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北관계 변화기류- '자중지란'은 안 된다
'베이징 2·13 북핵 합의' 후 어느덧 2개월이 가까워 간다. 이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미(美)·북(北)간에는 사전에 암묵적인 교감이 있었기라도 하듯이 양측의 협상은 초(超)스피드로 움직였다. 이로 인해 북한 핵문제와 한반도 안보를 둘러싼 정치기류에는 봇물 터지듯 한 변화의 움직임이 있었다.
부시 행정부의 이 같은 변신은 '북한의 핵실험(2006년 10월)' '공화당의 중간선거 패배(11월)' '이라크전쟁의 돌파 시도 결정(12월)' 과정을 거치면서 생긴 일이다. 이미 핵실험이 중단된 영변(寧邊) 원자로 동결 정도의 성과를 얻는 대가로 부시 대통령은 "너무나 쉽게 원칙을 내던졌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북핵문제가 나올 때마다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폐기· 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를 강조했던 미국으로서는 이제 이 용어를 박물관에 보내야할는지도 모를 정도로 상황은 많이 변했다. 혼돈스러울 수밖에 없는 기류임은 분명하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3월 초 미국 뉴욕에서 크리스토퍼 힐 미(美) 국무부 차관보를 만났을 때 "우리(북한)를 인도처럼 대우해달라"고 요구했었다고 외신이 뒤늦게 전하고 있다. 북한은 NPT(핵확산금지조약) 가입을 거부하고 핵 개발에 성공한 인도를 선례 삼아 그들의 핵보유를 공인받고싶었던 것 같다. 인도는 30년 갈등 끝에 작년 미국과 핵 협력협정에 서명했었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 역시 뉴욕에서 관계 정상화 1차 회의를 끝내고 "북한이 전략적 결정을 내렸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고농축우라늄(HEU) 문제의 해결 필요성을 인정했고, 연락사무소 설치 없이 곧바로 수교(修交)로 가자고 제의했다"고 밝혔다. 북한이 미국과의 수교(修交)를 쫓기듯 서두는 이유는 뭘까.
평화체제 정착에 있어서도 북한은 '선(先)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고 있다. '비핵화 완료→평화협정체결→수교'의 로드맵을 상정하고 있는 미국 입장과는 크게 다르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선 안 되는 미국의 로드맵이다. 북한은 이처럼 제사(祭祀)보다는 제삿밥에만 한눈을 파는 격으로 '핵 폐기'가 아닌, '미북(美北) 수교'에 더 열 올리고 있다.
우리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는 부시 행정부가 정치적 이유로 북한의 '핵 보유'를 용인한 채 '북핵의 확산 및 이전(移轉)방지'에만 초점을 맞추는 미봉책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힐 차관보는 "북-미 관계정상화의 전제는 북의 핵 포기"라고 하면서도 또 다른 자리에서는 북한이 넘으면 안 되는 '레드라인(redline)'을 "핵 물질을 다른 국가나 단체로 이전하는 것"이라고 했었다. 미국의 방침이 '북핵 불용(不容)'에서 '핵 이전(移轉) 불용'으로 후퇴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 만한 발언이다.
미국으로서는 북한의 미사일 공격을 받거나 국제테러집단에 핵 물질이 넘어가지 않는 한 안전에 별 영향이 없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핵을 머리에 이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것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이다. 한반도 평화의 대전제는 비(非)핵화이며, 북핵의 레드라인은 '핵 불용'이어야 한다. 이 원칙에서 후퇴한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란 없다.
