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 장군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선 전역에서 울린 포성은 반만년 한국 민족사에서 가장 참혹한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인명 피해가 한국인 530만여 명, 연합군 15만여 명, 중공군 92만여 명에 달했고, 1000만 이산가족이 지금도 남북으로 갈려 고통을 겪고 있다. 일제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지 채 5년도 안 된 상태에서 벌어진 이 사변은 우리 민족을 지구상에서 가장 비참한 상태로 전락시켰다. 56년 전에 있었던 이 비극의 장에서 대한민국을 기사회생시킨 것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6월 29일 전황 파악을 위해 한강 전선을 시찰하면서 노량진 전선의 참호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초췌한 한 병사에게 다가가 “이곳을 지킬 수 있겠는가?”라고 물어보았다. 그 병사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총과 탄약이 부족합니다”라고 답하고 적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 병사의 결사 의지를 지켜본 맥아더 원수는 공산군의 침략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킬 만한 충분한 가치와 가능성을 확인하고, 귀환 길에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고 한다.
북한군은 소련제 T - 34전차를 앞세우고 파죽지세로 공격, 8월 1일에는 한국의 마지막 방어선인 120마일 낙동강 전선 곳곳을 위협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맥아더 원수는 길어진 적 병참선 후방을 차단, 지대 내에서 적 주력을 격멸하고자 인천상륙작전을 추진했던 것이다. 불리한 입지 조건 때문에 인천상륙작전 성공 확률은 5000분의 1에 불과하다는 혹평과 함께 군부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음에도 맥아더 원수는 “나는 지금 찰칵 찰칵, 운명의 초침 소리를 듣고 있다.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 죽는다”라는 비장한 결의로 적의 허를 찌르는 대작전을 결행했다.
9월 15일 06시 상륙을 개시, 2시간 만에 월미도를 점령하고 인천과 수원을 차례로 점령한 후 9월 28일 마침내 서울을 수복함으로써 적화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구해냈다.북한의 전쟁 계획은 작전 개시 후 50일 안에 부산을 점령, 광복 5주년 기념일인 1950년 8월 15일 부산에서 ‘남조선 해방 기념행사’를 갖는 것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이러한 북한 정권과 군의 전쟁 목표를 일거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 성공적인 군사전략이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후방이 차단돼 더 이상 낙동강 전선을 유지할 수 없게 된 북한군은 총 반격에 나선 국제 연합군에 쫓겨 지리멸렬 상태로 중부 산악 지역을 따라 38선 이북으로 도주함으로써 붕괴돼 갔다.
인천상륙작전은 한국 정치사적인 관점에서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유지하면서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분기점이 됐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또 인천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히 확산돼 가고 있던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고 소련과 중공의 세계 적화 전략에 쐐기를 박은 쾌거였다는 측면에서 인류사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것은 공산권의 붕괴와 몇 개 남지 않은 공산국가들의 몰락이 잘 말해 주고 있다. 즉,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는 천부의 인권과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인천상륙작전을 추진,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꿔 놓은 맥아더 원수의 동상 앞에 헌화는커녕 오히려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위대한 업적에 대한 폄하이자 역사의 본질에 대한 심각한 왜곡인 것이다. (konas) (출처: 국방일보)
이도상 (예비역 육군준장·한국청소년문화재단 회장 gendsl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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