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기에 대한 맹세'를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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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특히 2002년 6월 월드컵 응원에 나선 젊은이들은 태극기로 셔츠와 치마를 만들어 입는 등, 일상화하면서 “대~한민국”을 외쳤습니다. 그런가하면 같은 무렵 서해교전에서 산화한 우리 용사 6명이 타고 있던 참수리 357호에도 태극기가 달려 있었습니다. 이제 광화문의 태극기는 흔합니다. 이번 현충일 서울 시청 앞 서울광장에는 대형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카시러(E. Cassirer)의 말을 떠 올리지 않더라도 ‘상징적 동물(animal symbolicum)’입니다. 사물의 상징성을 통하여 그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치열한 고지전투에서 많은 희생을 치룬 후 승리한 다음 가장 서둘러하는 행동은 국기를 꽂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경우, 6?25전쟁 당시 서울수복 후 중앙청에 국군용사들이 태극기를 게양하는 모습은 당시를 경험했던 세대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각종 민주항쟁에서도 시위대는 태극기를 펼쳐들었습니다.
이처럼 크고 작은 국가적 대사가 있을 때마다 태극기가 등장하는 것은 그것이 갖는 강력한 상징성 때문인데, 즉 조국에 대한 헌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민주화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는 하나, 조국은 시시때때로 우리를 부릅니다. 부름의 형태는 때로는 호명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적극적 참여를 요청하기도 하며 혹은 자원희생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부름의 형태는 다르더라도 그 부름이 간절하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조국과 민족의 ‘부름’에 응답해야하는 이유이며, 조국의 상징인 태극기에 충성을 다짐하고 맹세를 해야 할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원래 그리스의 ‘폴리스’ 형태에서 보면 시민으로서 지켜야할 윤리는 자기 자신이 태어난 도시에 대한 헌신의 윤리입니다. 시민으로서 최고의 덕목은 자신의 도시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고 또한 도시의 복지와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스파르타의 어머니들이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경외서의 속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전장으로 떠나는 자기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방패를 가지고 돌아오라, 아니면 방패 위에 누워서 돌아오라.”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장갑 보병(hoplite)이 전쟁터에서 도망가는 것은 자신의 방패를 버리는 것과 같다는 점입니다. 로마의 공화정 시절 전설에 나오는 로마의 어머니들과 아버지들도 이에 못지않게 자신의 아들들에 대해 엄격했습니다. 불명예보다는 죽음을 선택해야한다는 인식이 팽배했으며, 이에 따라 자신의 아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아버지들, 즉 ‘파텔 파밀리아스 paterfamilias’로서 아버지들에 관한 이야기가 적지 않은데, 그 이유라면 아들들이 이런 저런 사적인 이유로 그 도시의 대의명분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곧 명예를 되찾는 일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인들은 다음과 같은 호라티우스의 시구를 가슴속에 아로 새겼습니다.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은 얼마나 즐겁고 명예로운 일인가!(dulce et decorum est pro patria mori).”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전사한 아테네인들을 기리는 페리클레스(Pericles)의 위대한 추도사는 애국심의 요점을 보다 온건한 방식으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도시사랑’, 즉 ‘필로폴리스(philopolis)’는 가장 위대한 가치라고 설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도시를 위해 죽음으로써 그 사랑을 보여준 사람들은 다른 모든 잘못을 용서받았습니다. 명예로운 죽음이라면, 그를 택한 사람은 죽음 속에서 최고의 찬사를 얻습니다.
우리는 이와 동일한 정서가 아브라함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Gettysburg address)에서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연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한다는 것이 서구의 고전적 시민윤리 담론의 전통에서 얼마나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링컨의 표현에 의하면, 이미 죽은 자들은 ‘그 자체로’, 즉 추모하는 사람들의 정성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그 땅을 ‘거룩하게 하였기(consecrate)’때문입니다. 페리클레스의 추도사나 게티스버그의 연설은 조국을 위한 명예로운 죽음에 헌정된 하나의 전통입니다.
