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열린 민족주의'를 지향해야 한다
북한은 대한민국의 연말 대선(大選)을 앞두고 요즈음 남한이 그들과 '동족'이기 때문에 선군(先軍)정치로 보호해주고 있으며, 한반도가 '불바다'가 되지 않도록 구세주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억지 주장을 펴고 있다.
'민족의 정체성'은 여전히 그들이 독점적으로 갖고 있으며, 남한은 북한 덕분에 '민족'으로 존재한다는 논리 못지않는 억지이다. '정상적인 논리의 틀'을 벗어난 궤변이 이처럼 또 다른 궤변으로 이어지고 있다.
'민족' '민족주의'는 무엇이며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고있는가. 이 낱말은 다의적(多義的)인 뜻을 갖고있어 그 풀이가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한국인이 해외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더없이 반가운 것은 피가 같다는 바닥 감정에서에서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처럼 민족국가라고 하면 당연히 '같은 피(血緣)'를 떠올린다. 세계에는 한국처럼 '민족' '민족주의'의 원초적 개념을 '혈연관계'에 두고 있는 국가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피가 같다는 것'은 '한 민족'이기 이전에 '같은 인종(人種)' 의미할 뿐이다.
우리를 더욱 놀랍게 만드는 것은 미국처럼 다(多)인종으로 구성된 나라도 '민족주의'국가로서의 자부심이 강하다는 점이다. 이 지구상에는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국가도 적지 않다. 같은 인종끼리라고 해서 한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미국의 경우 '민족=동족(同族)이 아니라, '민족=국민'이라는 의식이 기저(基底)를 이루고있다. 피(純血주의)와 공통의 과거 유무로 민족의 정체성을 가름하는 한국의 민족주의와는 그 잣대(尺度)가 사뭇 차이가 난다.
미국처럼 '다양한 인종'과 '열린 문화'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에서는 '민족' 또는 '민족주의'는 미래에도 삶의 가치관을 함께 할 운명적인 '문화공동체' 인가 여부가 판정의 기준이 된다. '혈연적 관련성'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단일민족임을 긍지로 삼아 살아온 우리와는 우리의 '민족' 개념이 이처럼 근본적으로 다르다.
미국인에게 혈연적·체질적 특성은 '우연적 요소'일 뿐이다. 속내는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시하는 요소는 '미래사회에서 동일한 가치체계를 갖고 살아갈 공동운명체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종'과 '민족'- 이 두 개념을 혼용하고 있다.
문화적 공통성을 기준으로 하는 '열린 사고(思考)' 관점에서 보자면 오랜 역사를 함께 해오면서 체화(體化)된 공통의 생활양식과 동일 지역 및 집단소속감 등을 주요지표로 하는 문화적 공동운명체 의식이 '민족'의식의 첫 번째 요건이다.
남북한은 비록 한반도라는 지역에서 장기간 언어 풍습 등을 함께 해왔을지언정 지난 60여년간 우리는 역사는 물론, 정치 경제 종교 등 각종 문화에 대한 공유(共有)마저 없었다. 달리 말해 혈연공동체 차원의 역사적 동질성을 지닌 '동족'이지만, 인류사회의 보편적 가치관을 중시하고자 하는 미래지향적 공감대는 공유하고있지 않다.
우리도 이제는 열린 사고(思考) 관점에서 '민족의식'에 대한 고정개념에서 벗어나 시류에 따라 변화하는 동적(動的)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오랜 기간 '정치적 이념'을 달리하여 살 경우 '한 민족'으로서의 정체성(正體性)은 적잖게 희석되고 말 것이다. '생물학적 혈연공동체의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정답(正答)일 수가 없다.
'혈연(血緣)공동체를 중시하는 '너무나 한국적인' 민족의식'에서 탈피하여 '정치적 이념'과 경제생활 문화 등을 함께 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개 형성되는 이념공동체 문화공동체 생활공동체 속에서 우러나는 동류의식을 중시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문화적 동질성'이며 참다운 '민족의식'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외에서 서로 한(韓)민족임을 알아보고 반가움을 나누는 것은 정확히 말해서 단일민족으로서 '같은 인종(人種)' 또는 '동족(同族)'을 알아보는 정서일 뿐, '문화공동체로서의 민족(民族)'의식을 우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多)인종으로 구성된 국가일수록 혈연적 관계보다 '이념적 가치관' 공유를 선행하는 '국민의식'을 존중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미국을 예로 들어보자. 서로 다른 모습을 한 전 세계 인종이 모여 살고 있는 국가가 미국이다. 미국은 지구상의 많은 다른 많은 나라와는 달리, '다(多)인종으로 구성된 나라' '고유한 얼굴이 없는 나라'이다.
