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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난사가 "美주류사회에 대한 도전"?

김상일 前한신대 교수, 통일뉴스에 기고 '反美' 부추겨

Written by. 김남균   입력 : 2007-04-24 오전 10:3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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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지니아 총격 참사의 충격이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일부에선 이를 反美주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재 미국 클레어몬트 과정철학연구소 한국초빙교수로 재직중이라는 김상일 前 한신대 교수(철학과)는 23일 통일뉴스에 게재된 글을 통해, 이번 참사를 '미국 주류사회에 대한 한인들의 도전' '노예에서 벗어나는 과정' 등으로 해석하며 "우리가 그 만큼 성장했음"을 의미한다고 풀이했다.

 "'주류사회를 향해 쏜' 조승희…" 라는 제목의 글에서, 김 전 교수는 "한인 유엔 사무총장이 나오고 국제무역 10위권에 들고 OECD 가입국으로서의 위상을 자랑한다. 점점 한국인들이 주류 의식을 느끼기 시작한다는 뜻"이라며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다음 이 번 사건이 왜 터졌는지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주류에 대한 도전은 주류만이 할 수 있다. 노예가 주인의 위상을 넘겨다 보는 순간까지는 노예는 주인에 도전을 하지 못한다. 이를 노예근성이라고 한다"며 "조승희, 그는 8세에 미국에 와 영어도 할 만큼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누나는 연방정부 공무원이라고 한다. 그는 주류 사회에 들어가는 문턱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또 "조승희를 가난한 집의 아이니깐 그리고 정신 이상자이니깐 소위 푸코가 말하는 약자를 '내면화'시켜 죄를 합리화 하고 처벌을 강화하려는 자본주의적 논리에 필자는 단호하게 동의하지 않는다. 조승희는 주류의 문턱에서 고민하다 간 인간"이라며 "조승희는 0.5 세대이다. 다시 말해 비주류에서 주류로 넘어가는 그 중간지대에 서 있으며 이런 상태는 지금 한인들 전체의 의식 구조와 같다"고 했다.

 참사의 배경을 이같이 분석한 김 전 교수는, 이어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역설했다. "조승희가 이렇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주류 사회에 던진 도전장은 고스란히 우리 한인들의 화두로 남겨졌다. 이제부터 우리는 미국 사회 아니 세계로부터 도전에 대한 응전을 받는 고달픈 삶을 살아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며 "새가 새장에서 나왔을 때에 험한 환경에 도전과 응전을 하며 살아야 하듯이 노예가 주인이 되었을 때에 주인의 은덕에 의한 삶이 아니고 스스로 인고를 치루는 삶을 살아야 하듯이"라고 했다.

 이와함께 "항상 위기는 기회이다. 긴 나무는 그늘도 긴 법"이라며 "우리가 벌써 주류 사회에 도전할 만큼 성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반문했다. 계속해서 "언젠가 커질 만큼 커진 코리아에 이런 그늘이 생길 것을 예상 했어야 하고 그것에 대처할 인물을 길러 놓았어야 할 것 아닌가?"라며 "하루 속이 미국 사회의 비리에 도전할 킹 같은 진정한 지도자를 찾아야 할 때"라는 말로 글을 마무리 했다.

 이같은 주장을 펼친 김상일 교수는 지난해부터 미국 클레어몬트대학에서 '한국민족종교'를 강의해 왔다고 한다. 그는 특히 북한의 주체사상을 단군사상(홍익인간 등)에 접목시키는 시도를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글을 게재한 통일뉴스는, 최근 소속 기자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상황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서울경찰청은 통일뉴스로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사진작가 이시우(본명 이승구, 코나스 1월 30·31일 관련기사 참조) 씨를 주한미군 시설과 훈련 상황을 찍어 인터넷에 올린 혐의(국가기밀 누설) 등으로 구속했다.(konas)

 다음은 김상일 교수의 글 전문

<기고> ‘주류사회를 향해 쏜’ 조승희 그 이후 우리의 선택 - 김상일 
 
 
김상일(Korea Project Director at Claremont Center for Process Studies, 전 한신대 교수)


6. 25 전쟁 이후 ‘한국’이라는 이름이 이렇게 충격적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적은 없었을 것이다.

4월 16일 범인이 아시아계라는 방송이 있을 때만 하더라도 설마 설마 했는데, 그 설마가 한인 1.5세 학생이라는 사실이 판명 되면서 지금 국내외 우리 한인들은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미국 방송들의 방송 태도는 저리하고라도 우리들 자신이 이 번 일에 대처하는 태도 자체가 더 우리를 공황으로 내몰고 있다.

