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우리 국군이 침략전쟁을 했단 말인가?
Written by. 김광동
입력 : 2006-06-09 오후 4:25:48
징역 2년 유죄판결을 받고 집행유예중인 강정구가 6·25전쟁중 중국의 참전은 ‘방어전쟁’이었다는 대중강연을 하였다. 중국이 ‘방어전쟁'을 했다면 한국과 미국은 침략전쟁을 한 것이다. 졸지에 우리는 침략전쟁을 저지른 전범국가가 되었다. 미국과 유엔군은 제국주의 군대가 되었다. 미국 때문에 김일성의 통일전쟁이 좌절되었다고 안타까워하더니 중국 때문에 자유민주적 통일이 좌절되었다는 논리는 이번엔 성립되지 않는 모양이다.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은 유엔(UN) 결의에 따라 자유선거로 합법적으로 건국된 나라다. 김일성이 지배했던 한반도 북부지역은 유엔 결의가 좌절되고 집행되지 못한 지역이다. 그럼에도 반민족적 불법 집단이 스스로 해체하기는커녕 급기야 침략전쟁을 저질렀던 것이다. 불법과 반민족세력이 오히려 합법과 민족세력을 공격한 것이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스탈린과 김일성의 침략군은 패배하기 시작하였다. 김일성 침략군의 패배가 확인되자 9월 28일 유엔군은 항복을 요구하며 전쟁 종결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도리어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라며 항복을 거부하였다.
10월 2일, 재차 항복을 요구했지만 거부되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전쟁을 계속해야만했던 이유는 이랬다. 항복을 거부한 침략군에 대한 군사작전의 계속이었던 것이다. 10월 7일, 유엔은 재차 한반도 전체가 자유선거에 의한 통일 국가로 갈 것을 결의하였다. 그 결의는 56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6·25 전쟁은 스탈린과 김일성의 침략전쟁이지만, 한편으론 모택동의 전쟁이다. 일본을 대신해 1955년까지 만주지역에 주둔했던 스탈린 군대는 중국 공산당의 지휘부이자 모택동의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스탈린의 힘을 빌어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모택동에게 다음 과제는 남아있는 대한민국의 공산화냐, 아니면 대만의 공산화냐의 선택문제였을 뿐이다. 대만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개입 의지와 김일성의 한반도 선(先) 공산화라는 집요한 요구에 따라 김일성에 대한 지원에 나섰던 것이다.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은 한반도 공산화가 곧 중국 혁명의 최종적 완수의 일환이라고 보았고 중국 중심의 아시아 공산제국(共産帝國)을 만드는 첫걸음이라고 보았다. 김일성의 요청을 받아들여 모택동은 중국 공산당 군에 편입되어 있던 조선인 4만 2천명을 차출하여 북한의 조선인민군에 편입시켜 남침의 주역이 되도록 했다.
모택동군은 인민군 제5, 제6, 제7사단의 주축이 되었고 6·25 남침시 서울점령의 선두에 섰던 제4사단의 핵심전력이 되었다. 예를 들어 방호산의 제6사단은 바로 중국인민해방군 166사단이었고 수많은 전쟁경험을 딛고 전쟁초기 대전지역에서 미 제24사단을 괴멸시킨 장본인이다. 그 외에도 모택동은 동북야전군 제38군, 제39군, 제40군 약 18만명을 압록방 북방에 예비전력으로 배치시켜 참전 대기상태에서 전쟁이 시작되도록 하였다.
모택동은 이미 1949년 12월 16일부터 1950년 2월 17일까지 소련에 장기 체류하며 한반도전쟁 의제를 스탈린과 협의했었다. 또한 모택동은 전쟁 한 달 직전인 1950년 5월 13-16일까지 침략전쟁을 협의하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 박헌영으로부터 최종적 전쟁계획을 보고 받고 협조체제를 갖추게 된다. 만약 미국의 개입으로 대한민국의 괴멸이라는 전쟁 목적에 차질이 오면 곧바로 중국이 참전한다는 확약을 하였다. 걱정하지 말고 전면 남침을 시작하라는 지시였다. 심지어 모택동은 참전하게 될 중공군은 모두 머리가 검기 때문에 북한군인지 중공군인지 가려내기 힘들 것이라며 주저하는 김일성의 인민군에 힘을 보태주었다.
