를 사육하고 있었다.
그 오리가 낯선 사람이 자꾸 기웃기웃하니 꽥꽥하고 소리를 친 것이다. 나는 급히 그곳을 떠났다. 그때 어떤 이가 뒤에서 손수레를 끌고 오다가 나를 발견했는지 누가?(누구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부리나케 샛길로 빠져 나와 왔던 길로 되돌아 초대소로 돌아왔다. 2층 숙소에서 창문을 여니 때마침 만월이라 달빛이 교교히 남포 앞 바다를 비추고 있었다. 이곳 인민들의 살림살이에는 언제 이 풍성한 달빛이 비춰질까?
하역 4일째, 우리 대표단은 남포에 머무는 동안 평양을 꼭 방문해 보고 싶었다.
공식적으로 북측에 평양방문을 요청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우리제의에 순순히 응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도 가타부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내일 모래면 하역을 마치고 바로 출항인데... 어제부터 북측단장이 보이질 않았다. 손님대접이 이럴 수 있냐며 부단장에게 항의를 했다. 단장이 남측대표단의 평양방문건 때문에 본부에 갔으니 곧 올 것이라고 했다. 나는 단장에게 빨리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그는 나에게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화가 있어야 전화를 하지.. 나는 남쪽에서의 습관대로 그의 호주머니에도 휴대폰이 들어있는 걸로 착각한 것이다.
그 날 저녁까지 단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7.4조치로 인하여 외국인의 평양방문이 일체 금지되어 있어서 힘이 들 것이라고 했다. 무슨 조치가 그렇게 많은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단장이 돌아왔다. 그는 현관에 들어서자 나에게 이렇다 저렇다 말 한마디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또한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다.
어딜 가면 간다 오면 온다고 서로 인사를 하는 게 예의다. 하물며 남북대표들간에는.. 나는 꾹 참았다. 저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자고.. 잠시뒤 우리 측 실무담당자가 방으로 찾아와 저들이 만나자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물어왔다.
만나봐. 못 만날 이유가 없질 않은가? 담당자가 그들을 만나고 와서 하는 이야기인즉 힘들게 평양방문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조건이 있다. 모든 경비를 남측에서 대야 한다. 차 두 대 기름값, 남, 북측대표와 운전기사 점심값까지 포함해서 1,000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남포에서 평양까지 불과 100리 남짓이고 한나절에 불과한 관광을 하는데 1,000불을 내나? 우리 돈으로 100만원에 해당되는 돈이다. 나는 즉각 거부했다. 않갔으면 않갔지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했다.
한 시간 후쯤 또 연락이 왔다. 600불에 가자는 것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너희들 정부에 돈이 없어도 지독히 없는 모양이구나. 오죽하면 귀한 손님들에게까지 이런 식으로 바가지를 씌울려고 할까.. 그리고 이게 뭔가? 이런 사소한 일에까지 벼랑끝 전술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출항하는 날을 겨우 하루 남겨놓고... 좋다! 모르고 속으면 바보지만 알고 속는 것은 아량이다. 여기까지 와서 평양구경 한번 해보지 못하고 가는 것도 나중에 크게 후회할 일이다.(계속) (konas)
김 호 연(안보체험수기 최우수작, 경북 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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