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와 5·16혁명의 단절성과 연속성
5.16사건 45년째를 맞는다. 5.16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4.19와의 관계가 규명되어져야 한다. 우리 역사는 흔히 이승만 자유당정부와 4.19를 상호부정(相互否定)의 관계로 보고, 또한 장면 민주당정부와 5.16 박정희정부의 관계를 상호부정의 관계로 보고 있다.
이런 인식의 틀에 따라 민중사학자라는 강만길 교수는 4.19를 “민중봉기”이자 “우리 근대사속의 거대한 혁명운동의 시발점”이었다고 주장한다. 김진균 교수도 “5.16 쿠데타는 4월 혁명이 제시하는 역사적 과제에 반동적 대결이었다”고 단언한다. 백낙청 교수는 4.19를 미완(未完)의 혁명으로 “이승만 시대의 반역사적 방향을 바로잡으려는 한국 민중의 혁명적 의지가 낳은 사건”이자 미완(未完)의 혁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역사인식은 4.19와 5.16의 의미와 성격에 대한 의도적 외면이나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4.19와 5.16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 우선 한국 민주주의가 언제부터 발전했느냐에 대한 시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한국의 ‘민주주의 혁명’은 반민주주의 시대를 살다가 4.19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1948년 대한민국의 민주공화국이 건국되면서부터 민족사적인 민주주의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 민족이 봉건왕정을 공식적으로 종식시키고 공화국(Republic)을 건설한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으며 자유민주적 선거(free election)에 의해 주권 기관인 의회(National Assembly)와 정부를 구성한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제1공화국 11년 동안 건국 정부구성 선거를 제외하고도 세 번에 걸친 대통령 선거(1952, 1956, 1960)를 더 치러냈고, 의회 민주주의를 공고화하기 위한 국회의원 선거는 모두 5번(1948, 1950, 1954, 1958, 1960)이나 있었다. 도의원 선거와 시/읍/면 의원 선거(1952, 1956, 1960)가 계속되었다. 신생독립국이 버텨내기 힘든 복수 정당제하의 자유선거(free election)를 연속 시행해 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으로 상징된 제1공화국은 ‘선거(選擧)’공화국이라고 할 만큼 선거에 대해 대단한 집착을 보였다.
그러나 신생독립국 대한민국은 그러한 온전한 민주주의 제도를 성숙하게 지켜내고, 그 많은 선거를 치르기에는 적절한 조건도 기반도 갖춰져 있지 못했던 나라였다. 무엇보다 한국은 이제 민족국가 건설(nation state building)이 진행되고 있는 나라였다.
무엇보다 경제사회적 여건이 매우 불충분했다. 1955년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농어민 숫자는 71%를 차지하고 있었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모두 합하여 9.5%에 불과했다. 절대적 농업사회였던 것이다. 또 일인당 국민소득은 1995년 당시 65달러($)에 불과했으며, 국민들의 문맹률도 1945년 당시 78%에 달하고 있었다. 국가건설도 완성되지 않는 나라로서 낮은 소득수준을 갖고 문맹률도 높은 절대적 농업사회가 완벽한 민주주의 제도와 반복되는 선거를 다 치러내기란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한국은 산업화의 미비로 스스로 설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1953~1961년 사이 미국의 원조는 총 국내자본 형성의 약 80%에 달했으며 이는 국민총생산의 8%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경제는 한마디로 스스로 서기도 힘든 원조경제(援助經濟)였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뤄진 한국 민주주의란 결국 조기 성숙(premature)된 민주주의 사회였던 것이다. 다른 모든 사회경제적 수준과 상관없이 민주주의, 그것도 <선거제도>만이 발전했던 것이다. 당시 제기된 사회적 합의이자 국가적 과제의 하나는 “잘 살아 보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승만정부에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4.19로 인한 이승만 정부의 교체를 ‘3․15 부정선거’의 결과로 보는 것은 매우 협소한 시각이다. 그것은 부정선거만 없었다면 국민이 계속 이승만 정부를 지지했을 것이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는 가설에 동의하기 어려운 것에서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4.19는 이승만 정부로터 ‘삶의 질’을 개선시킬 기대를 하기 어렵다는 국민적 판단의 결과일 뿐이다. 그것은 민주당의 장면이 등장한 이후 불거져 나온 보다 더 큰 실망이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으며 야당의 선거 구호이자, 국민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킨 “못 살겠다, 갈아보자”로 잘 상징화되어 있다. 당시 문제의 본질은 “못 살겠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잘 살게 해 달라”는 것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4.19 혁명을 ‘보다 높은 민주주의’라는 차원의 민주주의 혁명으로 보는 것은 당시 우리 사회의 기본적 흐름과 사회적 합의의 내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이다.
원조중심의 경제가 끝나가면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경제 불안정과 철저한 ‘민주주의 교육’으로 무장된 신세대의 등장과 맞물리면서 ‘잘 살겠다’는 염원에서 현존 질서를 부정하고 대안을 찾아보자는 것, 그것이 4.19혁명의 본질이었다. 1960년 4월 19일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는 제1차적 대안모색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대안세력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검증 과정이었고 그 검증과정을 통해서 대안세력이란 그 누구의 기대에도 충족되지 않는 것임이 밝혀졌던 것이다.
더구나 1961년이면 아직 한국전쟁이 종결된 지 불과 7년 남짓한 기간이어서 전쟁의 상흔이 우리 사회 곳곳에 배어있었고 공산 전체주의의 생존위협으로 신생 독립국은 여전히 살얼음을 걷는 상태였다. 그러나 대안 중의 하나로 판단되어 몰표로 등장한 민주당 정부는 한 술 더 뜨는 것이었다. 내각제에의 부적응, 민주당의 분당과 분열, 정치지도자들의 계속된 내부 갈등이 곧 ‘민주주의란 이런 것인가?’라는 회의를 낳았을 뿐이었다.
