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안 “박종철군 일면식도 없다”
국제외교안보포럼 강연회서, “전쟁 없다해서 군대 없앨 수 있나? 대공기능 살려야”
Written by. 이현오
입력 : 2008-02-15 오후 2:05:52
'전기고문기술자' '관절빼기의 명수' '솥뚜껑 만한 주먹' 거기에 '11년간의 잠적과 도피생활' '7년의 감옥살이'. 이것이 그에게 꼬리뼈 처럼 뒤따라 다니는 또 다른 모습이다.
19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소위 민주인사라는 사람들에게는 몸을 움추리게 하는 대명사이자, 언론을 통해 어쩌면 자신의 이름 석자보다도 '고문 기술자'라는 닉네임으로 국민에게 더 잘 알려진 장본인인 전 경기도 대공 분실장이던 이근안 경감이 공식석상에 첫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지난 20여년 전 그에게 붙여진 악명높은 사연과 억측, 왜곡되고 과장된 언론 보도내용을 예로 들며 때로는 격한 음성을, 때로는 입술을 다문채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모습을 간간히 보이며 20여년 전 자신과 얽힌 사건의 내막을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그는 알려진 사건에 대해 인정도 했으나 대부분은 전혀 사실 무근의 내용이, 진실이 감추어 진 채 확대 되고, 과장왜곡 되어 자신은 물론 국민을 기만했다며 언론을 겨냥하기도 했다.
이근안 전 경감은 14일 아침 국제외교안보포럼(이사장 김현욱 전 국회의원) 주최 조찬강연회에 나와 대공업무를 전담했던 일선 경찰관으로서 간첩 색출 및 이들을 심문하는 과정을 비롯한 현재 우리사회의 대공업무 실태, 그리고 안보상황을 중심으로 1시간 20여분간 심회를 밝혔다.
이 경감은 이 날 강연의 모두에서 "고문기술자로 이름 난 전 경찰관 이근안 경감입니다.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려드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고 말문을 연뒤 "이 나라 안보의 현주소는 무엇입니까, 그간 읍조렸던 가슴을 활짝 열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면서 그동안 억룰렸던 심중의 피력과 함께 자신의 신상을 소개했다.
그는 먼저 자신이 경찰에 입문하게 된 동기를 어린시절 겪은 공산학정과 고교시절 우연히 택시강도를 목격, 격투끝에 강도를 잡아 경찰에 인계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며 "경찰 교육과정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그 중에서도 춥고 배고프다는 대공분야를 택하게 된 것은 유달리 애국심이 많아서라기 보다도 어쩌면 남에게 미룰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 날 그의 강연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이후 21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인지 아니면 현재 신앙인으로 목사 안수를 앞에놓고 전국을 돌며 신앙간증을 하고 있는 예비 목회자로 변모되어서인지 몰라도 어느 누구에 대한 분노의 외침 보다는 하나님의 사명을 실천하겠다는 자기 고백에 가까운 신앙 간증의 성격을 띈 고백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경감은 강연을 통해 세간에 알려진 대로 지난 1987년 1월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 조사 중 고문치사로 숨진 '박종철군과는 일면식도 없다'고 한마디로 일축했다. 물론 남영동에 파견되어 심문도 담당했지만 그 당시는 남영동이 아닌 경기도 대공 분실장으로 경기도 내 경찰서에서 근무중이었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이어 전기고문과 관련해서는 '인정' 하면서도 그 내용은 일반에 알려진 것 과는 전혀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가 전기고문으로 오명을 얻게 된 것은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연계된 민청학련 사건으로 그는 김근태 전 의장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행한 하나의 심문기법이었다고 말하고 "그렇다고 그 심문이 한전에서 나오는 일반적인 전원을 이용한 심문이 아니라 1.5볼트 건전지를 이용해 심리적 압박을 가해 사실을 실토케 하는 것이었다"며, 사용 전 자신의 몸(혀)에 코일을 대고 실험 한 다음,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눈을 가리는 심리적 기법을 이용했다고 말함으로서 마치 엄청난 전기로 심문한 것처럼 알려진 것은 과장 보도로 인해 과대 포장된 것 이라고 주장했다.
또 '관절빼기의 명수'라는 별명과 '솥뚜껑 같은 손'에 대해서는 "학창시절 유도와 합기도 등을 해 관절꺾기는 알아도 관절을 빼는 것은 어떻게 하는지 조차 모른다"고 말하고 "이게 정말 솥뚜껑 같은 손입니까?" 하고 참석자들게 손을 펼쳐 보여 웃음을 자아내게 하기도 했다.
