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자회담 2·13 합의의 성과와 과제
2월 8일-13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5차 6자회담 3단계 회담은 북한의 '핵폐쇄’와 '대북 에너지 지원’을 골자로 하는 합의문을 도출하고 폐막되었다. 지난 1월 16-18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 간의 베를린 회동이 이번 핵타결의 예고편이었다면, 미국 정부의 대북정책 결정라인의 교체는 베를린 회동의 서막이었다. 네오콘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가 온건파 로버트 게이츠로 그리고 로버트 졸릭 국무부 부장관 자리에 비둘기파로 알려진 존 네그로폰테가 내정되는 순간 워싱턴의 대북정책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예고되었었다. 베를린 회동 이후 미·북 간에는 갑작스러운 온난기류가 형성되었고, 이번 합의는 그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다.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2·13 핵타결은 ‘감동받을’ 수준은 못되지만 의미있는 재출발로서는 손색이 없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국제 비확산체제의 관리자로서 이란 핵문제와 북핵 문제를 한꺼번에 처리해야 하는 미국의 입장에서도 발등의 불을 끈 셈이다. 하지만 '지뢰밭’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한반도 비핵화에 핵심적인 사항이면서도 누락된 것이 많고,
향후 후속협상 과정에서 이견충돌이 야기될 수 있는 부분도 적지 않으며, 남겨진 과제들도 막중하다. 이러한 때에 한국으로서는 성급한 낙관론에 빠지기보다는 북핵의 완전한 해체까지 길고 힘든 여정이 남아 있음을 의식하면서 신중한 자세로 북한의 합의 이행여부를 검증하는 것이 필요하다.
합의문의 주요내용
총 일곱 개 조항과 합의의사록으로 구성된 합의문은 북한이 취해야 할 비핵화 조치와 여타국들이 취해야 할 상응조치를 구분하고 있으며, 시기적으로는 초기에 이행해야 할 조치들과 추후에 이행해야 할 조치들을 명시하고 있다. 북한이 60일 이내 취해야 할 조치로는 영변 핵시설 폐쇄shutdown)·봉인(sealing), IAEA와의 합의에 따라 사찰요원 복귀(Ⅱ-1)
이며, 이 기간 중 여타국들이 취해야 할 상응조치로는 관계정상화를 위한 북 미간 및 북 일간 대화, 테러지원국 명단 해제 및 대적성국교역법 적용 종료를 위한 조치 진전, 중유 5만톤 상당 긴급 에너지 지원 개시(Ⅱ-3,4,5) 등이 있다. 북한이 취해야 할 후속조치로는 모든 핵프로그램에 대한 완전한 신고, 흑연감속로 및 재처리시설을 포함하는 모든 현존 핵시설 불능화(disabling)(Ⅳ) 등이 있으며, 상응조치로는 불능화 단계 기간 중 누계 중유 100만톤 상당 경제·에너지 제공(Ⅳ)이 적시되어 있다. 물론 이는 북한이 ‘불능화’를 넘어 ‘폐기’ 단계에 돌입하면 더 많은 반대급부를 제공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합의의사록에는 일본을 제외한 4개국이 ‘평등과 형평’의 원칙에 기초하여 대북지원 참여한다고 적
고 있다.
이에 더하여 합의문은 ‘한반도 비핵화,’‘북·미관계 정상화,’ ‘북·일관계 정상화,’‘경제·에너지 협력,’‘동북아 평화·안보 체제’ 등 5개 실무그룹을 개최하도록 규정하고 하고 있으며(Ⅲ), 장관급회담의 신속한 개최(Ⅴ), 별도 포럼에서의 한반도 항구적 평화체제 협상
(Ⅵ), 2007년 3월 19일 제6차 6자회담 개최(Ⅶ) 등을 명시하고 있다.
성과 및 의의
2월 13일 베이징 기자회견에서 천영우 한국측 수석대표가 밝혔듯이 이번 합의는 북핵 해결의 원칙과 방향을 밝혔던 2005년 9·19 공동발표 이후 17개월만에 핵해결을 위한 하나의 이정표를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9·19 공동발표문이 정치적 구속력만을 가지는 공약인데 비해 이번 합의가 일정한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문서라는 점도 일단 평가받을만 하
며, 북한이 ‘불능화’ 단계를 조속히 완료할수록 더 빨리 반대급부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한 ‘성과급’ 장치도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00만톤 상당 경제·에너지 제공”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중유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대북지원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도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이점이 있을 수 있다. “200만kw 대북 송전은 북한의 비핵화 완료 후에 거론해야 할 사안”으로 못박았다는 천 수석대표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또한 평가받을만 하다.
무엇보다도 한국에게 있어 이번 합의는 두 가지의 큰 의미를 가진다.