더욱이 분단국의 대치 상황과 한국의 붕괴를 목적으로 활동하는 북한체제의 본질은 외면한 채로 4.19를 주도하고 정권을 물러나게 했던 학생들은 이제 ‘통일’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로 상징되는 학생운동은 ‘민족통일 전국학생운동연맹’으로 발전되었다. 급기야 민주당은 “대한민국의 주권이 침해당하는 어떤 방식으로도 통일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혀야 했고 오히려 <국가보안법>을 강화시키는 개정안을 추진해야 했다. 나아가 4.19를 지원했던 <동아일보> 사설도 “학생다운 순진성을 지녔더라면 차라리 현 질서를 부정하는 공산분자로 자처하고 나서라”고 요구할 수준이었다.
S. 헌팅턴의 표현을 빌린다면 정치제도화 수준이 감당할 수 없는 정치참여의 폭발로 이어진 것이다. 4.19 후 약 1년이 지나서 일어난 5.16은 바로 누적된 국민적 염원이 표출된 사건의 하나였다. 참여폭발과 과잉 민주주의에 따른 모든 혼란과 논쟁을 일시에 잠재우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혼란보다는 안정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것과 민주주의보다는 ‘잘사는 사회’에 대한 대안을 찾자는 바람의 결과였다. 윤보선 대통령조차도 “한국은 강한 정부를 필요로 하는데 장면은 그런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고 5.16을 인정하고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군부 쿠데타를 기점으로 전환을 맞은 박정희시대에 정권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요구된 것은 앞서 언급한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된 체제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적 자부심을 느낄 만큼 번영된 나라를 만들었으면 하는 염원의 반영이었다. 함석헌은 <5.16을 어떻게 볼까?>(‘61년 7월, 사상계)라는 글에서 “학생이 잎이라면 군인은 꽃이다”라며 4.19와 5.16의 연속적 성격을 표명하였다.
당시 민족적이면서도 민주적 사상을 대변했던 잡지 <사상계>도 5.16 군사쿠데타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했었다. 5.16혁명 직후에 나온 <사상계> 6월호에 실린 장준하의 권두언은 “4.19혁명이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라고 해석했다. 나아가 <사상계>는 “한국의 군사혁명은 압정과 부패와 빈곤에 시달리는 많은 선진국 국민들의 길잡이요, 모범으로 될 것이다”고 전망하였고 그 전망과 예언은 수십 년이 지난 후 정확하게 적중하였다.
물론 당시 쿠데타의 주역이 조직화된 개혁방안이나 일관된 이데올로기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군은 국가안보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과 계속된 질서부재와 사회 불안정으로는 한국이 맞이한 당면 문제들을 해결해나갈 수 없다는 암묵적 합의만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다만 학생과 달리 군(軍)에게는 조직력과 집행력이 있었다. 군(軍)조직은 냉전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장했고, 그 결과 다른 사회경제적 조직이나 집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장 발전되고 조직화된 조직이자 기술적으로도 앞선 조직이었다. 군을 중심으로 4.19가 미처 추진할 수 없었던 주체세력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학생중심적 4.19가 만들어 낼 수 없었던 조직화된 집행력을 구축함으로써 사회 안정과 번영을 향한 혁신적 기반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5.16의 <혁명공약>도 ‘반공을 제1 국시로 삼겠다는 것’이었고 절망과 기아에 빠진 국민을 구하기 위해 ‘경제를 부흥시키겠다는 것’이었다. 18년간 계속된 박정희 시대의 안정성과 정당성은 1962년~1967년의 제1차 경제개발계획의 산물이었다.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시대는 자기 권력의 정당성을 안보와 경제에 두고 있었고, 안보를 튼튼히 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면 그것이 바로 정치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으로 사회적 합의가 조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4.19와 5.16은 연속성을 갖는 중요 사건들임이 틀림없다. 물론 단절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단절적 성격보다는 연속적 성격이 더 크다. 단절된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열망이 계승되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계승된 것은 ‘못 살겠다’는 것을 해결해 나가야하겠다는 국민적 과제의 해결방안을 찾는 것이었다. 4.19의 의미와 성격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첫발은 4.19가 ‘보다 많은 민주주의’를 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었음을 파악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미 1948-1960년간 진행된 이승만의 제1공화국이 어느 신생국가도 가지 못했던 수준의 개인 재산권의 보장과 선거 민주주의, 그리고 시장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정착시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1961년 5.16으로 시작된 체제는 민주주의보다는 삶의 질 향상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것은 4.19의 정신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산업화를 기반으로 1987년부터 진행된 민주화는 제1, 제2공화국을 이은 제2차 민주화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4.19와 5.16은 단절성과 연속성을 함께 갖는다. 원칙적 민주주의 제도의 확립과 준수라는 측면에서는 단절적 성격을 갖는 것이고, 안정속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통한 번영국가와 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연속성을 갖는다. 5.16은 질서와 번영의 측면에서도 의의가 있지만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공고화되기 위해서는 제도를 넘어선 토대가 필요하다는 인식의 정립과정이기도 하다. ‘조기 성숙된 민주주의’만으로는 국민의 삶이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다는 공유된 인식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대안 모색의 일환으로 일어난 것이 4.19였고 5.16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4.19와 5.16은 ‘2단계 연속혁명’이며 세계사적 성공모델로 정착될 만한 성공 혁명이었다.(프리존)
김광동(나라정책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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