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諸問題
1. 통일은 과연 ‘절대가치’인가?
현대사회를 가치혼돈의 시대라고 진단하는 사회학자들이 적지 않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가족의 가치를 포함한 범人倫的 가치의 혼란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심지어는 “진리도 변할 수 있다”는 세상이다.
우리사회가 지금 겪고 있는 가치혼돈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 중의 하나가 ‘과잉’ 아니면 ‘결핍’현상이다. 너무 넘치거나 아니면 턱없이 모자라서, 도대체 중간 또는 중용(golden means)이 없다. 안정된 선진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중간이 두텁고, 소위 중간층이 사회의 중심을 든든하게 지켜준다. 그러나 우리는 노사문제, 이념문제, 富를 포함한 사회 公共財 전반에 걸쳐서 양극화 현상이 심화일로를 걷고 있다.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우려되는 가치혼돈은 ‘통일과잉’ 현상이다. 통일은 분명 민족의 최대 이익이자 최대 목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가치는 아니다. 절대가치는 진정한 자유와 인권, 생존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자유민주주의의 확립과 안보의 담보 그 자체이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 하는 동요를 부를 때 한민족 누구나 콧등이 시큰하고 가슴이 메어 올라오는 느낌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통일지상주의 또는 환상적 통일론에 빠져 ‘통일과잉’의 함정에 빠질 때, 자칫하면 우리는 공산통일 또는 중립화 통일도 가능하다는 오류로 비약할 수 있다. 그리되면 ‘절대가치’는 깨지고 만다.
‘통일과잉’과 더불어 또 하나 경계해야 할 대상은 ‘민족과잉’ 현상이다. 민족주의는 국력의 결집에 순기능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이것도 과잉되면 국제사회에 불필요한 긴장을 야기하고 주변국의 반발을 일으켜 통일의 길에 역작용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민족과잉’ 현상 때문에 겪는 안보상의 가장 큰 폐해는 ‘민족공조’라는 이름의 ‘트로이 목마’이다. 북한은 고도한 통일전선전략의 일환으로 우리의 ‘민족과잉’ 정서를 교묘히 자극하는 ‘민족공조’를 앞세워 한미동맹에 쐐기를 박고 남남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민족공조’란 신기루와 같은 허구의 개념이다. 우선 민족공조가 정당성과 정통성을 가지려면 남북 당국자들이 각각 남북의 주민들을 대표하는 ‘민족적 대표성’을 가져야 되는데, 북한에는 그런 대표성이 애당초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민족공조’가 허구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역사상 상이한 이념과 대결적 체제를 가진 분단 민족 사이에 공조란 없었다는 사실이다. 가장 대표적 사례인 중국의 國共合作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새삼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민족과잉’ㆍ‘민족공조’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통계자료 하나를 인용해보겠다. 광복 60주년을 기념하여 2005년 8월 조선일보가 한국 갤럽에 의뢰하여 우리나라 신세대(16~25세)의 민족주의 성향을 조사한 바 있다. 그중 한 문항이 “美ㆍ北 전쟁 시 어느 편을 들겠나?”였는데, 북한편이 66%였다. 세부적으로 북한편:미국편의 비율을 보면, 남자는 50.3%:41.0%, 여자는 78.0%:18.1%, 병역필자는 28.6%:60.0%, 병역미필자/면제자는 65.4%:28.0%였다.
이러한 지경이니 “선군정치의 덕을 남조선이 보고 있다”라든가, “핵무기는 남쪽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라는 북한의 터무니없는 소리에 머리를 끄덕이거나 앵무새처럼 따라서 뇌는 부류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은 현실이다. 이처럼 ‘통일과잉’ㆍ‘민족과잉’이 자유민주주의와 안보라는 절대가치를 흔들고 있는 가치혼돈 현상을 바로 잡지 않으면 우리에게 진정 바람직한 통일조국은 공염불이 되고 말 것이다.
2. 왜 통일해야 하는가?
이 물음은 우문인 것 같지만, 그래도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몇 갈래로 답을 내어 보아야 한다. 첫째, 우리의 통일에는 민족사적 당위가 있다. 한민족은 오랜 세월 문화, 언어, 전통, 의식 등 共有의 역사를 지녀 온 동일집단이므로 재통합은 역사적 의의를 띤 자연스럽고 당연한 과업이다. 둘째, 분단은 과도한 대립ㆍ경쟁ㆍ희생 등 ‘분단비용’의 출혈과 아울러 민족역량의 낭비를 초래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분단은 ‘전쟁의 공포’를 늘 수반하고 있다. 혹자는 분단된 상태에서도 평화와 안정이 달성 가능하다고 여길 수 있겠으나, 분단 상태에서의 평화와 안정이란 근본적으로 임시적일 뿐이다. 셋째, 통일은 민족 전체의 발전과 번영, 민족구성원 개개인의 자유ㆍ인권ㆍ삶의 질 향상, 이산가족의 해소 등 민족적 이익의 창발적 극대화를 위해 필요하다. 끝으로, 통일한국은 동북아의 평화ㆍ안정은 물론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 줄 것이다.
3. 어떤 통일이어야 하는가?
