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월맹·북한의 첩자(諜者)들
국정원이 발표한 이번 '386 간첩단' 사건의 특성은 우리 사회의 권부(權府)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386세대에서 간첩이 나왔다는 점이다. 좌파 민족주의와 민중민주주의(PD)·주사파 이론 등으로 화려한 사상적 편력을 거듭해온 386세대는 간첩들이 암약하기에 알맞은 기후조건을 갖춘 토양이었을 것이다.
시중에 널리 알려져있는 보수논객 이상우 교수(한림대 총장)는 최근(10월17일) 한 초청강연에서 "북한은 현재 우리 나라가 75% 적화(赤化)가 된 상황으로 보고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북한은 내년 대선(大選)을 '100% 적화'를 이루는 계기로 삼고있다'고도 했다. 그는 "남한은 정부 청와대 국회 법원 군부 국세청도 조금씩 좌파가 침투하기 시작하여 심각한 위기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면서 "지금은 우리가 깨어서 정신을 차려야 할 때"라고 역설했다.
위기를 맞고도 '위기'로 받아들이지 않고있고, 대남(對南) 적화야욕과 '우리민족끼리'라는 정치적 구호로 이중전략을 구사해온 북한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들어 '심한 안보불감증'을 앓고있는 우리 국민의 안이한 의식을 경고하는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현 정권의 '북한 감싸기'식 안보 대응도 한몫 거들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통보수의 길을 걸어온 김홍도 목사(금란교회)도 '북한의 정권은 사탄의 정권'이라면서 "남한에는 현재 5만 명 이상의 고정간첩이 있으며, 친북사상을 지닌 자들은 400만 명이 넘는다"고 했었다. 이미 3년여 전(2003년 1월 19일) 한 기도회에서의 한 말이다.
그는 당시 "북한은 북미(北美)간 불가침조약을 주장하지만, 이 조약을 맺으면 미군은 철수하라고 나설 것이고, 미군이 철수하고 나면 한국은 적화통일이 될 것"이라며 '주한미군철수 반대론'을 폈다. 그는 당시 전국적으로 확산됐던 촛불시위를 '고정간첩의 책동'으로 결론짓고 "반미감정을 부추기고 성조기를 불태우며 주한미군 철수하라고 외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며 이같이 말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정간첩 5만 명' 설을 접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당시 정통보수주의자들이 품었던 한 가닥 '우려'는 이제 '현실'로 바뀌고있다. 2008년 17,000명의 주한미군 철수가 공식화됐고, 한미연합사가 해체 수순(手順)에 들어갔으며, 한미간의 동맹체제는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가운데 이번에 김승규(金昇圭) 국정원장이 이례적으로 386세대 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관련된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고, 이어 노 대통령은 국민의 여망은 괘념치 않고 국정원의 수장(首長)을 갈아치웠다. 두 차례의 좌파(左派)정권 집권 이후 우리 사회가 겪고있는 충격적인 실상(實相)이 어떤 지경에 와있는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북한의 핵실험 직후 '외교안보라인의 교체'를 요구했던 야당의 요구에는 "전쟁 중에는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는 말로 일축했던 노 대통령은 또 다른 동일한 상황에서는 이처럼 '정치적·편의적으로' 자신의 말을 바꾸었다. 그것은 '정치인의 언변(言辯)'이 될 수는 있을망정 '지도자의 논리와 행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또 다른 보수우파인사 조갑제씨(월간조선)는「대한민국 사회가 경계해야 할 '간첩'의 유형을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①'민족자주'의 이름으로 반미(反美)정서를 부추기고 ②북한동포들을 걱정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북한권력의 안위(安危)를 걱정하느라 안달하며 ③평화를 부르짖으면서 실제로는 한반도의 평화구도 정착을 훼방 놓는 자들 그리고 ④'친일청산' 운운하며 이 나라의 시계를 과거로 되돌리려 하거나 ⑤저질하향 평준화를 획책 ⑥재벌 때려잡자고 하면서 경제를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붙이는 자 등이다.
실제로도 우리 주변에는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며 민족사적 정통성마저 부인하고, 이념적으로 국보법 철폐와 연방제 통일방안을 주장하며, 주한미군의 잘못만 지적(김정일의 만행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철수'를 외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 사회에서 특정성향을 지닌 구성원들- 그것도 젊고 조직화된 세력이 한 사회 전체구성원의 10%를 넘을 경우 공동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행동력이 생긴다고 한다. 그 세력이 친북(親北) 좌익 집단이라면 최초 2%만으로도 파시즘의 집요함으로 파고들어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 1917년 10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당시의 상황이 그 전례가 될 것이다.