첫째, 북한의 핵활동을 제약하는 것은 한국 안보에 적지 않은 이익이 된다. 2003년초 핵무기비확산조약(NPT) 탈퇴 후 북한이 사실상 아무런 제약없이 플루토늄의 추가생산 및 핵무기 제조에 임해왔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핵폐쇄’의 안보적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둘째, 이번 합의는 2006년 10·9 핵실험 이후 냉각되었던 남북관계에 숨통을 트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문제점 및 남겨진 과제
그럼에도 이번 합의에는 많은 것이 누락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는 비핵화의 핵심사안들도 포함되어 있다. 북한이 이미 보유한 것으로 공언한 핵무기와 플루토늄의 행방을 규명하지 않았고, 북한이 어딘가에서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우라늄 농축에 대한 조항도 없으며, 함경북도 길주군의 핵실험 시설에 대한 언급도 생략되어 있다. 북한이 합의를 기만하기로 작정한다면 이번 합의로 조성된 우호적인 분위기를 틈타 기보유 중인 플루토늄으로 새로운 핵무기를 만들거나 핵무기의 소형화 또는 탑재능력 개발에 시간을 투자할 수도 있다. 그런 식이라면 이번 합의가 북한의 핵개발 일정에 시간적 손실이 될 여지도 크게 줄어든다. 이와 함께, 이번 합의는 북한의 NPT 복귀 및 사찰협정 체결에 관한 의무조항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제2조 1항의 “IAEA와의 합의에 따른 사찰요원 복귀”는 말 그대로 북한과 IAEA 간에 합의가 이루어져야만 사찰관이 복귀 한다는 뜻이며, 사찰이 이루어지더라도 이는 2·13 합의가 이행되는지를 검증하는 것일 뿐 NPT 회원국으로서 받는 핵사찰과는 무관하다. 1994년 제네바 핵합의 이후의 상황을 회고할 때 북한과 IAEA의 협상이 순탄할 것으로 단정하기는 무척 어렵다.
미·북간 의견 충돌이 우려되는 대목들도 많다. 예를 들어, ‘폐쇄’, ‘불능화’ 등이 의미하는 조치사항과 절차에 대한 구체적 후속합의가 없다면 각각 아전인수적 해석을 내세울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북한이 핵폐쇄를 언제든 다시 올릴 수 있는 셔터문을 내리는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면 후속협상의 전도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핵폐기 전체 일정에 관한 개념에 있어 미국과 북한은 여전히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미국은 모든 과정을 완전한 핵폐기를 위한 연결된 과정으로 보고 각 절차들이 신속하게 이행되기를 희망하지만 북한은 각 단계들을 독립적인 것으로 보고 매 단계마다 최대한의 반대급부를 얻어내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할 때 앞으로 남은 과제들은 결코 만만하지 않으며, 합의의 성공적인 이행을 위해서는 북한의 성실한 자세와 후속 합의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에 더하여 한국에게는 대북지원에 있어서의 역할을 정하고 대북지원의 원칙과 속도를 조정해야 하는 과제가 남는다. 합의의사록에서 명시하고 있는 “평등과 형평의 원칙에 기초한 대북지원 참여”는 그 자체로 불분명한 측면이 있으며, 그나마 일본은 “납치문제 해결 이전 대북지원 불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은 그 동안 미·일 양국의 대북압박 정책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중국과 함께 유화적인 대북자세를 견지해왔기 때문에 더 많은 대북지원을 요구받을 개연성이 있는데다 과도한 대북지원은 국내의 반발여론을 촉발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로서는 적정선을 찾아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한국에는 이번 2·13 핵합의가 한국의 국내정치에 개입하려는 북한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성급한 낙관론을 경계한다
이번 핵합의는 적지 않은 의의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북한의 ‘전략적 변화’를 언급하는 것은 성급하다. 미국이 북한 체제를 불용하는 기본시각을 바꾼 것으로 보기도 어렵고, 북한이 기존의 핵보유 집착이나 대남전략을 포기한 것으로 단정하기도 이르다. 때문에 임기 2년 미만을 남겨놓고 북핵 문제 해결에 가시적 성과를 생산해야 하는 부시 행정부의 초조감과 가중되는 고립과 경제난이 체제 불복종을 촉발할 수 있음을 우려하는 북한의 체제 불안감이 합작한 ‘전술적 타결’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핵폐쇄’ 합의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핵폐기’는 별개의 과제로 남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일부 미국인들은 까다로운 협상상대를 ‘검은 물고기(black-fish)’에 비유한다. 이 물고기는 좀처럼 낚시에 걸려들지 않으며 번번이 미끼만 따먹는 것으로 유명하다. 낚시에 걸리면 물속 바위에 낚시줄을 칭칭 감아 줄을 끊어버리고 도망갈만큼 영리한 고기라고 한다. 평양정부와 핵협상을 벌이는 것은 어쩌면 검은 물고기를 낚시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이번 합의가 의미있는 진전임에도 불구하고 경계심을 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한국으로서는 주목해야 할 관전 포인트들이 무수하게 남아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성실히 이행할 것인가, 북한이 가진 핵무기나 플루토늄의 행방을 규명할 수 있는가, 우라늄 농축활동을 규명할 수 있는가, 불능화가 재가동이 불가능한 돌이킬 수 없는 조치인가. 지켜보아야 할 것들은 수두룩하며, 한국으로서는 6자회담이 후속합의들을 통해 시비거리를 제거할 수 있도록 기여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이며, 인내와 성의를 가지고 일본의 대북지원 동참을 끌어내는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는 것도 당면한 과제이다. 대북지원 문제도 그렇다. 단번에 대규모 대북지원을 재개하기보다는 적어도 60일 간 북한의 초기이행을 지켜본 후 지원의 원칙과 속도를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무엇보다도 과거 「남북한 비핵화 공동선언(1992)」이나 「제네바 핵합의(1994)」때 처럼 성급한 낙관론에 빠져 축배부터 드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북핵의 완전한 폐기·해체까지는 멀고 험난한 여정이 남아 있다.(konas)
김태우(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atomkim@kida.re.kr)
출처:K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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