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문제- 미국은 주사위를 던지는가
외신이 전하는 크리스토퍼 힐 미국측 북핵 6자회담 대표의 표정에는 희색(喜色)이 가득하다. 북한측 대표 김계관(金桂冠)의 얼굴에서도 역시 그런 기미를 읽을 수 있다. 이 모두가 지난 1월 16∼18일 3일간 두 사람이 베를린에서 회동한 후의 일이다.
북핵 6자회담 미·북 두 대표의 변화된 모습은 우리에게 몇 가지 메시지를 던져준다.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는 6자회담 틀 속에서만 있을 수 있을 뿐, '양자(兩者)만의 회담'은 하지 않겠다고 했던 태도를 바꾸어 만났다는 점이다. 평소 서로 인사도 건네지 않던 '힐과 김계관- 단 둘만의 전례 없던 회동'이 이뤄진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또 다른 변화 한 가지는 미·북 양측이 이번 6자회담을 2월 8일부터 3일간 사전에 못박아 놓고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핵문제가 3일만에 해법(解法)이 나올 수 없는 사안인데도 이 같은 사전 스케줄 아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사실상 이미 '일정한 내용'을 합의하고서 그 내용물을 포장하는 마무리작업만을 남겨두고 있음을 뜻한다.
이 같은 추정은 이번 회담에서 핵문제가 잘 풀릴 수밖에 없다고 한 '힐의 언변(言辯)'이 실질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그가 6자회담의 미측 대표로 나선 이후 이처럼 거의 단정적으로 낙관적인 태도를 보인 적은 없었다.
대한민국이 고뇌해야 할 명제(命題)는 바로 이 점에 도사리고 있다. 평소 이른바 '벼랑끝 전술'을 상수(常數)로 사용해온 북한측 태도로 미루어 이미 미국과 '모종(某種)의 합의'에 도달했다는 것은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상당한 양보를 획득했음을 의미한다. 북한은 핵문제에 있어서 미국이 바라는 대로 쉽게 양보할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려하는 가장 큰 폐해(弊害)는 미국이 북한에 평화협정 체결과 금융제재 해제를 약속해주고서 북핵부문에서 실속 없는 양보를 대가로 받아내는 경우일 것이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작년 11월 18일 하노이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철폐하고, 핵 야망을 포기하면 한국전 공식 종료를 선언할 수 있다"고 표명한 바 있어 그런 우려를 지울 수 없다.
북한은 바로 이 같은 미국의 열망에 착안하여 향후 핵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신뢰할 수 없는 모호한 내용'의 약속을 담보로 '평화협정 체결'과 '광범위한 경제원조' 및 '그들의 (폭정)체제 인정'과 같은 혜택을 반대급부로 이끌어내고자 '묘수(妙手) 풀이'에 착수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북한이 휴전협정 2년이 경과한 지난 1955년 이후 '평화협정체제로의 전환'을 무수히 주장해왔지만, 그 모두가 주한미군 철수를 전제로 한 적화(赤化)통일전략 차원의 제의였음을 기억하고 있다.
문제는 북한측의 이 같은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북한은 한반도 비(非)핵화선언(1991년12월)과 북미 제네바기본합의서(1994년)에 서명한 당사국이면서도 핵 개발을 강행했고, 동해안에 잠수함을 침투시켰으며(1998년 12월), 서해의 NLL을 침범하여 연평해전(海戰)을 도발(1999년6월15일)했었다.
'북한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한반도 안보'의 향방을 가름하는 중대결정이 친북좌파(左派)는 반길지언정 당사국인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의 염원이 무시된 채 진척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 수가 없다.
북한은 그동안 미국의 '북한침공'과 '고립전략'을 분쇄한다는 명분 아래 핵 개발 논리의 정당화를 위해 억지를 부려왔지만, 자유진영 입장에서 보자면 그동안 미국이 견지해온 일련의 대북(對北)정책은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는 국가의 모습을 보이지 않아 자초한 결과였다.
미국이 평화협정 체결과 관련하여 북한의 요구를 수용할 경우 그간의 북핵문제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북한의 완전한 핵 폐기를 확인해야 하는 쉽지 않은 과제와 뒤이어 필연적으로 제기될 주한미군 철수 등 난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향후 북한의 행동을 몇 갈래로 구분하여 예측해 보자. 가장 바람직한 것은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핵무기를 완전 해체하는 경우이다. 그럴 경우 한국과 미국은 약속대로 한국전 종료를 선언하고, 북미(北美) 양자는 평화협정 체결에 이어 북미수교의 단계를 밟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한반도 안정화에 기여하게 될 최선의 방법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주한미군 문제는 '미해결의 장'으로 남는다.
이와는 달리 북한이 핵 포기 협상을 통해 종전선언을 보장받고도 한미동맹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 등을 계속 요구하면서 그들의 핵을 그대로 유지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이 경우 한국은 미국이라는 동맹을 잃어버리고 북한 핵(核)의 인질이 되어 매사 북한 페이스에 끌려 다녀야 한다. 우리가 가장 우려해야 하는 상황은 바로 이 같은 패착(敗着)이다.
마지막으로 북한은 김정일 체제 결사옹위(擁衛)를 위해 핵을 끝내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은 무위(無爲)로 돌아가고, 한반도의 긴장상태는 가일층 고조될 것이다.
북한은 그들에게 가장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자 고심하면서도, 핵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1955년부터 중반부터 지금까지 핵 개발에 공을 들여왔던 김정일이 '핵 보유국' 공인이 내다뵈는 시점에서 '핵 포기' 결단을 내린다는 것은 선군(先軍)정치와 광폭정치의 종식을 의미한다.
이 같은 환경변화를 북한 입장에서 풀이해 볼 경우 그것은 그들의 이념과 체제를 담보해야 하는 작업이며, 군 내부의 집단 반발을 불러 올 수 있는 사안이다. 김정일로서는 내부로부터 '국가차원의 위기'가 불거질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북한이 협상의 완전타결을 빌미로 시간을 벌려고 할 경우, 체제 변화 없이 그들의 생존 기간은 협상시간 만큼이나 연장될 것이다. 따라서 평화협정 체결문제는 6자회담 이상으로 지루한 게임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은 이처럼 협상시한을 끌면서 반대급부(경제적 혜택)만을 최대한 챙기려들 공산이 크다.
우리로서는 북한의 의도에 끌려 다니기보다는 '확실한 핵 폐기'를 일관되게 주장하되, 한미동맹을 지속적이고도 안정적으로 관리해 나가는데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한미동맹 관계가 급속하게 재조정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부시 정권이 이라크사태 악화와 더욱 협소해진 의회 입지 및 집권2기 시한에 쫓겨 악수(惡手)를 두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오는 3월 역사상 최고의 첨단 장비를 선보이는 RSOI(Reception Staging Onward Movement and Integration·전시증원연습) 한미합동 군사훈련이 실시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미국이 명령만 떨어지면 북한을 불과 한 시간 이내에 반격능력이 없도록 만들 수 있다는 능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전략에서 그나마 위로를 받아야 할 것 같다. 이 달 10일 도대체 어떤 내용의 공동발표문이 우리를 맞을 것인가. (konas)
정 준 (코나스 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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