이처럼 모택동의 중국공산군은 대한민국의 남침의 또 다른 주역이자, 당사자였는데도 중국이 ‘방어전쟁’을 했다는 것은 6·25전쟁에서 우리 국군과 미군이 침략전쟁을 했다고 주장하자는 것이다. 전범국가가 엄연히 있는데도 그 책임을 묻고 사과를 받아내기는커녕 도리어 대한민국이 전범국가이고, 재앙에 가까운 희생을 치러야 했던 우리 국군을 침략전쟁을 저지른 당사자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6·25 전쟁은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 되고 있다. 한국전쟁으로부터 공산 제국주의와 김일성체제의 본질이 드러났고 공산주의에 대한 봉쇄(containment)와 압박(rollback)이 시작된 계기가 된 전쟁임에도 그 민족사적, 세계사적 의의가 묻혀져 있다. 한국전쟁은 20세기 후반부에 펼쳐졌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의 세계적 확산과 보편화의 단초를 열었던 전쟁이었다. 세계사가 가야할 이정표(里程標)를 제시했던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 정도가 아니라 ‘민족해방전쟁'이니 ‘내전’이니, 혹은 '통일전쟁'이니 '방어전쟁'하는 세력들의 낯 뜨거운 준동이 놀랍고 이를 추종하고 방치하는 우리 사회가 놀랍다. 이 모든 것은 '386의 난(亂)'을 용납했던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간첩 송두율이나 강정구를 구속시키겠다는 검찰총장이 오히려 옷을 벗어야하는 시대에 굴종했던 우리의 책임이다. 또한 침략전쟁의 당사자인 모택동을 가장 존경한다는 국가 최고지도자를 모시고 사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도 하다.(Konas)
김 광 동(나라정책원장, 정치학박사)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은 유엔(UN) 결의에 따라 자유선거로 합법적으로 건국된 나라다. 김일성이 지배했던 한반도 북부지역은 유엔 결의가 좌절되고 집행되지 못한 지역이다. 그럼에도 반민족적 불법 집단이 스스로 해체하기는커녕 급기야 침략전쟁을 저질렀던 것이다. 불법과 반민족세력이 오히려 합법과 민족세력을 공격한 것이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스탈린과 김일성의 침략군은 패배하기 시작하였다. 김일성 침략군의 패배가 확인되자 9월 28일 유엔군은 항복을 요구하며 전쟁 종결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도리어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라며 항복을 거부하였다.
10월 2일, 재차 항복을 요구했지만 거부되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전쟁을 계속해야만했던 이유는 이랬다. 항복을 거부한 침략군에 대한 군사작전의 계속이었던 것이다. 10월 7일, 유엔은 재차 한반도 전체가 자유선거에 의한 통일 국가로 갈 것을 결의하였다. 그 결의는 56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6·25 전쟁은 스탈린과 김일성의 침략전쟁이지만, 한편으론 모택동의 전쟁이다. 일본을 대신해 1955년까지 만주지역에 주둔했던 스탈린 군대는 중국 공산당의 지휘부이자 모택동의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스탈린의 힘을 빌어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모택동에게 다음 과제는 남아있는 대한민국의 공산화냐, 아니면 대만의 공산화냐의 선택문제였을 뿐이다. 대만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개입 의지와 김일성의 한반도 선(先) 공산화라는 집요한 요구에 따라 김일성에 대한 지원에 나섰던 것이다.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은 한반도 공산화가 곧 중국 혁명의 최종적 완수의 일환이라고 보았고 중국 중심의 아시아 공산제국(共産帝國)을 만드는 첫걸음이라고 보았다. 김일성의 요청을 받아들여 모택동은 중국 공산당 군에 편입되어 있던 조선인 4만 2천명을 차출하여 북한의 조선인민군에 편입시켜 남침의 주역이 되도록 했다.
