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적해병이다
나는 제주도 태생으로 애월중학교 2학년 당시 48년 4월 3일 날 수학여행차 한라산 등산계획으로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난데없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남한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5월 10일로 결정된 총선을 방해하기 위해 남로당 프락치들 두목 김달삼과 부두목 이덕구 지휘하에 한라산에 숨어있던 공비들이 일제히 제주도 일대 13개 읍면과 경찰지서에 불을 지르고 면과 면 사이에 도로를 파 뒤집어서 양쪽으로 돌을 쌓아서 도로를 차단하고 전주와 전선을 절단해서 통신망을 파괴하는 행위가 48년 4월 3일 발생한 제주도 4·3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야간에는 공비들이 습격해서 경찰가족, 군인가족 등 민주인사들을 학살하고 식량을 약탈하며 살인 방화 등을 일삼았다.
나는 당시 학생들로 구성된 학생연맹의 조직원으로 토벌 작전에 군.경과 합동으로 전투하다가 중학교 4학년 당시 50년 6월 25일 새벽 김일성 집단의 불법남침으로 6.25가 발발되자 50년 7월에 해병대 3기 모집에 응하여 19세의 나이로 입대하게 되었다. 당시 해병대는 제주도에 주둔해서 한라산 공비 잔당 토벌에 임하고 있었다. 우국충정의 일념으로 10대1의 비율을 뚫고 합격한 1,500명이 제주도 모슬포에서 3주간의 맹훈련을 받고 해병대 4기생 1,500여명과 함께 3,000여명이 50년 9월 1일 제주 산지항에서 미 L.S.T에 승선하여 출전하게 되었다. 당시 장도에 오른 자식을 전송하러 나오신 아버지가 보였다.
나는 9형제 중 홍역등으로 2~3세 정도에 다 죽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귀한 외아들을 전장터에 보내는 심정이 오죽하였겠는가마는 옆에 전송 나온 가족들이 울부짖는 것을 보며 전장터에 나아가는 장병들 앞에서 울음소리가 왠일이냐며 호통을 치면서 아버지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며 전송을 하여 주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속마음이야 오죽하였겠는가 생각을 하다보면 보통 어른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도량이 넓으심을 짐작해본다.
해병대3,4기생 3,000여명이 제주산지항을 떠나면서 전장병이 한목소리로 한라산아 잘있거라 공산 집단을 쳐부수고 백두산 상봉에 태극기 꼽고 개선장군이 돼서 돌아오리라고 외치면서 떠났다.
50년 9월 2일에 진해항에 도착하고 해군통제부 정문 앞 소재 도천초등학교에서 1박하면서 M.I 소총과 실탄 및 일체 장비를 지급받고 9월 3일 경남통영전투에서 통영시내에 침투한 인민군 1개 대대를 완전 소탕하고 귀신도 잡는 해병이라는 신화를 남긴 전투였다.
통영에서 고성으로 넘어가는 원문고개에 주둔하면서 야간을 이용해서 침투하는 적을 끝끝내 막아내고 50년 9월 15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지휘하에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여 미해병대와 같이 합동작전으로 16개국이 참전하고 264척의 함대와 함포사격으로 월미도를 거쳐 성공적으로 상륙하여 인천을 장악하고 계속 진격하여 영등포 연희고지를 점령하고 9월 26일 드디어 수도 서울에 입성하였다.
당시 서울 중앙청은 미 해병대의 작전구역이 었었는데 모 신문기자가 다가와서 하는 말이 이승만대통령이 중앙청에 태극기는 우리 대한민국 군인이 게양을 했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을 전해듣고 해병대 2대대소속 정극모 소위 지휘하에 5인조로 편성해서 광화문으로 진격하였으나 인민군이 기관포를 설치하고 완강한 저항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27일 새벽을 기해 기습공격으로 중앙청에 침투하여 몇 명의 저항하는 적을 사살하고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대한민국만세를 부를 적에 서울시민들이 그 광경을 보고 태극기를 들고 나와서 대한민국만세, 대한민국해병대 만세라고 외치는 소리에 천지가 진동 했다.
만약에 미 해병대가 중앙청을 점령하였으면 성조기가 계양되었을 것인데 우리나라 위상이 어찌 되었겠는가. 그러나 미 해병대의 불만이 있었지만 K.M.C 넘버원하면서 한국해병대를 칭찬해 주었다.
이로 인해서 낙동강 다부동까지 진격했던 인민군이 보급로가 차단되자 50년 9월 23일부로 퇴각하기 시작하여 산으로 피해 도망가면서 아군의 추격에 몰살당하고 패잔병신세로 변하였다.
