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해상도발에 철저히 대비하라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해상도발(海上挑發)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다. 중요한 것만 살펴보자.
1960~1970년대 우리해군은 북한과 또 다른 전쟁을 치렀다. 북한은 우세한 해상전력을 이용하여 수시로 해상군사분계선인 NLL( Northern Limit Line, 북방한계선)을 침범하였고, 조업 중인 우리어선을 납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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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0월에 무장공비(武裝共匪) 120여명이 3차에 걸쳐 위장어선(僞裝漁船)을 이용하여 경북 울진·삼척지구에 침투했다. 주민에게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해방구 설치’를 시도했다.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양민(良民)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한 이승복 어린이의 입을 대검(大劍)으로 찢고 살해하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蠻行)을 자행(恣行)했다. 소탕작전에서 많은 군인과 경찰이 희생되었다.
이후에도 무장공비와 간첩이 위장어선(간첩선)을 이용하여 계속 침투했다. 이들은 도서주민(島嶼住民)을 학살하고 우리국민을 납치하기까지 하였다.
홍도·선유도 학생 납치사건도 있었다. 1977년 전남 신안군 홍도에서 고교생 이민교(18. 이하 당시 나이)·최승민(16)군, 1978년 전북 군산시 선유도에서 김영남(16), 신안군 홍도에서 이명우(17)·홍건표(17)군이 북한에 납치됐다.
이들은 당시 실종처리됐지만 1997년 탈북자의 증언에 따라 해상으로 납북된 사실이 확인됐다. 이들은 북한에서 대남 공작원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2006.4기준) 북한에 억류중인 납북자는 총458명이다.
1996년 9월 18일 새벽에 북한 상어급잠수함(325톤급) 1척이 강원도 강릉시 남방 정동진 해안암초에 좌초(坐礁)되어있는 것을 지나가던 택시운전사가 발견하고 육군부대에 신고했다. 승조원 20명과 특공대(特攻隊) 6명은 배를 버리고 육상으로 침투했다. 도주(逃走) 초기에 11명이 산 정상(頂上)에서 자살했다. 우리 군(軍)에 의해 9명이 사살되고 1명이 생포(生捕)되었다.
잔당 5명을 소탕하기 위해 상당기간 육상 및 해상에서 작전이 전개되었다. 우리 측 군인과 민간인의 피해도 많았다. 일부는 도주한 것으로 추정(推定)하고 있다. 그들은 국군 및 우리국민으로 철저하게 위장하기 위해 한국군 군복과 조다쉬 청바지, 트라이 내의, 한국제 운동화를 착용하고 M-16 한국제 소총으로 무장했다.
1998년 6월 22일 주간에 북한 유고급잠수정(65톤급) 1척이 강원도 속초 동방해상에 침투하다가 해군에 나포되었다. 어망에 접촉(接觸)되어 기동(機動)이 불가능한 상태로 부상(浮上)한 것을 우리어선이 발견하고 신고한 것이다. 승조원과 특공대는 나포 이전에 전원(全員) 잠수정 내부에서 자폭(自爆)했다.
1998년 11월 20일 야간에 강화도해안에 북한 반잠수정(半潛水艇)이 접근했다. 해병대 초병의 발견으로 침투를 포기하고 물골을 따라 북으로 도주했다.
1998년 12월 17일 자정에 전남 여수 남방 돌산도해안에 반잠수정이 접근했다. 육군 연안초소 TOD(열상 관측장비)에 탐지되었다. 외해(外海)로 도주 중에 초계함의 함포사격으로 익일 아침에 격침되었다. 해군은 1999년 3월 150m 수심에서 반 잠수정(길이 10m)을 인양했다.
두 차례의 반잠수정 침투는 북한의 간교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남북교류와 화해의 상징으로 전 국민의 환호 속에 1998년 11월 18일에 금강산 관광유람선 현대 금강호(28,000톤급)가 동해항을 출항했다. 다음 날에는 봉래호가 북한의 장전항으로 출발했다. 북한의 도발은 모두 우리의 이런 노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999년 6월에 연평해전이 있었다. 6월 7일 이후 북한함정·꽃게어선이 서해 연평도 서방근해 NLL을 연일 월선남하하여 우리 함정과 대치했다. 6월 9일 북한함정이 우리 측 고속정에 충돌공격(Ramming)하여 아측(我側)이 선체에 손상을 입었다. 6월 11일 우리 고속정이 북한함정의 함미(艦尾)에 충돌공격을 감행하여 손상을 입혔다.
