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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적지 답사 대학생 국토대장정 소감문 ④

[장려작1]6.25 전적지의 상처가 암투병으로 먼저간 어머니의 고통으로 느껴져...

Written by. 이재형   입력 : 2008-08-07 오후 2:4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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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
 오전 4시 반에 은은한 모닝콜에 평상시 몸에 배어있던 생체리듬을 커다란 용기로 떨쳐낸  후 기상하였다. 사실 어제 저녁에 마음이 설레 였는지 낮에 낮잠도 안 잤는데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대장정에 참가한 대원들과는 다르게 나는 staff 으로 활동해야 되기 때문에 서둘러 출정식이 있을 장충체육관으로 향했다. 다행이도 늦지 않게 도착해서 여유 있게 행사준비에 임할 수 있었다. 장충체육관에는 국토대장정을 알리는 현수막이 이곳저곳 걸려 있었다. 내가 9박 10일 동안 사용할 무전기와 X-반도, 안전봉을 몸에 지니고 나서야 이제 정말 대장정의 시작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출정식에는 우리 대원들을 환영해주기 위해 여러 고위급 인사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셨다. 특히 유엔 6.25참전 용사 분들을 만나보니 이마에 깊게 새겨진 주름처럼 우리나라의 지난 암담했던 현실이 피부에 와  닿기 시작했다. 물론 직접 체험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출정식 리허설을 준비에 앞서 MBC 방송국 기자 분께서 즉석 인터뷰를 하였는데 대원들의 말솜씨 모두가 프로급이었다. 어찌나 말을 잘하던지... 가장 피부에 와 닿는 인터뷰가 있다면 대학교 4학년인 참가자중 나이가 가장 높은 대원이 하는 인터뷰였다. 기자 왈! 지원동기가 있다면요?  대원 왈! 취업해야죠!...물론 이번 6.25전적지 답사 국토대장정이 자신의 이력서에 일조하겠지만 본래 취지에 어긋난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주어서 아쉬웠고 한편으론 이 인터뷰 내용이 전국방방곡곡 사람들에게 전해져 현재 처해있는 대학생들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특히 우리나라 대통령의 귀에 쏙쏙 잘 찾아 들어 갔으면 하다.

 출정식에 앞서 너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나? 드디어 건군 60주년 6.25전적지 답사 국토대장정 출정식이 거행되었다. 답사 단장님의 신고를 시작으로 대원 대표학생의 선언문 낭독 후 행군 기를 받아 이제 대구로 향할 준비가 끝이 났다. 만인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장충체육관을 나와 이제 본격적인 일정에 돌입했다.

 첫 답사지는 국립 현충원 이었다. 안내원의 멘트 중에 이곳이 우리나라 명당 voice900중에 명당이라는 점이 귀에 쏙 들어왔다. 배산임수의 조건에 학이 넓게 날개를 펼친 모양이라고 하니 순간 어머니 품속에 있는 것처럼 매우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현충원 입구에는 수많은 꽃들로 수가 놓여있었다. 참배 후 내부로 들어가보니 6.25라는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혼령들의 위패와 사진 앞에서 유족으로 보이는 할머니께서 정성스레 가지런히 정리하는 모습을 보고 동병상련의 마음을 재차 되새길 수 있었다.

 참배 후 무거운 마음을 가라앉혀줄 맛있는 중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메뉴도 다양한 도시락으로 가가 요기를 끝낸 후 다음 장소인 프랑스 참전비에 도착했다. 안내원의 명 강의를 듣고 우리 대원들은 본격적인 행군모드로 전환했다. 이번 대장정에 내가 맡은 staff의 역할을 발휘해야 할 때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건 “안전” 이기 때문에 행군 간에 하찮은 위험요소라도 소홀히 지나치지 않기 위해 각별히 신경 쓰며 걸었다. 특히 첫날 횡단보도가 많아서 교통 통제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처음 하는 것치고는 100점 만점에 90점 이상은 주고 싶을 정도다. 자화자찬일수도 있겠다. 교통통제하면서 staff들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졌기에 전 대원을 수원부대에 안전하게 인솔할 수 있었다.