해병대는 계속 북진하면서 고양군가기직전모고지 1개를 내가 소속돼 있는 해병대 독립 5대대 21중대가 공격하는데 완전 점령하고 아군의 피해는 전사자가 10여명이 발생하여 그 전사자를 한군데 모아 놓은 것을 바라볼 때 한창의 청소년 학도병들이 조국을 위해 장렬히 산화한 영령들의 명복을 빌면서도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원흉이 누구냐는 분통과 아울러 내가 저러한 처지가 안 된다는 보장도 없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며 지금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하게 지워지지 않고 있다.
10일간의 북진전투를 마치고 작전지역을 육군에 인계하고 인천으로 집결하여 원산에 상륙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50년 10월 12일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 약 4,000명이 미함대로 인천항을 출발하였다.
10월 29일 원산 명사십리로 상륙해서 도보로 안변까지 행군도착주둔 패전병 소탕작전으로 1개 소대병력이 출동 행군하던중 적에게 먼저 노출되어 기습공격을 받았다.
소총수들은 빠른 동작으로 각개약진으로 산으로 탈출을 하였고 나는 박격포 사수이기에 적을 향하여 포탄을 퍼 붓고는 박격포를 접고 포복으로 수로를 거쳐 탈출을 시도하는데 박격포는 어깨에 메고 몸집은 크고 적의 목표물에 가장 좋았다.
조준사격으로 눈앞에 4,5발씩 수백발의 실탄이 떨어지는데도 그 중 딱 한발이 나의 철모에 명중되었으나 철모만 구부러지면서 유탄이 되어 천우신조하시어 몸에는 피해가 없었으나 뒤에 따라오던 탄약수가 얼굴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무선연락을 통하여 해병대 23중대의 지원으로 인하여 적을 완전히 격퇴시켰다.
50년 10월 31일 안변에서 야간행군으로 원산항에 도착하여 L.S.T에 승선하여 11월 1일 강원도 고저에 상륙했다.
11월 2일에 강원도 고성에서 금강산 방면으로 인민군 패잔병이 북상한다는 정보에 행군으로 출발했다.
11월 4일 고성에 도착하여 5일간의 토벌작전을 감행하고 11월 9일 고성에서 고저항까지 행군으로 L.S.T편으로 원산상륙하여 문천, 문평, 덕원, 안변등지에서 16일간의 전투를 마치고 11월 26일에 신고산 당일토벌작전에 임하고 28일 신고산으로 출동하여 주둔했다.
11월 29일 밤에 인민군 특공대 3명이 다발총을 가지고 습격하여 보초를 향해 사격하는 것을 격퇴시켰으나 아군1명이 전사하고 2명이 부상을 입고 적을 격퇴시켰다.
익일 전방으로 출동하여 인민군 잔당들을 완전히 섬멸하고 30일 신고산을 출발하여 행군으로 원산을 향하는데 해병대가 철수한다는 소식을 듣고 주민들이 노인들만 집에 두고 남녀아동 할 것 없이 전부 나와서 탈출하는 것이었다.
왜냐고 물었더니 해병대가 주둔하는 동안 식사운반등 심부름을 하였다는 이유로 반동분자라고 모조리 총살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6.25전에 같은 통치하에 있던 주민들도 저렇게 공포를 느낄정도이니 얼마나 잔인한 집단인가를 절실히 느꼈다.
12월 2일 원산을 출발하여 기차편으로 함흥에서 1박하고 3일 함흥을 출발하여 장진쪽으로 군용차편으로 온종일 이동하면서 식사는 1일 1식이었다.
6시경에 함경도 장진지구에 도착하여 해발 1,000고지에 배치되어 진지를 구출하려고 야전삽으로 땅을 30분정도 작업을 한 끝에 온통 빙판이라 겨우 박격포 포판자리 정도여서 박격포를 장치하고 잠자리는 빙판위에 싸인 눈만 걷어내고 2인1조로 하여 개개인이 기본장비로 소유하고 있는 모포 2매, 개인천막 한개, 모포 침낭 한 개였다.
빙판 위에 천막 한 장, 담요 한 장을 깔고 모포 세 매를 덮고 그 위에 천막 한 매를 덮고 그 속에 모포 침낭 속에 군화를 신고 철모를 쓰고 M.I 소총을 팔에 껴안고 보초를 번갈아 가며 취침을 하였다.
그래도 날이 새어 기상하고 보니 동사자는 한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10시경에 C레이션으로 식사를 떼우고 전방을 관찰하니 중공군 척후병이 발견돼 박격포를 사격하면서 내가 OP에서 거리를 측정하며 사격지휘를 하였는데 고지위에서 체감도가 영하 30도 정도로 느꼈다.
