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공원의 자유
나는 요즘 슬그머니 월미도가 가고 싶어졌다. 그래, 몇몇 문인들과 의논한 끝에 우리는 어느 날씨 좋은 날, 인천행 전철에 몸을 실었다.
사실, 대학을 갓 졸업한 나는 인천에 위치한 ‘바다의 별’ 보육원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고아들을 위하여 스폰서들에게 영문편지를 써주는 일이었다. 하숙 한 번 해본 적 없이 집에서만 살아온 나는 졸업 후 자유가 그리웠다. 그래서 쥐꼬리만한 월급에 의존해 난데없이 출가를 한 것이다.
바쁜 일과가 끝나 저녁때가 되면 내겐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저녁이면 나는 슬그머니 문을 빠져 나왔다. 내가 아는 유일한 장소인 송도로 향했다. 불덩이 같던 해가 바다로 떨어지고 사방이 어둑해 지면 나는 화교촌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인천의 화교촌, 즉, 차이나타운은 그 당시 폐허였다.
과거 번창하던 요릿집들은 다 허물어져 간판이 너덜너덜했고, 쓰러져 가는 집들의 알전구가 켜진 창문 너머로 양귀비처럼 예쁜 중국소녀들이 내다보곤 했다.
그 길이 끝나는 어느 모퉁이에 장미다방이라는 조그만 찻집이 있었다. 지친 나는 장미다방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한 쪽에서 유행가 소리가 애처로이 들려오는 장미다방에는 항상 굵은 팔뚝의 외항선 마도로스들이 커다란 파이프를 입에 물고 앉아 있었다. 그들의 거친 피부와 말, 차림새 등에서 나는 이국적 정취를 듬뿍 느끼며 나만의 상상을 한껏 펼치기 시작한다.
그런데, 나는 그 때 인천에 살면서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있다는 자유공원이라는 데를 가 본 적이 없었다. 그 때 내게 한국전쟁, 맥아더 장군 등은 나와는 상관없는 머나먼 존재로만 여겨졌었다.
인천에 도착한 우리들은 차를 타고 월미도로 향했다.
월미도.
나는 이 말을 오히려 외국인들에게서 더 많이 들었다. 특히, 지금은 ‘초신휴’(장진호 전투 생존자 모임)라는 단체에 몸담고 있는 미국인들로부터였다. 그들은 한국전쟁 당시 미해병대 소속으로서 직접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월미도’란 이름을 마치 자기 고향 이름 부르듯 친근하게 부르며 내게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그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산복 차림으로, 혹은 죠깅화를 신고 걷거나 뛰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긴장감은 사라지고 그지없이 평화스럽고 아늑했다.
월미도를 돌아 나온 우리 일행은 그 곳에서 좀 떨어진 자유공원으로 향했다. 자유공원에 도달하기 위해서 무심코 차이나타운으로 들어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 옛날의 폐허는 간 곳 없고 호화스럽게 치장한 중국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새 신부처럼 요란하게 단장한 크고 작은 음식점들이 다투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고, 중국인 특유의 빨간색을 칠한 건물에 매달린 황금빛 대형 간판들이 저녁햇살에 번쩍거리고 있었다. 달콤하고도 애상적인 중국 가수들의 노래가 집집마다 흘러나오고 있었고 빨간 비단옷을 입은 꾸냥들은 음식을 나르느라 분주했다.
휘황찬란한 차이나타운을 지나 우리를 태운 차는 계속 위로 돌아 올라갔다.
자유공원에 도착했다.
계단을 조금 올라가자 맥아더 장군의 모습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한미수교 백주년 기념탑은 서쪽 능선에 서 있었다.
일명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으로 불리던 인천 상륙작전. 인천항의 조수간만의 차이가 너무 심해 모든 지휘관이 반대했다던 인천상륙작전.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적군의 사령관도 이와 같이 무모한 공격을 시도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하며 반대자들을 설득했다. 결국 그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벼랑 끝에 섰던 6.25 전쟁의 전세를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동상 주위에는 산책 나온 사람들과 여행객, 외국인 등 온갖 사람들이 거닐고 있었다. 그들은 우뚝 솟은 맥아더 장군 동상과 우람한 힘이 느껴지는 한미수교 백주면 기념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자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독크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대형 외항선들이 짐을 부리며 정박 중이었다.
나는 그 곳 광장 난간에 기대어 서쪽하늘에 불타는 저녁노을을 감상했다. 그리고 나는 또 오늘까지 이어진 그 자유에 감사했다. 이제 그야말로 생활에 찌들릴대로 찌들린 현대인이지만 그래도 훌쩍 전철에 몸을 싣고 친구들과 자유공원을 찾을 수 있는 이 자유의 소중함에 대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직장근처의 자유공원엘 하루에 한 번 씩 꼭 찾는다는 한 수필가는 말했다.
“봄이면 자유공원은 꽃과 함께 피어납니다.
벚꽃이 폭포처럼 공원을 뒤덮어 오면, 서쪽 봉우리를 감싸 안은 개나리, 진달래, 특히 벚꽃 동산에는 해삼, 멍게 리어커가 늘어서고, 낮술에 얼굴 붉은 상춘객들이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른답니다.
그 뿐이 아니죠, 저 앞에 내려다보이는 월미도마저 우람한 벚꽃더미로 두둥실 떠올라서 그야말로 봄 축제가 극에 달하지요. 이 자유공원의 방만한 자유가 꽃과 함께 활짝 피어나는 거죠.
이어, 봄꽃이 지고 새 잎이 돋아나면 공원은 분위기가 차분해 지면서 쉬기 좋은 장소로 변하지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오고 경치에 취해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춤도 추고, 바다가 열려있는 서쪽 기슭은 가무장처럼 변하지요.
저녁노을이 일품인 석정루(石汀樓)와 연오정(然吾亭)에 노래를 틀어놓고 남녀가 어울려 노래하고 춤도 추고, 윳판에 꽹과리와 장구까지 등장하지요.
또, 동상 주변에는 그늘마다 노인들이 모여 앉아 장기를 두지요. 이제 자유공원은 우리 모두를 위한 자유로운 쉼터요 삶의 활력소를 주는 장소가 되었지요.”
인천의 자유공원.
그 자유공원을 마음껏 산책하며 불어오는 해풍처럼 자유로운 생각에 젖어있는 사람들 머리 위로 외항선의 고동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konas) (출처:인터넷 월간조선 http://monthly.chosun.com/)
전경애(소설가협회 중앙위원·한국예술가곡연합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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