서방의 비판세력들은 '2·13 핵 합의'가 어떤 북한인권 문제도 거론하지 않은 점을 들어 "북한이 모호한 말로 핵 포기를 약속하는 대가로 그동안 북한의 행동을 제어해온 모든 지렛대를 포기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이 봇물 같은 변화도 본격적인 담판을 앞둔 '군불 때기'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2·13 핵 합의'를 전후한 수개월간의 변화가 '이벤트성(性)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진다고 해서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정착할 리도 없지만, 어떤 명분으로든 미국이 북한을 쉽게 '테러지원국 지정'에서 해제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은 핵을 그들에게 기적을 안겨다줄 '만병통치약'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도 핵은 그들을 '불량국가'로 낙인한 부시행정부와 네오콘마저 굴복시킨 '요술 방망이'였다. 핵에 맛을 들인 김정일 정권이 핵과 관련하여 백기(白旗)투항을 할 리는 만무하다.
8년간이나 지속되던 제네바합의가 깨졌던 것은 북한의 우라늄 핵개발 의혹 때문이었으며, 9·19공동성명이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휴지조각으로 돌아간 것도 북한의 위폐문제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남한에서 노무현 정권이 국가보안법 폐지와 주한미군 철수문제를 국민 동의 없이 치러낼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여권은 미북간의 해빙무드가 마치 자신들의 공(功)인양 포장하고 그 과실(果實)을 챙기려들고 있다. 여권에서는 북핵을 그냥 두고서라도 미국과 북한이 수교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여진다. 여권 정치인들의 관심은 '북핵 폐기'가 아닌,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아닌가.
그뿐이 아니다. 정통 보수야당마저 "휴전선을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정착을 위해 '평화선'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하겠다"고 정체성이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권의 급진적 대북 접근을 흉내낸 '중심을 잃은 부화뇌동'이 아닐 수 없다.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고있는 야당마저 대북정책 기조를 바꾸겠다는 혼란스러운 양상은 참으로 어이없다.
설령 그것이 대선을 앞두고 '평화' 이슈를 선점하려는 정략이라 할지라도 국민에게는 생사가 걸린 현실의 문제이다. 정통야당이 이리저리 시류에 흔들린다는 것은 국민의 신뢰를 헌신짝처럼 내던진 우매한 자충수(自充手)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북핵 해결과 남북(南北)해빙문제는 조급하게 서둔다고 해서 성취될 수 있는 명제(命題)들이 아니다. 미국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가 이런 말을 했다. "북핵문제 해결은 신뢰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이 주어진 임무를 이행할지 여부의 문제이며, 북한은 신뢰할 수 있는 상대라기보다는, 약속이행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상대"이다. '북한의 실체를 꿰뚫어 본 명언'이다.
우리는 부시의 태도 변화가 그의 대북정책이 그동안 잘 먹혀들지 않았다는 사실 자각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고싶다. 현실적으로는 라이스 장관이 부시로부터 북한을 상대로 유연한 협상 태도의 필요성을 설득하여 허락을 받아낸 '한발 물러선 전술'일 수도 있다. 부시가 북한 정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갑작스럽게 바꾼 것도 아닐 것이고, 북한의 이런저런 협박성 요구를 모두 받아줄 리도 없다. 이른바 '전략의 변화'는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주한미군 감축과 전작권 이양'을 두고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는 과정으로 보는 견해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분명한 사실은 미국이 6·25전쟁 이후 주한미군을 점진적으로 줄여왔다는 것과 한국은 여전히 미국 핵우산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발전을 미국 대외정책의 성공으로 여기는 미국이 그간 공들인 한국을 쉽게 포기할 리는 만무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급선무는 '북한이 핵무기를 되도록 빨리 포기하도록' 미국과 공조하는 일일 뿐, 북한과 '남북공조' '민족공조'를 서두는 일은 아니다. 미북관계가 급진전된다고 해서 한미관계가 흔들려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오히려 미국과 북한간의 협상에 과거처럼 전혀 진전이 없을 경우를 우려해야 한다. 북한이 끝내 핵 포기를 거부한다면 한미 양국은 더욱 공고한 동맹체제로 결속하여 북한의 핵위협을 억제해야 한다. 미국에 대해 변함 없는 신뢰를 갖고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자중지란(自中之亂) 없이 그 결과를 지켜볼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하다. (konas)
정 준 (코나스 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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