시민윤리에 관한 수많은 고전적 표현들을 보면, 자신의 도시에 대한 사랑은 문제의 개인이 그 안에 있든 그렇지 않든, 애국주의, 즉 자신의 국가에 대한 사랑이라는 보다 일반적인 덕목으로 특징지어집니다. ‘도시사랑’은 훨씬 더 구체적이며, 이것은 그가 어떤 특정한 도시, 즉 거의 예외 없이 자신이 태어난 도시의 능동적인 시민으로 살아가는 한 요청되었습니다. 그리스에서는 ‘애국주의’와 같은 특별한 개념이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시민들은 자신의 도시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고 또한 자신의 모든 수단을 다하여 도시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보여주는 최고의 증거는 자신의 도시를 위해 기꺼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시민윤리의 근본적인 특징은 ‘도시법(nomos)’에의 복종입니다. 이런 사실의 인식을 입중해 주는 많은 말들, 예컨대 “사람들은 성벽을 위해 싸워야 하듯이 법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헤라클리투스의 격언과 “법, 즉 도시의 확실한 기초는 정의 및 평화, 다시 말해 사람들에게 부를 나누어 주는 것과 더불어 산다”는 핀다로스(Pindaros)의 시구 같은 말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헤로도투스(Herodotus)는 이와 관련한 인상적인 이야기를 전합니다. 스파르타인들과의 전투를 앞두고 비교적 자유로웠던 스파르타인들의 태도에 궁금해진 페르시아 왕 크세르케세스가 질문을 하자마자 한 스파르타인이 “법, 그것은 당신의 국민들이 당신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 일화가 그것입니다. 테르모필레(Thermopylae)전투에서 목숨을 바친 레오니다스(Leonidas)왕 치하의 스파르타인들을 칭송하는 시모니데스(Simonides)의 2행시는 바로 이런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오! 이방인이여, 이 메시지를 스파르타인들에게 전해주시오:
우리는 그들의 법에 복종하여 여기 누웠노라고.
물론 법의 개념은 모든 도시에 똑같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스파르타의 개념으로부터 아테네의 개념으로, 그 다음에는 로마제국의 그것으로 점진적인 발전과정을 거쳤습니다. 스파르타에서는 도시 헌법에 대한 매우 전통주의적이고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스파르타의 법은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신화적 입법가인 리컬구스(Lycurgus)의 창조물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정치권력, 즉 시민들의 민회와 이른바 “왕들”의 사려깊은 결정도 법에 대한 전면적인 복종을 명령했습니다. 고대 로마와 후대의 공화정 시대까지만 해도 이와 유사한 태도가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아테네에서 이런 태도는 적어도 솔론의 시대 때부터 변화하기 시작했고 이후 계속 변화했으며, 부분적으로는 페리클레스의 시대에 영향력을 미치게 된 새로운 철학의 영향 하에서도 변하고 있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법은 더 이상 어떤 권위적인 인물, 즉 입법가의 카리스마적 선언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지혜의 원리들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솔론은 ‘부정의(disnomia)’와 ‘정의(eunomia)’를 구별하고 “정의는 모든 것을 질서 있게 만들며, 따라서 그것은 지켜져야만 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것은 때때로 부정의한 것을 구속한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아테네의 개념에서 보면 복종을 명령하는 법은 정의롭고 현명한 법이지 법 그 자체가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소포클레스의 비극「안티고네(Antigone)」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자신의 말이 곧 법이고 그것에 두말할 필요도 없이 복종해야 된다고 고집하는 크레온과 “너희들은 도시가 옹립한 통치자이며 정의롭거나 부정의한 사소한 것들에서조차도 너희보다 위에 있는 그 통치자에게 복종해야만 한다”는 그의 말은 안티고네로부터 통렬한 논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국심과 법에 대한 복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이 시민윤리의 중요한 전통이었습니다. 애국심과 법에 복종하는 태도가 어우러진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국가는 주권과 영토, 국민으로 이루어졌다”는 고전적 명제에 우리는 익숙합니다.
하지만 이 명제는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진부하기 조차합니다. 국가나 국가정체성의 의미를 음미하려면, "국가는 영혼으로 존재한다"고 설파한 어네스트 르낭의 통찰에 각별히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혼’으로 존재하는 국가공동체의 역사는 국민들에게 자존감과 정체성, 및 정신적 뿌리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민으로서의 한 개인은 국가의 영혼에서 도덕적 정체성을 추구하고 자신의 존재의미를 확인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태극기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해야하는 이유입니다.
지금 누가 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법복종행위보다 법불복종행위가 더욱 가치 있고 인기 있는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노사분규도 법을 지키지 않아 발생한 것들이 태반입니다. 또 고속도로를 주행하고 있는 운전자들은 제한 속도를 규정한 교통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최고의 공직자인 대통령조차 법을 지키려하기보다는 법이 잘못되었다고 타박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법경시 태도는 ‘도시사랑’을 강조해온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시민윤리의 관점에서 보면 일탈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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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 서려있는 정신이 무엇인지 음미하고 부족한 실천을 반성할 때이지 그 말이 지나치다고 하여 소피스트처럼 트집을 잡을 때가 아닙니다. 결혼서약에서 신랑신부는 “즐겁거나 힘들 때에 서로에게 충실할 것”을 약속합니다. 자구적으로 따진다면, 즐겁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은 상황, 즉 화날 때라든지 지겨울 때는 서로에게 충실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어리석은 소치입니다. 언어의 표현은 빙산의 일각처럼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영역인 만큼 자구에 억매이기는 보다는 그 정신이 무엇인지를 새겨 보아야할 때입니다.(konas)
박효종 /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출처:http://cf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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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3 오후 10:28: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