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주의 문화에서 벗어나자
지난 4월 16일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기 난사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바라보는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의 시각은 사뭇 다릅니다. 그 이유는 사건을 바로 보는 문화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인주의 미국사회에선 한 범죄자의 범죄행각을 두고 그의 국적이나 출신을 거론하기보다 한 개인의 비정상적 정신 상태에서 나온 행동에 사건의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보입니다. 필자는 현재 생활하고 있는 디트로이트의 한 교포는 사건이 발생한 직후 한국에서 이와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면 어떤 일이 국내에서 벌어졌겠습니까하고 자문해보라고 조릅니다. 아마 2002년 미선ㆍ효순이 사건 때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영어를 가르치는 미국 목사는 사건을 부끄러워하는 집사람에게 조군이 8살 때부터 미국에서 받은 교육이 잘못이므로 미국교육에 책임이 있다고 스스럼없이 말합니다.
개인주의 문화에 익숙한 미국사회
비록 버지니아 공대 조승희씨가 대부분의 생활을 미국에서 보낸 영주권자이지만, 분명히 한국의 국적을 가지고 범죄행위를 저지른 이상 집단주의 문화에 익숙한 한국 국민들은 한 동안 수치심과 죄책감의 악몽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미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한국사회가 사과하는 일에 오히려 당혹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현재 911테러 이후 일어난 애국주의가 미국인들에게 집단주의적 증세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도록 언론이 조장하였다는 자성론이 미국 언론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심지어 애국심을 부추긴 유명한 앵커맨은 자신의 잘못을 눈물까지 흘리면 사죄하는 인터뷰모습도 보여줍니다. 국내의 언론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미국 언론의 진솔함을 목격하면서 재미 교포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마음의 위로도 얻었습니다.
총격사건 다음 날 워싱턴 지역에서 열린 희생자추모예배에서 주미 한국대사가 ‘한국과 한국인을 대신해 유감과 사죄를 표한다’고 말하였다고 미국 현지 교민들과 국내여론에서 ‘사죄’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마녀사냥하는 식의 매도가 쏟아졌습니다.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고 한국국적을 계속 가진 거주자의 행위가 궂은일이건 좋은일이건 간에 이에 대한 책임을 국가가 다하지 않는 정부를 정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대통령이 사과하고 주미대사가 사죄를 표한 것을 두고 내외국민들이 왈가왈부하는 소란스런 풍경도 접했습니다.
저로선 사건 이후가 기대되는 까닭은 우리가 그동안 소중이 여겨왔던 집단주의문화가 진화생물학적으로 생존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온 세상에 알려져 여기서 벗어날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 때문입니다. 월스트리트지는 버지니아대학측이 조승희씨에게 어떤 조치를 취했더라도 소송을 당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지난 2002년 마사추세츠 공대(MIT)의 살인사건 피해자의 부모가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례와 2004년 우울증을 겪는 학생을 정학시켰다가 학생들로부터 장애인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례를 소개하였습니다. 소송결과 학교측이 면책되건 아니면 희생자 가족이 승소하건 재판과정에 조승희가 살아온 실체가 공개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그 과정에 한국의 가부장적 사회의식이라던가 엘리트에 집중된 삐뚤어진 교육이라던가, 그리고 집단주의적 폐쇄성 등이 적나라하게 공개될 것으로 보입니다.
사건이후 공개된 미국문화의 모습은 어떨까요? 조군의 대량학살행위를 두고 미국인들이 한편으로 그를 미워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를 용서하는 모순된 실상을 바라봅니다. 그의 누이가 동생의 살인행위에 용서를 구하는 공개편지로 다소간 비난이 누그러들었지만, 사건발생 5일이 지나도록 그의 가족 중에서 누군가가 언론에 얼굴을 내보이면서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는 비난이 한동안 쏟아졌습니다. 버지니아 대학생들로 구성된 학내교회에선 비록 조군을 위해선 기도까지 하진 않지만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는 조군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특이한 문화도 접하였습니다. 어떤 희생자 가족은 희생된 딸의 살아생전의 행복했던 모습만을 생각할 뿐 범인의 광적행동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인터뷰도 들렸습니다. 8년 전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난동사건의 한 생존자는 왜 사건이 일어났느냐보다 이런 참사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까지 합니다.