이 경감은 현재의 경찰 대공업무에 대해서도 크게 우려했다. "지하철 광고에서도 대공 업무, 국가안보를 위한 광고가 나오고 있지만 최근 간첩을 잡았다는 얘기를 얼마나 들어 보았느냐" 면서 "당시에는 30여명이 근무를 해도 밤낮으로 뛰었는데 지금 후배들 말을 들어보면 9명이고 그 중에서도 당직 등을 제외하면 겨우 6, 7명이 근무하는 수준에 급급할 정도로 대공 기능 자체가 유명무실화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마저 대공분야를 어느 정도 아는 고참은 타 부서로 전출하고 신출내기 경관으로 채우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대공업무와 관련해 예전 기록이 다 폐기 처분된 것에 대해 분개해 하기도 했다. 그는 간첩을 색출하고 심문한 많은 기록들이 보관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22년 전 기록을 확인코자 하니) 이미 김영삼 정부들어와서부터 이런 기록들이 없어지기 시작했다며 “누가 누구의 지시에 의해 태워야 했느냐” 며 이때부터 대공업무는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고 통탄해 했다.
그는 10년 10개월의 도피를 하게된 배경을 혼자서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비유하고 만약 그 때 도피하지 않았더라면 3년 정도의 형을 받았을 것이라 예측하고 도피 생활동안 자식의 죽음 등 가정은 한마디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고 말하며 목이 메이기도 했다.
그는 또 남민전, 무림, 학림, 전국 민주노동자연맹사건 등 대표적 공안사건 연루자들을 취조하고 심문하면서 발견한 놀라운 것 중의 하나가 미제를 타도하지 않고서는 한국의 통일 은 안된다는 무장된 주장과 식사를 하면서도, 교회 신자들이 ‘하나님 감사히 먹겠습니다’하고 기도하는 모습은 봤지만 ‘어버이 수령님 감사히 먹겠습니다’ 고 말하고 식사하는 조직원들의 모습은 처음 봤다고 소개했다.
이어 자수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도 “1999년 10월21일 경찰의 날 우연히 TV를 보다가 예전 부하가 구속되는 장면을 보고 내가 안나가면 저 친구 죽인다. 어차피 난 만신창이가 된 몸 저 친구만은 살려야겠다 결심하고 검찰에 자수했다” 며 “그로인해 부하는 얼마후 석방되고 보람을 얻었으며, 그 안에서 이후 마지막 찾은게 하나님이었다” 고 신앙을 얻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또 신앙과 관련해 “고문기술자라는 시선 때문에 대인기피증이 심했지만 목사님을 알게되고 이후 세례교인으로 복음전파를 지상명령으로 받아 들여 옥중에서 피와 눈물로 공부해 전도사 시험에 합격해 현재 신학대학원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있다” 며 현재 간증사역에 임하고 있음을 알렸다.
그러면서 “전도사 자격으로 출소해 전국을 돌며 간증사역에 임하면서도 창밖으로 비추는 이 나라를 볼 때 너무나 슬펐다. 그것은 오늘 주제인 이나라 안보의 현주소였다” 며 “친북 반미운동을 직업으로 삼는 진보라는 좌파들이 햇볓정책이라는 그늘아래서 ‘국가보안법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넣어야한다’ 고 하는 대통령이 있는가 하면 친북 반미운동경력이 유일한 훈장인 386 세대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전교조는 친북반미교육으로 어린 학생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그는 자신이 간첩혐으로 조사해 명백하게 국보법위반으로 형을 받은 범죄자들이 버젓히 국가기관에 의해 민주화유공자로 둔갑된데 대해 한없는 좌절감을 느낀다며 그로인해 자신이 한 사람의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고 지난 2006년 과거사위원회가 간첩행위 및 빨치산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자들을 복권시키고 유공자로 인정한데 대해 목청을 높였다.
이 경감은 또 김신조(68년 1.21 사태 당시 생존 간첩)목사의 말을 인용, “금강산, 백두산, 개성이 공산주의의 홍보관으로 활용되고 햇볕정책으로 아무리 퍼주어도 북한의 대남전략은 변함없다” 며 “자유민주주의체제는 목숨걸고 지켜야한다” 며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동안 통일안보 교육은 왜곡되고 구호에 불과한 자주로 한미동맹은 방향을 잃었다. 더 이상 우리사회에 좌파 포진되게 해서는 안 된다” 고 강조했다.
그는 끝으로 경찰의 ‘대공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을 묻는 질문에 “우선적으로 보안요원의 사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며 “50년 동안 국가에 전쟁이 없었다고 해서 군대를 없애야 하느냐. 실적이 없다고 해서 대공을 없앨수는 없다. 숭례문 폐허 이상의 자괴감을 느낀다” 는 말로 강연을 마무리 했다.