미국은 인구 2억 8천만 중에서 게르만족은 6천∼7천만으로 수적으로 가장 많다. 그 다음 두 번째 많은 인종이 5천 수백만을 헤아리는 앵글로색슨이고, 세 번째가 프랑스계통, 네 번째가 동부유럽인이다. 백인들이 1억7∼8천만이며, 나머지는 흑인종 라틴아메리카족 황인종 등이다. '한(韓)민족'도 '미국인'가운데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인종별 인구 비율을 보면 총인구의 약 85%가 유럽인의 피를 이어받은 미국인이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12%로 그 다음가는 인구비율을 차지하고있으며, 스페인계(8%), 아시아-태평양계(1.5%), 미국 인디언들(0.5%)과 기타민족(3%) 순으로 구성되어있다.
대한민국은 전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단순혼혈의 민족국가'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유독 '단일민족' 의식이 강한 것은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 4강(强)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환경에서 외부위기에 슬기롭게 대처하고 약소국으로서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응집력 구축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강대국들은 대체로 핏줄이나 혼혈 같은 것은 따지지 않고 흡수해 버린다. 여러 인종이 뒤섞여 살면서 '도가니(Melting Pot)'로 불리는 미국이나 한(漢)족을 포함하여 모두 55개 다(多)민족으로 구성된 중국 등이 그 예이다. 이것저것 따지는 우리만 유독 '민족적 편협성'을 고집해온 셈이다.
국제정치학에서는 민족을 구성하는 요인으로 7∼8가지를 들고있다. 관습 습관 사상 문화 전통 역사 언어가 민족의 구성요인으로 먼저 나오고 '피(血)'는 맨 마지막에 나온다. 피는 민족의 특성 요인 중에서 '우선하는 요소'가 아니다.
그런 이유로 미국은 '공통의 과거'(common past)가 아닌, 앞으로 엮어나가게 될 공통의 미래(common future)에 민족의 근거를 두고 있다. 미국인들은 비록 과거는 다를지라도 번영된 미래를 함께 할 동류(同類)라는 의식을 갖고 살아간다. 이 점이 미국 스스로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 국가'임을 자임하는 요소인 것이다.
미국은 '미래에 바탕을 둔 미국식 민족주의'를 계속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전쟁 끝난 지 50여 년이 지나 이미 그 가족들도 다 죽고 없는 상황에서도 전쟁터에서 수십 년 전에 전사한 미국 병사들의 뼈를 찾아내고 근엄한 예의를 갖추어 장례식을 치른다. 지금도 북한을 누비며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미군의 유해를 찾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우리는 훙내도 내지 못하는 덕목이다.
미국정부는 '공통의 미래'를 함께 할 '미국식 민족주의' 창달을 위해 그런 일을 지속하고있는 것이다. 미국식 민족주의는 이처럼 혼합된 민족이 모여 살아가면서 새롭게 태동시킨 '미래지향적' 가치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미국은 이처럼 다양한 인종문제와 다양한 문화들을 '미국식 민족주의'로 융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나라이다.
이런 민족주의 의식을 갖고있는 국가와 국민들은 다른 나라에 대해 '배타적'일 수가 없다. 그점이 엄청난 장점이다. 그런 이유로 미국은 세계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상대적으로 '무서움을 덜 주는 나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초(超)강대국 미국에 대들기를 주저하는 나라는 이 지구상에 어디에도 없다. 프랑스 독일 한국 등 웬만한 나라들은 모두 미국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미국이 글로벌 리더십을 갖춘 패권국가일지언정 두려움을 주는 강대국(Fearful Power)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이 아닌, 일본이나 독일 영국 중국 러시아가 미국을 대신했어도 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지금쯤 국가 안보문제로 골머리를 앓고있을 것이다. 미국만이 갖고있는 강점(强點)은 독일 일본 영국처럼 '하나의 피' '하나의 종족'으로 구성된 강대국이 아닌 데서 유래한다. 미국은 '엄청난 힘의 실체(實體)이면서 '점잖고 질서를 중시하는 패권(覇權)국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미국이 21세기에도 여전히 글로벌 리더 역을 맡고 있음은 지극히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북한의 '이기적인 민족주의' 정치게임의 희생자가 되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북한의 핵 보유마저 미국 탓으로 돌리면서 반미(反美)를 생업으로 삼고있는 현 정권 내부의 극렬한 친북 좌파들- 달리 말해 '평양(平壤) 해바라기'들이 대오각성해야 할 것은 북한당국이 남한 울거먹기용으로 내놓은 '민족공조'의 허구성을 깨닫는 일일 것이다. (konas)
정 준 (코나스 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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