저녁 7시정도가 되니 하산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완전무장해서 빙판 눈 위에 미끄러지면서 50리 길을 야행으로 철수하고 모 부락에 도착하여 길가에서 야영을 했는데 서숙짚을 깔고 잠자리를 마련하였더니 복음자리가 그리 따뜻할 수밖에 없었다.
50년 12월 5일 아침에 행군을 시작하면서 도로변에 미군이 준비한 식빵 한 조각에 소시지 한 입 그 위에 죽 한 스푼이 아침식사였다.
몇 십리를 행군해서 도착한 곳이 함흥에 약 10km 떨어진 신흥이었다. 고지에 배치된 곳은 식수나 식사 보급도 불가능한 지점이었다.
그래서 미리 찐빵 크기의 찰떡 1식 1개식해서 8일분을 가지고 올라갔다. 식수는 수통 컵에 눈 녹인 물이었다.
12월 13일 함흥시내로 진입하고 2박 3일간 가택수색을 하면서 불순분자색출을 하며 잠 한 번 못자고 평양과 원산에는 중공군과 인민군이 진입을 한 상태이고 함흥도 20리 주위로 포위된 상태였다.
12월 15일 함흥지역에 위치한 연포비행장에 화물수송기편으로 2시간 만에 부산수영비행장에 도착하여 드디어 탈출하였다.
수영비행장에서 야영을 하고 12월 16일 도보행군으로 부산항에 도착하여 선박편으로 진해 도천초등학교에 도착해서 난로 하나 없는 교실에서 식사는 알랑미쌀과 꽁보리쌀로 만든 주먹밥에 깍두기에 소금국이었다.
1개월간 맹훈련을 받으면서 미해병대와 동일한 무기에 조직편성을 1개 분대 인원이 13인조로 B.A.R소총이 3정이었다. 51년 1월 24일 진해에서 G.M.C편으로 야간이동을 하고 안동연병장에 도착했다.
추하동에 주둔하며 51년 2월 3일 안동에서 의성군 쪽으로 정자동에 패잔병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개 소대의 병력으로 출동하였다.
마치 정자동 입구에 도착할 무렵 촌 노인으로부터 동네 안에서 인민군이 식사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나무위에 망을 보는 인민군 보초를 발견 즉시 사살하고 도주하는 약 200여명의 패잔병을 맹추격하면서 도망가는 적을 향해 나는 박격포사수로서 박격포로 지원사격을 하였더니 전항은 순식간에 끝이 나고 사살 25명, 생포 15명, 무기노획 30여정의 전과를 올리면서 아군에 피해는 없었다.
뒤에서 관찰하던 미 고문단들의 칭찬이 대단했다.
2월 4일 안동에서 기차편으로 영주로 이동해서 영주지구전투를 벌이다가 2월 13일 영덕강구에서 L.S.T 편으로 이동하여 2월 16일 인천에 상륙하였다.
1개월간 송림동야산에 주둔하였다가 3월 17일에 김포지구에 양곡~하성면, 양택리~가금리등 한강변에 144고지(애기봉)에 주둔하면서 개풍군전투를 1년 3개월이나 치루면서 1개중대 병력으로 한강을 도하하며 1주일씩 교대를 하면서 전투임무를 수행할때에 22중대와 23중대가 교대할 무렵 아침새벽에 인민군대대병력이 기습침투하는 것을 혈전끝에 아군의 피해도 많았거니와 소속중대가 지원사격으로 완전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개풍군 월암리 전투) 51년 8월 20일.
51년 8월 30일 개풍군 모지역야산에 인민군이 주둔하고 있는 것을 탐지하고 내가 소속된 1개소대병력이 비가 부슬부슬오는 날에 적이 방심하는 틈을 타서 기습공격하여 완전 섬멸하였다. 52년 4월 19일에 헬리콥터로 장단지구로 이동 주둔하면서 판문점 지구 사천강 전투에서 해병대 1개 여단병력이 해발 적진지군장산에 중공군 2개 사단병력이 주둔하고 있는데 600여 고지이며 아군은 사천강변 87,67,36 고지정도의 아주 불리한 지역에 적의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는 전투가 1년 3개월간이나 치루면서 아군에 피해가 776명이 전사했다.
2,000여명의 부상자를 내고 6,000여명의 적을 사살하여 끝끝내 사수를 하고 수도 서울을 지켜냈다.
해병대 백전백승의 무적해병이란 전통을 끝까지 이룩하고 나도 사천강 87고지전투에서 박격포 지원사격을 위해 O.P에서 적 포탄의 파편상을 입고 52년 11월 26일 명예제대를 하고 현재 무공수훈자회 구미시지회 지회장직을 20년간 수행하고 있다. (계속) (konas)
김석충(안보체험수기 당선작, 경북 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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