물론 일부지역에서 한국산 자동차의 유리창이 깨지고, 차량외부에 긁은 자국이 발견되고, 알라바마의 어번 대학에선 한국 학생이 집단으로 구타를 당해 사건경위를 조사하고 있다는 등의 풍문이 나돌기도 합니다. 그리고 미국 고등학교에선 한국계 학생을 냉소한 사건이 있었으므로 그런 일을 당하면, 인종차별을 당하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에서, 부모와 상의하라는 편지를 한국계 학부모에게 내보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흐름은 기독교의 용서하는 문화가 사건이후 미국인들을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성경에서 막달라마리아를 돌로 쳐 죽이려는 군중을 나무라고, 그녀의 죄를 용서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일상생활에 침투해져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집단주의 문화에 익숙한 한국사회
사건이후 일어난 우리의 문화는 어떠했습니까? 사건이 일어난 날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선 범인이 한국계라는 소식이 널리 펴졌는데에도 국내 인터넷 신문에선 범인이 홍콩에서 건너온 중국계라는 오보를 무책임하게 내보내지 않았습니까? 중국측으로선 얼마나 서운하였을까요. 버지니아 주지사가 범행동기를 조사하는 위원회까지 구성하여 이를 조사하고 있지만 지금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심지어 영원이 결론을 내리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보도도 접합니다. 냄비문화에 익숙한 우리의 기준으로 보아선 정확한 사실을 밝히려고 답답할 정도로 꿈틀거리는 이곳의 수사진행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사건의 배경을 두고 일부에선 미국에 건너온 1.5세들이 미국과 한국의 이질적인 문화와 한국인 부모들의 지나친 기대와 교육열로 인한 잠재적인 스트레스에 눌린 ‘부정적 스트레스’때문이라고 풀이하지만 결국 이번 사건은 미국의 고질병인 총기문제(주로 외국언론들이 제기하는 문제이지만) 이외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외톨이를 계속 방치함으로써 발생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따라서 그 배경을 근본적으로 치유해야 제2, 제3의 참사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군이 NBC에 보낸 비디오를 첫 날 몇 번 보여주더니 모방범죄를 방지하려는 뜻에서 언론이 집단적으로(?) 더 이상 방송을 내보내지 않는 배려를 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미시건 대학 심리학과의 한국계 다니엘 박교수는 미국 대학생 중에서 자살한 학생의 국적을 조사한 결과, 1.5세이건 2세이건, 한국계 학생의 수가 가장 많았다는 충격적인 연구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2세로 태어난 한국계 학생이 고등학교까진 미국 백인학생들과 잘 어울리다가도 대학만 들어가면 백인학생들과 융합하지 못하고 분리된다고 합니다. 또 1.5세는 언어의 장벽으로 처음부터 미국 백인학생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방황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의 정체성을 심어주고자 미국의 한국학교(주로 교회내의 건물에서 가르치고 있지만)에선 교포자녀를 대상으로 한글과 한국역사 등을 가르치고 있지만, 이것도 한국문화에 익숙해져 한국과의 교류를 통해 자식의 미래가 보장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바램에서이지, 조국 한국을 잊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비록 미국 대학에선 한국학과정이 만들어져 있지만 이것도 미국계 학생들이 한국에 보다 쉽게 진출하기 위한 방안으로 마련된 것이지, 한국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곳은 아니라고 합니다.
한편 미국에선 한국어를 포함한 외국의 언어를 더 이상 외국어(foreign language)라고 부르지 않고 세계어(world language)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마 국내의 외국어대학교나 외국어고등학교가 교명을 바꾸어야만 할 사건이 되겠지요. 글로벌한 지구를 대상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자국민에게 외국어란 더 이상 ‘생소한 언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미국교육자들의 생각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문화는 타인과 차별하지 않으려는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려는 듯이 로스엔젤레스 타임즈는 교육과 성공을 강조하면서 실패는 종종 수치스럽다고 여기는 문화가 이번 사건에 큰 몫을 했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주변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할까를 우선하는 체면에 의해 지배되며 가족 이외에 누군가와 상담한다는 게 힘들고 창피해 자신들끼리 해결하려는 아시아 특유의 문화가 한 원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이민사회의 폐쇄적 특성상 가정사가 노출되면 자신만이 손해라는 의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방치된 결과 사건을 확대하였다고 전합니다. 이것이 현재 1.5세를 키우고 있는 부모들의 고충이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한국에 정식으로 등록되어 있는 장애아동의 수가 실제의 수도보다 적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 아닙니까?
집단주의 문화는 사라져야
현재 전 세계 70%를 차지하는 집단주의 문화에선 가족과 사회가 자녀의 양육에 책임을 부담합니다. 그러한 사회에선 사회적 네트워크가 지배적이고 개인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폐쇄적인 집단주의문화는 경제적 성과를 거두지 못해 서서히 도태되어버릴 것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연구자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가령 중세시대 집단주의적 마그리브 상인들과 개인주의적 제노아 상인들과의 생존경쟁에서 제노안 상인들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경제사학자의 연구가 실증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종말을 고하고 폐쇄적인 북한사회가 침체된 경제를 꾸려가는 모습을 확인하는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폐쇄적인 집단주의사회에선 분업의 범위를 바깥으로까지 확대시키지 못하고 집단 내에서만 이루어내려고 하는 바람에 결국 전문화의 경제를 살리지 못해(달리 말해 진료서비스를 가족에게만 국한하고 외부서비스를 받지 못해) 국부를 제대로 쌓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아담 스미스가 우리들에게 들려준 귀중한 지혜입니다. 버지니아 공대의 사건을 계기로 부디 우리 후손들의 생존에 지장을 줄 집단주의문화가 거두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konas)
유동운 / 디트로이트 웨인대학 경제학부 연구교수, 현 부경대 경제학과 교수
출처: 자유기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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