이 날 이근안 경감의 강연이 이루어진 국제외교 안보포럼 강연장은 무겁고 숙연한 분위기 속에 이루어지면서도 그의 신앙간증에 가까운 고백<
19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소위 민주인사라는 사람들에게는 몸을 움추리게 하는 대명사이자, 언론을 통해 어쩌면 자신의 이름 석자보다도 '고문 기술자'라는 닉네임으로 국민에게 더 잘 알려진 장본인인 전 경기도 대공 분실장이던 이근안 경감이 공식석상에 첫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지난 20여년 전 그에게 붙여진 악명높은 사연과 억측, 왜곡되고 과장된 언론 보도내용을 예로 들며 때로는 격한 음성을, 때로는 입술을 다문채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모습을 간간히 보이며 20여년 전 자신과 얽힌 사건의 내막을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그는 알려진 사건에 대해 인정도 했으나 대부분은 전혀 사실 무근의 내용이, 진실이 감추어 진 채 확대 되고, 과장왜곡 되어 자신은 물론 국민을 기만했다며 언론을 겨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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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안 전 경감은 14일 아침 국제외교안보포럼(이사장 김현욱 전 국회의원) 주최 조찬강연회에 나와 대공업무를 전담했던 일선 경찰관으로서 간첩 색출 및 이들을 심문하는 과정을 비롯한 현재 우리사회의 대공업무 실태, 그리고 안보상황을 중심으로 1시간 20여분간 심회를 밝혔다.
이 경감은 이 날 강연의 모두에서 "고문기술자로 이름 난 전 경찰관 이근안 경감입니다.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려드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고 말문을 연뒤 "이 나라 안보의 현주소는 무엇입니까, 그간 읍조렸던 가슴을 활짝 열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면서 그동안 억룰렸던 심중의 피력과 함께 자신의 신상을 소개했다.
그는 먼저 자신이 경찰에 입문하게 된 동기를 어린시절 겪은 공산학정과 고교시절 우연히 택시강도를 목격, 격투끝에 강도를 잡아 경찰에 인계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며 "경찰 교육과정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그 중에서도 춥고 배고프다는 대공분야를 택하게 된 것은 유달리 애국심이 많아서라기 보다도 어쩌면 남에게 미룰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 날 그의 강연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이후 21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인지 아니면 현재 신앙인으로 목사 안수를 앞에놓고 전국을 돌며 신앙간증을 하고 있는 예비 목회자로 변모되어서인지 몰라도 어느 누구에 대한 분노의 외침 보다는 하나님의 사명을 실천하겠다는 자기 고백에 가까운 신앙 간증의 성격을 띈 고백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경감은 강연을 통해 세간에 알려진 대로 지난 1987년 1월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 조사 중 고문치사로 숨진 '박종철군과는 일면식도 없다'고 한마디로 일축했다. 물론 남영동에 파견되어 심문도 담당했지만 그 당시는 남영동이 아닌 경기도 대공 분실장으로 경기도 내 경찰서에서 근무중이었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이어 전기고문과 관련해서는 '인정' 하면서도 그 내용은 일반에 알려진 것 과는 전혀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가 전기고문으로 오명을 얻게 된 것은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연계된 민청학련 사건으로 그는 김근태 전 의장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행한 하나의 심문기법이었다고 말하고 "그렇다고 그 심문이 한전에서 나오는 일반적인 전원을 이용한 심문이 아니라 1.5볼트 건전지를 이용해 심리적 압박을 가해 사실을 실토케 하는 것이었다"며, 사용 전 자신의 몸(혀)에 코일을 대고 실험 한 다음,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눈을 가리는 심리적 기법을 이용했다고 말함으로서 마치 엄청난 전기로 심문한 것처럼 알려진 것은 과장 보도로 인해 과대 포장된 것 이라고 주장했다.
