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6일(음력 11월23일)은 우리 민족의 영원한 등불인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한 지 405주년이 되는 날이다. 충무공은 비록 54년의 짧은 인생을 보냈지만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사신 분 중의 한 분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분의 훌륭한 정신은 수백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민족의 혈관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충무공 순국 당시의 재조명을 통해 그 교훈을 생각해 본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598년 8월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일본군은 철수를 준비했고, 조·명 연합함대는 순천 예교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군의 철수를 막기 위해 포위망을 구축했다. 일본군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지만 허사가 되자 뇌물작전을 펼쳤다. 이 와중에 일본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명 수군 도독 진린(陳璘)은 일본의 연락선을 남해 쪽으로 통과시켜주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충무공은 일본 함대의 협격을 염려한 나머지 선수를 쳐서 구원군을 먼저 공격하기로 작전을 변경했다.
결국 노량해전은 그해 11월18, 19일 이틀 간에 걸쳐 당시 조·명 연합함대에 의해 퇴로가 차단당한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군을 구출하려고 온 일본의 구원군을 조·명 연합수군이 요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해전이었다. 이 해전에 참전한 일본 함대는 500여 척의 대규모 세력이었고 이에 맞선 조·명 연합함대는 충무공 휘하 전선 80여 척과 명 수군 진린 휘하의 300여 척 등 400여 척으로 구성됐다.
11월18일 밤 10시쯤, 순천 예교성에 대한 포위망을 푼 조·명 연합함대는 노량수로 쪽으로 함대를 이동시켰다. 충무공은 ‘한 척의 배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각오로 결전에 앞서 하늘을 우러러 기원했다. “이 원수를 없앨 수 있다면 지금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라는 결연한 의지로 함대를 노량수로의 서쪽 입구와 관음포 앞바다에 포진시켰다.
노량해전은 11월19일 새벽 2시쯤 양측 함대가 노량수로 입구에서 조우하면서 시작됐다. 달빛이 자취를 감춘 어두운 새벽, 북서풍이 강하게 부는 가운데 일본 함대가 먼저 조총을 발사해 앞에 섰던 우리 군사들이 쓰러지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풍상(風上) 쪽에 위치한 조·명 연합함대가 화공전을 전개해 일본 함대는 크게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각종 화포를 쉴새없이 발사하고 불화살을 쏘는 등 치열한 야간전투가 지속됐다.
조·명 연합함대의 화공전술에 큰 타격을 입은 일본 함대는 전투를 계속하면서 퇴로를 찾아 관음포 쪽으로 이동했다. 날이 밝아 오자 관음포구 깊숙이 갇힌 사실을 인지한 일본군은 탈출로를 찾고자 죽기를 각오하고 대항해왔다. 하지만 격전이 계속되면서 안타깝게도 일본군이 쏜 총탄은 충무공의 가슴을 관통했다. 충무공은 쓰러지면서 “전투가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결국 이 전투는 11월19일 정오쯤 조·명 연합함대의 대승리로 끝났다. 이 해전에서 조·명 수군은 일본 전선 200여 척을 격침했고, 적병의 수급 500급을 베었으며, 제대로 퇴각한 일본 전선은 겨우 50여 척에 불과했다. 그러나 근접전으로 진행된 해전이었기에 조·명 수군도 피해가 컸다. 충무공을 포함해 장수급 인물만 해도 10여 명이 전사하고 조·명 수군의 상당수가 장렬히 산화했다.
이러한 결과는 오직 충무공을 정점으로 한 명의 적도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싸운 조선 수군들의 활약이 빚어낸 것이었다.
충무공이 주는 안보적 측면에서의 교훈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유비무환일 것이다. 충무공은 22년간 공직을 수행하면서 항상 미리 대비해 걱정이 없도록 했다. 그러한 일관된 자세는 순국하는 순간에도 변함없이 표출됐다. 이를 테면 노량해전에서 목숨을 바치면서 적을 무찔렀기에 일본군은 그 후 280여 년간 감히 조선 해안을 침범하지 못했다. 충무공의 살신이 미래의 국가안보를 보장했던 것이다.
충무공이 주는 교훈은 생애를 통해 남긴 행적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가정에서는 효도를, 나라에는 충성을 다했다. 공직자로서 정의와 청렴으로 일관했으며 권력과 부를 탐하지 않았다. 전쟁으로 유랑하던 백성들을 보살핀 뜨거운 인간애와 악조건 하에서도 창의와 지혜를 모아 난국을 극복한 모습 등 그의 행적 하나하나가 만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오늘날 정신적 가치관이 붕괴되고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현상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우리의 자세를 바로잡고, 나아가 국운 융성을 창출하는 정신적 토대를 충무공 정신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해군교육사령부 충무공수련원·충무공 연구교관 제장명>
제공 : 국방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