나는 이 번 일 자체를 이 자리에서 분석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하나의 사건에 대하여 그것에 대처하는 메타 사건적 차원에서 생각을 정리해 보려한다.

아시아계라는 방송을 듣고 만약에 범인이 한인이라면 가정했을 때에 한인들은 아마 여러 생각으로 착잡했을 것이다. 그 때 ‘주류사회에 대한 도전’, 이것이 그 순간 나의 뇌리를 지나가는 단말마적 단상이었다.

점점 사건의 내막이 알려지면서 나의 생각은 처음 생각을 더욱 굳히게 하였다. "너 때문에 이 일을 저질렀다(Your caused me to do this)"는 초기 범행 동기를 말해 주는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너’란 누구인가?

그 모호한 내용이 19일 NBC 방송 내용으로 볼 때에 '부잣집 아들', '방탕', '기만적인 허풍쟁이' 등과 같은 특정 인물이 아닌 불특정 다수였다. 이들이 주류 사회의 전체를 반영한다고는 볼 수 없어도 한 단면은 충분히 될 수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학원 총기사건의 주범은 주로 백인 학생들이었다. 이 말은 적어도 학원 테러는 백인 주류군에 속하는 부류에서 저질러져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자들은 이번 조승희 사건을 '유나버머 메니페스토'과 비교하기도 한다. 시어도어 카진스키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멸망을 앞당길 것이라고 확신하고 주로 대학교 연구소와 민간 항공사를 겨냥해 우편물 폭탄을 지속적으로 발송해 온 무정부주의자이다.

그의 폭탄테러로 3명이 목숨을 잃고 23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대학교(University)'와 '항공사(Airline)'의 첫자를 따 그를 '유나버머(Unabomber)'라는 별명으로 불러왔다. 범인은 자기의 범행동기를 알리기 위해 자신의 글을 신문사에 보내고 폭탄테러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범행 후에 메니페스토를 만들고 이를 언론 기관에 보냈다는 점에서 유나바머와 조승희는 닮은 점이 있다는 것이다.

카진스키 만하더라도 상당한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을 지닌 인물로서 대학 사회의 고급 인력이었다. 그래서 주류만이 주류에 도전할 줄 아는 의기와 용기(?)도 갖는다고 하는 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 만 하더라도 고등 교육과 부유층의 부류에 속하며 부시 집안과는 깊은 친분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

한인 이민 역사가 100년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주류 사회의 성원 대접을 못 받으며 살고 있다. 한인 국회의원과 시의원이 탄생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주류 사회가 만들어 준 공간에 끼어들기 방식으로 참여하는 방식이다. 흑인들과 같이 도전하여 스스로의 권리를 찾는 방식은 아니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한인 유엔 사무총장이 나오고 국제무역 10위권에 들고 OECD 가입국으로서의 위상을 자랑한다. 점점 한국인들이 주류 의식을 느끼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이 사실을 누가 부정을 하겠는가?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다음 이 번 사건이 왜 터졌는지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족 같이 글의 말미를 더 적어 보자.

다시 강조해 주류에 대한 도전은 주류만이 할 수 있다. 노예가 주인의 위상을 넘겨다 보는 순간까지는 노예는 주인에 도전을 하지 못한다. 이를 노예근성이라고 한다.

조승희, 그는 8세에 미국에 와 영어도 할 만큼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누나는 연방정부 공무원이라고 한다. 그는 주류 사회에 들어가는 문턱에 있었는지 모른다.

미국에 당당하게 맞서 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세계에서 반미 운동을 가장 강하게 하는 나라 그리고 FTA를 통해 미국과 대등한 협상을 벌리려고 하지만 아직 세계 주류 세력과는 힘을 겨루기에는 역부족인 상태 이것이 바로 우리 국내외 한인들의 모습이 아닌가. 한류 바람과 함께 민족적 자긍심도 한껏 부풀려져 있는 상태가 아닌가.

조승희를 가난한 집의 아이니깐 그리고 정신 이상자이니깐 소위 푸코가 말하는 약자를 ‘내면화’시켜 죄를 합리화 하고 처벌을 강화하려는 자본주의적 논리에 필자는 단호하게 동의하지 않는다. 조승희는 주류의 문턱에서 고민하다 간 인간이다.

알랭 바디우는 이러한 의식 구조를 ‘공백의 가장자리(site of void)'라고 했다. 무산자 계급, 불법 체류자, 동성애자들, 무정부주의자들은 그 사회에서 가진 것이 없는 ‘공백의 상태’라는 것이다.

