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포로수기
1. 전쟁 발발
1950년 6월25일은 주일이고 맑은 초여름 날씨였다. 나에게는 그 날이 졸업 후 6년만에 만나는 신길동 우신 초등학교 첫 동기 동창모임 이어서 그 날에 일어났던 모든 일이 어제 일같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남녀 합해서 30명 정도가 삼삼오오 모여서 서로 인사하고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중에 분위기는 한참 천진난만한 초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떠들썩한 가운데 당직선생님이 출입문을 크게 두드리고 교실에 들어와서 “여러분! 죄송합니다.
오늘새벽에 전방38선 인근에서 북측 공산군과 우리 국군사이에 무력 충돌사고가 발생하여 모든 집회는 즉시 해산하라는 영등포 경찰서로부터 통보가 있으니 곧 해산하고 귀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하는 당부 말씀을 전했다. 긴장감이 감돌면서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오후3시경에 모두 뿔뿔이 헤어졌다.
교실에서 나와 20미터 정도 떨어진 바깥변소로 가는 도중 검은 프로펠러 소련 전투기가 학교에 가까이 위치한 당시 여의도 간이 군용 비행장을 기총 사격하면서 내 머리 위에 치솟는 것을 나는 똑바로 목격하였다. 영등포시내는 초긴장 상태였고 “외출장병들은 즉시 부대로 돌아가라”하는 가두방송이 계속 이어졌다.
그때는 군용차가 모자라 민간소유의 어떤 차도 자발적으로 다 동원되었다. 나의 친척 아저씨께서도 영등포 역전에서 자동차 부속품 상회를 운용하면서 소유하고 있던 여러 대의 화물 자동차를 동원했다.
거리 곳곳에는 “북괴는 오늘 새벽을 기해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우리 국군은 적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우고 있다.”라는 호외가 뿌려 졌다.
가.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
나는 영등포 중심 가를 지나서 25일 저녁 늦게 귀가하였다. 내가 태어난 곳은 현재 대림동
지하철 역 부근에 있었다. 옛 고향은 푸른 논밭과 관악산 쪽에서 흐르는 맑은 시내 물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조용한 마을이었다.40대 나이로 대농을 경작하셨던 부친께서 나와 한 살 아래인 동생에게 “나는 상황을 살피면서 부산 쪽으로 피난 갈 터이니 너희 형제는 친구들과 상의해서 지혜롭게 처신하라” 하시면서 우리와 헤어졌다.
나는 그해 6월1일에 서울공대 입학식을 마치고 겨우 20일정도 공통 기초과목을 수강하고 있었다.
다음날 26일 학교에 가기로 마음먹고 영등포역에서 통근열차 편으로 용산 역까지 갔다. 평상시와는 달리 차안은 사람들로 붐볐고 발차 및 도착시간은 지켜지지 않았다.
용산 역에서 서울 공대가 위치한 신공덕 역 사이를 운행하는 열차는 오래 동안 오지 않았다.
얼마동안 기다리다가 대학에 갔다 돌아오는 일부 학생들을 만났다. 그들은 말하기를 학장, 교수 그리고 상급생들은 학교 사수를 결의하였으니 신입생은 별도 지시 있을 때까지 집에 있으라는 것이다.
서울공대 학장 이승기 공학박사는 전쟁 중에 월북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나가기를 삼가고 라디오만을 들을 뿐이었다. 좋은 소식은 없고 전세가 우리에게 불리한 소문만이 한사람 두 사람 건너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돌았다. 옹진이 공산군 손에 들어갔고 적은 서울 관문인 의정부도 이미 넘어 서울로 밀려오고 있었다. 길에는 남으로 향하는 피난민 대열이 눈에 띠게 늘고 있었다. 미군이 참전 할 것이라는 소식도 나왔다.
27일 저녁은 포성이 점점 가까이 들리고 날씨조차 캄캄한 밤에 비가 내리고 전기불도 들어왔다 나갔다 깜박 깜박하는 아주 쓸쓸하고 무서운 시간이었다.
불안에 떨고 있는 순간에 집이 날아 갈 듯 요란한 폭음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것이 28일 새벽에 일어난 한강교 폭파사건이다. 이로 인해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나. 피난생활
한강다리 폭파 음에 놀란 시민대부분이 피난길에 나섰다.