“어떤 통일?”의 답은 “왜 통일?”의 답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통일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가치들이 구현될 수 있는가를 따져보아야 한다.
① 정치적ㆍ정신적ㆍ종교적 자유가 보장될 수 있는가?
② 인간의 존엄성 등 인권을 비롯한 인간의 기본권이 보장될 수 있는가?
③ 개인의 창의와 발전이 보장되며, 그것을 통해 자기실현과 경제적 풍요를 포함한 전반적인 삶의 질이 향상될 보장이 있는가?
④ 국제사회에서의 인정과 지위ㆍ역할 등이 보장될 수 있는가?
이러한 가치들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자본주의에 의한 통일이 되어야 한다. 공산주의와 통제경제체제에 의한 통일이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이론이나 명분보다도 역사적 경험이나 교훈에서 도출되는 결론이다. 대한민국과 북한이 걸어 온 과거 반세기의 명암과 오늘날의 실정이 보여주는 것보다 더 웅변적인 논리가 있겠는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자본주의가 물론 완벽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인류사회가 이제까지 창안해 온 이념과 체제 가운데서 그래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자본주의야말로 건강한 경쟁을 통한 창의와 능률을 보장함으로써 자유와 번영을 가장 잘 달성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단, 경쟁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기게 되는 약자를 배려하는 ‘인간의 얼굴을 띤 자본주의’만이 민족의 공동운명체를 끌고 갈 수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4. 통일의 기회는 언제쯤 도래할까?
역사는 강물처럼 흐른다. 우리는 지금 민족사의 흐름에서 일대 전환기에 처해 있다. 지금부터 10~20년이 민족재통합과 민족도약의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파란의 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기로에 우리가 지금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먼저 2020년을 내다보면서 향후 10~20년을 전망해보기로 하겠다. 2004년에 발표된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C)의 「2020 프로젝트 보고서」는 2020년 무렵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예측하고 있다. 미국의 세계적 패권이 더욱 공고화되는 ‘Pax Americana’시대가 도래하는 가운데, 중국과 인도의 급부상(소위 CHINDIA 대세론)으로 세계질서는 서구일변도를 탈피할 것이다. 또한 세계화의 가속화 속에서도 이에 도전하는 반세계화의 국제적 이념운동 역시 더욱 드세질 것이며, 인류는 대량살상무기(WMD)의 확산 위협이 한층 증대된 상황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특히 2020년 무렵 동북아는 세계경제의 새로운 중심축으로 떠오를 것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10년 샹하이 엑스포를 거치면서 중국의 총 경제규모는 세계 제2위에 도달할 것이며, 한편 개혁ㆍ개방의 가속화와 경제발전 지속의 결과 ‘민주화 열병’에도 서서히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일본은 세계 제3위 정도의 경제력을 유지할 것이고, 희망컨대 한국도 제8위쯤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다.
필자 개인 생각으로는 대략 2020년을 전후하여 우리에게 한번쯤 통일의 기회가 도래하리라 예측해본다. 중국의 넘쳐나는 경제력과 개혁ㆍ개방의 파도, 중국發 ‘민주화 열병’의 확산, 그리고 태평양 쪽(한ㆍ미ㆍ일)으로부터의 자유민주주의 물결에 의하여 북한의 고립적ㆍ폐쇄적 억압과 우민화 정책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든 힘의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아울러 2020년경 김정일이 생존할 경우 78세(후계자로 지목되는 차남 김정철은 39세)에 달하여 북한은 3代째 권력 세습 여부를 놓고 리더십위기(leadership crisis)에 봉착할 것이다. 이와 같은 대내외의 압력에 봉착하여 어쩌면 북한에는 내폭(implosion)에 의한 위기상황이 초래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될 경우, 우리에게는 통일의 기회가 올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veto power’가 증대된 중국이 미국을 의식하지 않고(또는 미국의 암묵적 동의 하에―북한의 WMD를 투명하게 제거하겠다는 중국의 약속이 있을 경우, 그리고 한ㆍ미 결속이 상당히 이완되어 상호 불신이 고조되어 있을 경우) 북한 정국에 직ㆍ간접적으로 개입하여 우리의 통일기회를 무산시킬 수도 있다. 우리는 美 국방부의 “2006 중국 군사력 보고서”가 북한 유사시 중국의 군사개입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통일의 방식은 ‘흡수통일’이 될 것이다. 상반된 이념과 체제를 지닌 남북한이 통합을 하게 될 경우, 결국 자유민주주의 통일이냐 아니면 공산주의 통일이냐의 종착점이 있을 뿐, 그 중간의 모습이 있다 한들 그것은 양단의 어느 종착점으로 가는 과도적 단계일 따름이다. 문제는 흡수의 과정에서 유혈이 낭자한가 아니면 無血 내지 小血인가의 차이일 것이다. 後者의 경우가 되어야만 한다는 점에서도 자유민주주의 통일의 당위성이 선다. 우리 역사에서 후삼국시대 말기에 고려가 신라를 흡수하듯 하는 결말을 대한민국의 깃발 아래에서 꿈꾸어본다.(konas)
허남성 (국방대학교 교수,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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