바디우는 수학의 집합론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공집합(0)에서 1이 나오는 것에 주목한다. 여기서 1을 주류 사회라 할 때에 0은 바로 비주류 사회를 의미한다. 0과 1 사이의 중간 지대의 인간군들은 공백의 가장 자리에 있는 부류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만약에 수를 0부터 시작한다면 조승희는 0. 5 세대이다. 공백의 가장 자리에서 다시 말해 비주류에서 주류로 넘어가는 그 중간지대에 서 있으며 이런 상태는 지금 한인들 전체의 의식 구조와 같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지금 조승희가 병들어 있다면 우리 자신도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언제 까지 없는 놈이니깐 그럴 수밖에 없지 하는 시각에서 이 사건을 보고 말 것인가?

주류를 향해 도전장을 내고 싶은 충동이 그의 메니페스토 속에 구구 절절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가 도전장을 던지는 방법이 잘못 되었다. 그렇게 불특정 다수를 “너(YOU)"라고 한데 잘못이 있다.

우리는 지금 미국 주류 사회를 향해 던질 도전장이 너무 많다. 마치 0이라는 것 자체는 0이 아니고 이미 1 개란 개수가 되어 ‘1’이라는 개념이 수학에서 생겨나듯이 도전장은 자기 자신에게 먼저 던지는 것이어야 한다. 수학에서는 이를 자기 언급이라고 한다.

그래서 ”You"는 바로 “I"라는 사실을 먼저 알았어야 한다. 자기에 대한 도전장을 먼저 던지고 그것이 타자화한 것이 You인 것이었어야 한다. 마르크스 사상이 지리멸멸해지는 이유가 바로 이 점을 모른 데 있다.

이제 조승희가 이렇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주류 사회에 던진 도전장은 고스란히 우리 한인들의 화두로 남겨졌다. 나는 이를 ‘짐’이라 말하고 싶지 않다. 이 화두를 풀고 나가야 할 과제가 바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미국 사회 아니 세계로부터 도전에 대한 응전을 받는 고달픈 삶을 살아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남이 봐주는 삶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도전에 대한 대가로 응전을 치러야 할 삶일 지도 모른다. 새가 새장에서 나왔을 때에 험한 환경에 도전과 응전을 하며 살아야 하듯이 노예가 주인이 되었을 때에 주인의 은덕에 의한 삶이 아니고 스스로 인고를 치루는 삶을 살아야 하듯이 말이다.

우리 한인들이 지금 이 정신적 공황에서 헤어나는 길은 우리 스스로 미국 사회로부터 그리고 세계로부터 오는 도전에 응전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기에게 도전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주의 환경을 개척해 나가는 응전하는 정신적 자세를 추슬러야 하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항상 위기는 기회이다. 긴 나무는 그늘도 긴 법이다. 우리가 벌써 주류 사회에 도전할 만큼 성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해가 들면 그늘은 저절로 생기는 법. 언젠가 커질 만큼 커진 코리아에 이런 그늘이 생길 것을 예상 했어야 하고 그것에 대처할 인물을 길러 놓았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 면에서 흑인들은 우리 보다 앞 서 있었다. 우리는 이 번 사건이후 말틴 루터 킹이 자기 사람들을 어떻게 미국이란 주류 사회에 도전했는가를 배워야 할 것이다.

조승희를 우리의 짐으로 생각하지 말자. 그러면 우리는 자기는 조승희와는 다르다고 스스로 생각함으로써 우리도 언젠가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같은 잘못을 범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는 험한 세상 다리 위로 고달픈 이민 역사를 써 나가야 할 형편에 처해 있다. 벌써 깨어 있는 미국인들은 조승희까지 포함한 33인들의 영영을 위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 대사 자신은 막상 조승희를 뺀 32을 위한 금식 하자고 했다. 이 얼마나 대조가 되는가?

우리는 하루 속이 미국 사회의 비리에 도전할 킹 같은 진정한 지도자를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 미국 서부 엘에이에서

 김남균 코나스 객원기자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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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akwj3697    수정

    더불어 사는사회가 되어야하는데 극심한개인주의 가 낳은 사건이 조승희총기난사가아닌가 잠시 생각해본다. 우리사회라고 안심할정도가 아닌듯싶다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고 노령화사회에 빈곤층이 늘어나는 현상은 위험수위에 도달해가고 있는것이 아닌가 우려가된다. 덧붙인다면, 정체성의 혼돈과 퍼주기식 막무가내의 대북지원 등은 영세민의 반발도 고려해야할 요소인듯하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

    2007-04-25 오전 9: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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