냉전시대 우리와 같은 분단국가였던 독일(獨逸)과 월남(越南)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통독(統獨) 이전 서독(西獨)에서 활동한 동독의 고정간첩은 3만 명선이었고, 서독 내 동독 첩자는 1만1천여 명이었다. 이들의 활약상은 서독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통독 후 슈타지(=Stasi:동독 국가안전부)의 비밀문서 분석 결과 밝혀진 진상이 그렇다.
당시 동독은 '슈타지'와는 별도로 대(對)서독 정보공작을 위해 HVA(중앙정보본부)라는 담당기구를 두고 서독의 정치인을 매수하여 서독의 주요정책을 동독에 유리하게 이끌거나 재계와 노동계 학계 종교계 학생운동세력 등에 효과적으로 침투하여 그 영역을 확대해나갔다.
동독은 1970년 경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동서독 정상회담을 갖고 양독(兩獨)관계의 물꼬를 튼 지 4년만에 위장간첩 귄터기욤(동독의 현역 육군 대위)을 브란트의 보좌관으로 침투시켰었다. 그는 서독으로 탈출한 것처럼 가장하여 당국의 감시망을 벗어난 후 관계(官界)에 진출할 수 있었다. 74년 4월의 일이다. 빌리 브란트는 결국 이 사건으로 서독 총리직에서 도중하차했다.
서독 역사상 동독정권에 가장 호의적이었던 브란트의 최측근에 간첩을 심어둔 동독의 배신에 브란트는 치를 떨었다. 그뿐이 아니다. 서독의회에는'슈타지의 첩자들'이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의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슈타지는 서독 정치인들을 나치 전력(前歷) 축첩(蓄妾) 부정축재 등과 관련된 약점을 잡아 협박하거나 매수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프락치로 만들었다.
동독 간첩들의 이 같은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동독을 인정해야만 '진보적인 인사' 또는 '진보적인 사고'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서독 지식인사회 분위기도 일조했다. 이점 우리사회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브란트 총리가 취임 초부터 동독에 대해 '접근을 통한 변화'를 기치로 내걸고 동방(東邦)정책으로 동독에 대한 경계를 풀었던 것도 그런 명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의 '햇볕정책' 모델이 바로 이 정책이었을 것이다. 동독이 서독의 관계와 산업계에 프락치를 침투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정책에 힘입은 것이다.
'슈타지'(Stasi)는 직원 94,000명과 비밀 첩보원 174,000명을 둔 거대한 비밀경찰 조직이었다. 사찰대상 인원은 자그만치 6백만명. 전임 독일수상 콜의 의원시절 전화 도청(盜聽)기록(집무실 및 사적공간 포함)만도 7천 페이지에 달했을 정도이다.
월맹(越盟)에 패망하기 이전의 월남(越南)상황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미·월맹 간 파리 종전(終戰) 비밀 협상이 시작되기 한해 전인 1967년 9월3일 월남 대통령 선거에서 명연설의 주인공이었던 쭝딘쥬 역시 월맹측 프락치였다. 그는 당시 11명의 대통령 입후보자 가운데 차점(次點)으로 낙선했었다. 모범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 등 적지 않은 정치인·관료들도 모두 월맹의 프락치였다.
쭝딘쥬는 선거유세에서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남북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고 외쳤었다. 미국 내 반전(反戰)운동의 불을 지필 정도로 설득력을 지닌 메시지였다. 호치민의 베트남 공산당과 인민혁명당에서는 휴전협정 이전부터 공산당 프락치들을 월남 곳곳에 침투시켜나갔던 것이다.
월남공화국 대통령궁을 포함한 정부 각 기관과 군 최고사령부 및 일선 전투단위 부대에까지 베트콩의 조직과 정보망이 거미줄처럼 뻗쳐 국가최고기밀까지도 베트콩과 하노이정권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월남정부의 정치 외교 군사전략은 이들 프락치에 의해 허점이 찔리고말아 결국 베트콩과 월맹군의 대공세에 무너진 것이다.
월남은 군사 쿠데타를 겪을 때마다 정보기관은 형해(形骸)만 남다시피 했다. 그 여파로 대공(對共)전문가들이 대거 쫓겨나고 말아 '월맹 정보' 수집은 물론, 월남 내부에 침투한 공산 프락치 검거에도 무기력함을 드러냈다.
동독의 첩자들은 통독 이전 서독사회 도처에 침투하여 정책 결정을 오도했고, 월남 역시 결국 외적(外敵)이 아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내부의 갈등과 반란을 자초해 붕괴되고 말았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우리는 '북한의 철저한 이중책략'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터득해야 할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konas)
정 준 (코나스 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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