우리도 아버지를 제외하고 인근 청계산 밑 청계리 마을 큰 고모 댁으로 피난 갔다. 감자 호박으로 끼니를 잇고 낮에는 주로 뒷산에 올라가 시간을 보내고 밤늦게 집으로 내려와 생활하다보니 서로가 할 짓이 아닌 것 같아 보름만에 집에 돌아왔다. 반나절 길을 걸어 저녁에 귀가하였다. 돌아오는 중에 북한 인민군 행렬이 이어지고 미 공군 제트 전투기의 폭음을 자주 들었다. 마을에 들어와 보니 지난날의 훈훈한 마을 분위기는 사라지고 아주 냉 냉하였다. 길가에는 사람들의 흔적은 없고 집집마다 대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하루는 주위를 살펴보려고 오랜만에 마을을 한바퀴 돌았다. 마을 한가운데 청년단 사무실벽에는 북쪽 이민위원회 간판이 붙어있었고 안에는 김일성과 스탈린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낯선 사람들의 '모이라'는 방송과 그들의 가가호호 방문도 자자졌다. 그들은 가족들의 명단 작성을 독촉하였고 부재자의 행방도 추궁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엔 미 제24사단이 참전하였고 맥아더 장군을 초대 유엔군 사령관으로 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등 16개국으로 편성된 유엔군도 참전하였다.
한편 마을에서는 학생들에게 의용군입대 권고 운동이 시작되었다. 우리 형제는 야밤에 시흥군 서면에 있는 아주 산골 마을로 도망하여 또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아침새벽에 도착하니 아저씨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직 이곳은 의용군에 잡혀간 사람은 없고 북쪽 사람이 마을에 상주하고 있지는 않지만 수시로 마을에 온다고 한다. 아저씨는 그곳 지형을 잘 아셔서 낮에는 산중 어데 있으라고 도움을 주셨다. 시간이 갈수록 검문과 가택 수색이 있을 거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아저씨가 하루는 우리에게 찾아와서 유엔군에게 전세가 유리하게 돌아가니 집에 돌아가서 잠시만 숨어 있으라고 우리형제에게 권고 하셨다.
한편 이때 전황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전세를 가다듬는 중에 북한군은 대전을 점령한 후에 대구 부산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전열을 가다듬은 아군은 낙동강을 최후 방어진으로 하여 북한과 맞섰다. 9월초 북한군은 대구로 총 공격하였으나 1주일 동안 아군의 맹공으로 전의를 잃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다. 지하 은신 생활
우리는 아저씨말씀대로 다음날 밤 집에 돌아와 다락방에 숨었다. 이곳도 안심이 안되어 삼촌께서 골마루에 뚜껑을 만들어 그 밑을 파고 밤에 우리 형제를 그곳으로 안내했다. 삼촌 집은 바로 우리 집 옆에 붙어 있었다. 작은어머니께서는 골마루 밑에 우리가 숨어있는 동안 뚜껑을 덮고 가구를 올려놓아 위장했다.
식사나 용변 또는 중요한 정보가 있으면 가구를 치우고 뚜껑을 열라고 서로 신호를 한다. 언제나 여자들이 망을 보고 주위를 살폈다. 우리는 지하에서 전화기 수신기에 광석을 연결하여 모기소리 같이 낮은 소리의 국군 과 유엔군 뉴스를 들었다. 하루는 비행기 편대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서 함포 사격 포성이 멀리서 들리기 시작했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 소식도 뉴스에서 보도했다.
나는 지하에서 나와 함재기 폭격과 함포 사격의 불빛이 하늘에 치솟는 것을 목격하였다. 골마루 벽은 밭과 접해 있어서 사람들의 이동하는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때 작은어머니께서 놀란 표정으로 우리에게 인민군이 쫓기다시피 허겁지겁 후퇴하고 있음을 알렸다. 우리는 며칠만 참으면 자유를 찾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라. 미 해병대 선발대 마을 도착
9월 20일경을 전후해서 작은어머니께서 골마루 뚜껑을 열면서 “ 야! 빨리 나와라. 미군 두 명이 청년단 사무실 앞에서 형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빨리 사무 실로 가라!”며 큰 숨을 내쉬면서 소리쳤다. 나는 직감적으로 인천에 상륙한 미 해병대 선발대라고 생각했다. 나는 곧바로 지하 은신처에서 나와 뛰어갔다. 미군과 근접한 곳에서 나는 영어를 조금 한다고 하니 총을 내리고 손짓으로 오라고해서 가까이 갔다. 그와 나는 곧 대화가 이루어졌다.