6월 15일 오전에 북한함정의 기습공격으로 해상교전이 발생했다. 그러나 우리의 일방적인 승리로 종료되었다. 보도에 의하면 북한 피해는 어뢰정1척 침몰, 경비함1척 반 침몰, 기타5척 파괴, 사망자 30명, 부상자 70여명이었다. 반면 우리 피해는 초계함1척 기관실 피격, 고속정1척 피격, 경상자 9명으로 경미했다.
북한은 2000년 3월에 우리의 서북도서(西北島嶼) 주위에 ‘서해 5개 섬 통항구역’을 일방적으로 획정(劃定)하고 선포했다. 그들은 기존의 NLL은 무효라고 주장하고, 우리의 우도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해상경계선을 그었다.
백령도서군과 연평도서군은 그들의 영해 내에 있는 도서라고 우긴다. 우리선박이 항해할 수 있도록 항로를 만들어 이를 그들이 허가한다는 억지주장도 했다. 정부는 즉각 이를 받아드릴 수 없다고 강력히 반박했다.
북한상선 10여척이 2001년 6월 15일부터 1주일간 우리의 영해와 제주해협을 마음껏 유린했다. 제주해협을 통과하면서 ‘김정일이 개척한 항로’라고 자랑도 했다. 여론이 잠잠해지자 ‘남북해운합의’란 미명아래 북한의 요구대로 슬그머니 이 항로를 북한상선에게 내어주었다.
서해교전은 2002년 6월 29일 오전에 서해 연평도 서방해상에서 일어났다. 북한의 등산곶 경비정(PCF-684, 200톤급)이 NLL을 3마일(5.5km) 월선 남하했다. 북한경비정은 남하를 저지하던 우리 고속정(PKM-357)정을 지근거리(至近距離)에서 전포(85mm주포 포함)로 기습공격했다.
우리 357정은 침몰되고, 북한 684정은 화염에 휩싸여 동료함(PCS-388)에 의해 예인(曳引)되어 북상했다. 684경비정의 피해도 상당히 많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승조원 28명중 고속정 정장(艇長)을 포함하여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당했다. 교전이 일어난 이날은 2002년 한·일 월드컵(축구)에서 준결승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서해교전의 등산곶 684경비정은 장기간 수리 후 2004년 7월 14일 또 다른 도발을 위해 NLL을 월선하여 남하했다. 이번에는 남북해군 간 1개월 전에 설정된 통신망을 교묘히 이용해 자기를 ‘중국어선’이라고 속이는 위장송신(僞裝送信)을 하면서 우리함정을 기습공격하기 위해 접근했다. 우리해군은 이에 속지 않고 경고사격으로 적(敵)을 퇴거하고 NLL을 지켰다.
2006년 3월 제3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이 열렸다. 우리는 ‘남북 서해 해군부대 간 직통전화 설치,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 및 도로의 안전통행을 위한 군사적 보장합의서 체결, 제2차 국방장관 회담개최 문제’를 의제로 제안했다. 그러나 북한은 서해상 충돌방지를 위한 근원적 조치를 먼저 합의해야 한다면서 ‘NLL의 재조정 문제’를 들고 나왔다. 회의는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이렇게 북한은 휴전이후 줄기차게 NLL무실화(無實化)를 기도(企圖)하고 있는 것이다.
서해교전에서 침몰한 357고속정을 평택기지에서 전쟁기념관으로 옮기자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이전하여 안보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리고 조국을 지키다가 장렬히 산화한 영웅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납북되어 오랜 세월 고통 받고 있는 전우(戰友)와 국민의 송환을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한다.
우리국민은 ‘NLL’과 우리의 ‘바다영토’에 대한 어떠한 협상도 국가를 적(敵)에게 팔아넘기는 매국노(賣國奴)의 행위임을 명심하고, 이를 철저히 사전에 분쇄해야 할 것이다.
3월부터 서해에서 꽃게어장이 형성된다. 남북한 어선의 NLL근해 조업으로 북한의 해상도발이 예상된다. 중국어선도 대거 몰려온다. 우리해군과 해경은 이에 만반의 준비를 다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또다시 도발해올 경우 이번에는 철저한 응징(膺懲)으로 적(敵)의 도발의지(挑發意志) 자체를 말살(抹殺)해야 할 것이다. (konas)
김 성만(前 해군작전사령관·예비역 해군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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