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화'라는 이름의 空虛한 談論
김영삼 정부의 청와대 수석으로 국제대학원을 탄생시키는 등 세계화 정책을 추진했었고, 근래에는 한나라당 의원을 잠시 지낸 서울대 박세일 교수가 지난 2월에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이란 책을 펴냈다. 또한 박 교수는 지난 5월부터 현 정국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조선일보에 세 차례에 거쳐 기고했다. 그러나 박세일 교수의 책과 기고문을 읽고 난 나의 소감은 한마디로 공허(空虛)함이다. 혼란하기만 한 나라 안팎의 정세, 우리 사회 내부의 엄청난 갈등과 대립 등 화급한 문제가 너무나 많은데 비해 박 교수가 제시하고 있는 길은 너무나 추상적이라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현 시국에 비추어 과연 ‘선진화’라는 담론을 내거는 것이 과연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무엇보다 ‘선진화’ 및 ‘공동체 자유주의’라는 것이 도무지 콘텐츠가 있는 것인지도 의심스럽다. 어떻게 본다면 이런 논의는 일종의 양비론(兩非論)이나 관전평(觀戰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내용으로 보자면 기든스 교수의 ‘제3의 길’의 흔적을 많이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영국 노동당의 블레어 정부가 실제로 걸어온 길을 보면 과연 ‘제3의 길’이란 것이 현실적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박 교수의 책을 보면 이 세상의 아름다운 말은 모두 모아 놓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민관협치(民官協治)’ ‘부민덕국(富民德國)’ ‘공동체 자유주의’ ‘연대와 보완’ ‘선진시민사회’ ‘선진외교안보’ ‘개혁적 보수’ ‘합리적 진보’ 등 더 이상 동원할 좋은 단어가 남아 있지 않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교수의 책은 국가보안법의 와해와 친북좌경 정책으로 인한 국가 정체성 훼손, 전교조 등 공공노조와 방송의 심각한 좌경화, 신문법 등 악법에 의한 언론자유 침탈, 시민의 자치와 재산권을 부인하는 사학(私學)악법과 부동산 정책 등 심각한 현안문제들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내가 아둔한 탓도 있겠지만 ‘공동체 자유주의’와 ‘선진화 운동’을 이런 현안문제에 대입해 보아도 어떤 결론은커녕 단서도 얻지 못할 지경이다.
박 교수는 5월11일에는 ‘선진화냐 몰락이냐’, 6월12일에는 ‘한나라당은 창당수준의 혁신해야’, 그리고 7월15일에는 ‘국민을 위한 정계개편’이란 제목의 글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5월11일자 글에선 우리나라가 흔들리는 이유는 좌파라는 반(反)선진화 세력이 등장해 있기 때문이라면서 뉴라이트, 뉴레프트, 선진화 국민운동이 힘을 합쳐 선진화 주체세력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6월12일자 글에선 한나라당이 민주당, 국민중심당, 고건 총리의 희망연대 등 범(汎)우파 세력의 대동단결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7월15일자 글에선 노무현 정권이 국정운행에 있어 일탈과 혼란이 너무 많았다고 하면서, 우리나라 정계는 합리적 좌파와 개혁적 우파로 나누어지는 것이 좋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니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를 위해서 국민을 하나로 묶고 다시 뛰게 할 수 있는 사상과 철학을 가진 정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노무현 정권의 좌경화를 반(反)선진화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식선에서 생각하더라도 납득하기 어렵다. 현 정부는 좌경화 정도가 아니라 친북적이라 할 정도의 정책을 취하고 있어서 문제인데, 그것을 단지 ‘반(反)선진화’라고 부르는 것은 황당하다. 박 교수의 눈에는 시청 앞과 서울역 광장에서 벌어지는 애국적 시위가 노무현 정부의 ‘반(反)선진화’ 정책에 반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지 묻고 싶다.
박 교수는 5월11일자 글에선 뉴라이트, 뉴레프트, 그리고 선진화 국민운동세력이 합쳐야 한다고 주장하더니, 6월12일자 글에선 한나라당이 정통우파, 신(新)우파, 중도우파 등 모든 우파 세력을 모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5월에는 좌우 합작을 하자고 주장하더니, 한달 후에는 한나라당이 중심이 되어 범(汎)우파 연대를 하자고 주장한 것이라 종잡을 수가 없다. 또 7월15일자 글에선 우리나라 정당이 범(汎)우파와 범(汎)좌파 정당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도, ‘사상과 철학’을 가진 정당이 필요하다고 하니, 보통 두뇌를 가진 사람으로선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한편으로는 좌파적 세계관에 입각한 반(反)선진화 세력이 집권해서 오늘날 우리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하면서도 우리나라 정당이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지는 것이 좋다고 하고 있으니, 좌파가 나쁘다는 것인지 좌파도 수용할 만 하다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학자가 나름대로 이론을 구성하고 정책을 제안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한 시사평론을 하더라도 최소한의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 아닌가 한다. 그런 점에서 박 교수의 고담준론(高談峻論)은 문제를 풀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을 야기하지 않았나 한다. (출처:미래한국신문)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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