또 '관절빼기의 명수'라는 별명과 '솥뚜껑 같은 손'에 대해서는 "학창시절 유도와 합기도 등을 해 관절꺾기는 알아도 관절을 빼는 것은 어떻게 하는지 조차 모른다"고 말하고 "이게 정말 솥뚜껑 같은 손입니까?" 하고 참석자들게 손을 펼쳐 보여 웃음을 자아내게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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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감은 현재의 경찰 대공업무에 대해서도 크게 우려했다. "지하철 광고에서도 대공 업무, 국가안보를 위한 광고가 나오고 있지만 최근 간첩을 잡았다는 얘기를 얼마나 들어 보았느냐" 면서 "당시에는 30여명이 근무를 해도 밤낮으로 뛰었는데 지금 후배들 말을 들어보면 9명이고 그 중에서도 당직 등을 제외하면 겨우 6, 7명이 근무하는 수준에 급급할 정도로 대공 기능 자체가 유명무실화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마저 대공분야를 어느 정도 아는 고참은 타 부서로 전출하고 신출내기 경관으로 채우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대공업무와 관련해 예전 기록이 다 폐기 처분된 것에 대해 분개해 하기도 했다. 그는 간첩을 색출하고 심문한 많은 기록들이 보관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22년 전 기록을 확인코자 하니) 이미 김영삼 정부들어와서부터 이런 기록들이 없어지기 시작했다며 “누가 누구의 지시에 의해 태워야 했느냐” 며 이때부터 대공업무는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고 통탄해 했다.
그는 10년 10개월의 도피를 하게된 배경을 혼자서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비유하고 만약 그 때 도피하지 않았더라면 3년 정도의 형을 받았을 것이라 예측하고 도피 생활동안 자식의 죽음 등 가정은 한마디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고 말하며 목이 메이기도 했다.
그는 또 남민전, 무림, 학림, 전국 민주노동자연맹사건 등 대표적 공안사건 연루자들을 취조하고 심문하면서 발견한 놀라운 것 중의 하나가 미제를 타도하지 않고서는 한국의 통일 은 안된다는 무장된 주장과 식사를 하면서도, 교회 신자들이 ‘하나님 감사히 먹겠습니다’하고 기도하는 모습은 봤지만 ‘어버이 수령님 감사히 먹겠습니다’ 고 말하고 식사하는 조직원들의 모습은 처음 봤다고 소개했다.
이어 자수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도 “1999년 10월21일 경찰의 날 우연히 TV를 보다가 예전 부하가 구속되는 장면을 보고 내가 안나가면 저 친구 죽인다. 어차피 난 만신창이가 된 몸 저 친구만은 살려야겠다 결심하고 검찰에 자수했다” 며 “그로인해 부하는 얼마후 석방되고 보람을 얻었으며, 그 안에서 이후 마지막 찾은게 하나님이었다” 고 신앙을 얻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또 신앙과 관련해 “고문기술자라는 시선 때문에 대인기피증이 심했지만 목사님을 알게되고 이후 세례교인으로 복음전파를 지상명령으로 받아 들여 옥중에서 피와 눈물로 공부해 전도사 시험에 합격해 현재 신학대학원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있다” 며 현재 간증사역에 임하고 있음을 알렸다.
그러면서 “전도사 자격으로 출소해 전국을 돌며 간증사역에 임하면서도 창밖으로 비추는 이 나라를 볼 때 너무나 슬펐다. 그것은 오늘 주제인 이나라 안보의 현주소였다” 며 “친북 반미운동을 직업으로 삼는 진보라는 좌파들이 햇볓정책이라는 그늘아래서 ‘국가보안법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넣어야한다’ 고 하는 대통령이 있는가 하면 친북 반미운동경력이 유일한 훈장인 386 세대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전교조는 친북반미교육으로 어린 학생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그는 자신이 간첩혐으로 조사해 명백하게 국보법위반으로 형을 받은 범죄자들이 버젓히 국가기관에 의해 민주화유공자로 둔갑된데 대해 한없는 좌절감을 느낀다며 그로인해 자신이 한 사람의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고 지난 2006년 과거사위원회가 간첩행위 및 빨치산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자들을 복권시키고 유공자로 인정한데 대해 목청을 높였다.
이 경감은 또 김신조(68년 1.21 사태 당시 생존 간첩)목사의 말을 인용, “금강산, 백두산, 개성이 공산주의의 홍보관으로 활용되고 햇볕정책으로 아무리 퍼주어도 북한의 대남전략은 변함없다” 며 “자유민주주의체제는 목숨걸고 지켜야한다” 며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동안 통일안보 교육은 왜곡되고 구호에 불과한 자주로 한미동맹은 방향을 잃었다. 더 이상 우리사회에 좌파 포진되게 해서는 안 된다” 고 강조했다.
그는 끝으로 경찰의 ‘대공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을 묻는 질문에 “우선적으로 보안요원의 사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며 “50년 동안 국가에 전쟁이 없었다고 해서 군대를 없애야 하느냐. 실적이 없다고 해서 대공을 없앨수는 없다. 숭례문 폐허 이상의 자괴감을 느낀다” 는 말로 강연을 마무리 했다.
이 날 이근안 경감의 강연이 이루어진 국제외교 안보포럼 강연장은 무겁고 숙연한 분위기 속에 이루어지면서도 그의 신앙간증에 가까운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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