모택동군은 인민군 제5, 제6, 제7사단의 주축이 되었고 6·25 남침시 서울점령의 선두에 섰던 제4사단의 핵심전력이 되었다. 예를 들어 방호산의 제6사단은 바로 중국인민해방군 166사단이었고 수많은 전쟁경험을 딛고 전쟁초기 대전지역에서 미 제24사단을 괴멸시킨 장본인이다. 그 외에도 모택동은 동북야전군 제38군, 제39군, 제40군 약 18만명을 압록방 북방에 예비전력으로 배치시켜 참전 대기상태에서 전쟁이 시작되도록 하였다.
모택동은 이미 1949년 12월 16일부터 1950년 2월 17일까지 소련에 장기 체류하며 한반도전쟁 의제를 스탈린과 협의했었다. 또한 모택동은 전쟁 한 달 직전인 1950년 5월 13-16일까지 침략전쟁을 협의하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 박헌영으로부터 최종적 전쟁계획을 보고 받고 협조체제를 갖추게 된다. 만약 미국의 개입으로 대한민국의 괴멸이라는 전쟁 목적에 차질이 오면 곧바로 중국이 참전한다는 확약을 하였다. 걱정하지 말고 전면 남침을 시작하라는 지시였다. 심지어 모택동은 참전하게 될 중공군은 모두 머리가 검기 때문에 북한군인지 중공군인지 가려내기 힘들 것이라며 주저하는 김일성의 인민군에 힘을 보태주었다.
이처럼 모택동의 중국공산군은 대한민국의 남침의 또 다른 주역이자, 당사자였는데도 중국이 ‘방어전쟁’을 했다는 것은 6·25전쟁에서 우리 국군과 미군이 침략전쟁을 했다고 주장하자는 것이다. 전범국가가 엄연히 있는데도 그 책임을 묻고 사과를 받아내기는커녕 도리어 대한민국이 전범국가이고, 재앙에 가까운 희생을 치러야 했던 우리 국군을 침략전쟁을 저지른 당사자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6·25 전쟁은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 되고 있다. 한국전쟁으로부터 공산 제국주의와 김일성체제의 본질이 드러났고 공산주의에 대한 봉쇄(containment)와 압박(rollback)이 시작된 계기가 된 전쟁임에도 그 민족사적, 세계사적 의의가 묻혀져 있다. 한국전쟁은 20세기 후반부에 펼쳐졌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의 세계적 확산과 보편화의 단초를 열었던 전쟁이었다. 세계사가 가야할 이정표(里程標)를 제시했던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 정도가 아니라 ‘민족해방전쟁'이니 ‘내전’이니, 혹은 '통일전쟁'이니 '방어전쟁'하는 세력들의 낯 뜨거운 준동이 놀랍고 이를 추종하고 방치하는 우리 사회가 놀랍다. 이 모든 것은 '386의 난(亂)'을 용납했던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간첩 송두율이나 강정구를 구속시키겠다는 검찰총장이 오히려 옷을 벗어야하는 시대에 굴종했던 우리의 책임이다. 또한 침략전쟁의 당사자인 모택동을 가장 존경한다는 국가 최고지도자를 모시고 사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도 하다.(Konas)
김 광 동(나라정책원장, 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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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구 이놈은 통일전쟁 운운으로 현재 집행유예 상태다.당장 구속시켜야하며 다시는 헛소리 하지못하게 공업용미싱으로 주둥아를 박아버려야한다.(이번에는 천정배가 아닌 노무현이 직접 나설라...............!!!)</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6-06-09 오후 5:01: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