미군) 저 청년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본인) 숨어 있다가 적이 버리고 간 총을 주워서 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미군) 미안하다.
본인) 이해한다.
미군은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총 몇 자루 중에서 두 자루만 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노획 품으로 부대에 가져가고 싶은 것 같이 보였다. 형들과 상의해서 바로 넘겨주었다.
미 해병대 한사람은 대위였고 또한 사람은 하사관이었다.
그 대위는 나한테 자기 지프차에 타라고 손짓으로 뒷자리에 안내하며 사령부로 가자고 했다. 대위는 내 옆에 앉아서 해병대 선발대가 수일 안에 한간 도강작전을 감행 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때 적의 전차는 남산에서 직사포로 대응하는 상황이었다. 영등포에서 노량진을 거쳐 용산으로 이어지는 주 보급로는 적의 수중에 있었고 미 해병대 선발대는 대림동 지방도로를 따라서 우리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드디어 부평사령부에 도착하였다. 대위는 "잠시만 차에서 기다려라" 하면서 사령부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국군 헌병 대위가 내게 와서 그 동안 수고가 많았다고 악수를 청하였다. 그는 나에게 이름 나이 주소 신분 등에 관해서 간단히 물어보았다. 그때 나는 더부룩한 긴 머리에 수염도 길게 자란 상태였다.
헌병대위는 사령부에서 학생을 문관통역관으로 고용한다면 응하겠느냐고 묻자 즉석에서 좋다고 하였다. 해병 대위가 같이 일하게 되어 기쁘다하면서 악수를 청하였다.
그는 나의 이름을 발음하는데 불편한지 간단하게 “찰스”라 불렀고 자기는 “톰”이라 하였다. “톰”은 나를 병참창고에 데려가서 내의와 작업복, 모자와 물통등 무기를 제외한 보급품 일체를 보급 관으로부터 인수하여 나에게 줘 바로 갈아입었다. 매일 “톰”이 운전하고 같이 다녔다.
사령부에서 우리마을 까지 오는 경인도로 양편 연도에는 몇 개월 동안 자유를 잃고 지친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길에 엎드려 절하는 모습에 내가 대위에게 민망 힐 정도였다.
얼마나 자유를 원 했으면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나 섰을까. 이 광경은 영등포와 부평 전 구간에 이어졌다.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이다. 상도동 가택수색에 이어 대방동에서 야간 한강 도하작전도 대위와 함께 하였다.
하루는 “톰”이 우리는 원산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겠는데 “찰스”가 원한다면 같이 가자는 것이다. 때를 같이하여 국군 연락장교 5기 후보생 모집공고가 있었다. 나는 1950년도 징병 1기에 해당되기도 한다. 나의 인생의 첫 분기점이 생긴 것이다. 둘 중에서 하나를 내 자신이 결정해야 하는 너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피난생활에서 돌아오신 부친께 엿 주었다.
부친께서는 미 해병대 통역관 근무가 병역의무와 무관하니 연락장교가 안되면 징병으로 입대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우선은 후보생 모집에 응시하라는 것이다. 나는 부친 권고에 따르기로 했다. “톰”에 사정 얘기를 하니 “service duty"는 꼭 지켜야 한다면서 후보생응시에 사령관명의로 추천서를 써준다고 하기에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시험준비에 나섰다.
서류일체를 당시 을지로2가에 있는 유엔연락장교단본부에 제출하였다. 시험은 먼저 신체검사가 있었고 합격자만이 영어필기시험과 구두시험을 차례로 치렀다. 시험장소는 당시 배재 중학교였다. 약 열흘 뒤에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계속) (konas)
유창상 (경기도 용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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