 취침 전에 부대에서 제공한 만족할만한 식사와 목욕시설로 행군 첫날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날 여자는 냉수, 남자는 온수로 샤워를 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2일차>
 수원부대에서 맛본 첫날밤을 뒤로 한 채 2일째 대장정에 몸을 담가야 했다. 유엔군 초전비 브리핑을 듣기위해 우리 대원들은 서둘러 버스로 이동했다. 행군 첫날 ‘이거쯤이야’ 하는 각자의 자신감으로 인해서인지 모두가 의기양양한 모습과 함께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마치 첫날 반짝반짝거리던 식판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식판과 피부색깔은 오염농도가 짙어지고 있었다.

 유엔군 초전비에서 다이아몬드 세 개가 전투모에 가지런히 놓여있고 피부가 알맞게 그을린 군인분께서 요목조목 귀에 쏙쏙 들어오게 잘 설명해 주셨다. 그런데 아쉽게도 6.25당시 유엔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곳 길목이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고 하니 브리핑이 끝난 후 내 마음도 동시에 무너지고 있었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야만 하는 불굴의 정신이 이곳 초전비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 120여명의 대원들은 무거운 마음을 잠시 잊고 다시 한번 파이팅을 외치고 2일차 행군을 시작했다.

 숙영지에서 있을 분대별 장기자랑을 계획하며 각 소대, 각 분대는 시간가는 줄 모르게 의견을 서로 나누면 가벼운 발걸음을 이어갔다. 대원들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바삐 움직이는 카메라, 영상 staff, 인솔 staff, 그리고 차량통제의 일등공신인 의료지원차 운전staff 과 의료staff까지 모두가 안전이라는 한 가지 목표로 똘똘 뭉쳐 아름다운 하모니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중에 카메라를 한손에 꽉 쥐고 고가를 수십번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면서 한 장의 명작을 내기위한 카메라 staff의 노력에서 프로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분의 체력관리를 개인적으로 물어보니까 가방 안에 가득 들어있는 영양갱이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분 덕분에 지쳐있는 내 몸에 영양보충을 할 수 있었다.

 어느덧 시간은 정오를 향하고 있었다. 대원들의 배속에서 꼬르르하는 소리가 진동할 무렵 송탄 소방서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군부대에서 추진해온 음식들을 맛있게 먹고 출발전까지 편안히 휴식을 취했다.

 우리는 비록 이렇게 군부대에서 맛있게 만든 음식을 먹어가면서 행군을 하고 있지만 6.25당시에 식량난으로 많은 이들이 피난간에 목숨을 잃었으리라 생각한다. 밥 한톨한톨이라도 나눠먹던 시절과는 다르게 너무도 풍요로워져 빈곤을 잊고 있는 대원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채찍질을 가하고 싶었다.

 꿀맛 같은 짧은 휴식을 취한 대원들은 이제 소방관들의 환송을 받으면 오후 행군일정에 몸을 싣어야만 했다.

 ▲ 태극기와 국토대장정 답사단기를 앞장세우고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대원들. 몸은 천근만근 피곤해도 젊은 패기는 뜨겁다. ⓒkonas.net

 오후 행군거리는 약 15km 정도로 식곤증과 잘만 싸워준다면 거뜬히 해낼 수 있는 거리다. 행군간에 오리엔테이션때 만든 분대가와 분대구호를 외치면서 지쳐가는 체력에 다시 힘을 불어넣곤 하였다. 역시 젊음의 패기가 가장 왕성한 때가 이럴때인 것 같다.

 여단 최종 목적지에 거의 도달해서 점점 체력이 고갈되는 대원들이 보였다. 무거운 배낭을 장기간 메고 걷다보니 허리며 어깨까지 통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럴때마다 뒤에서 잠시나마 배낭을 살짝 들어주는 배려에 한숨 돌리면 에너지 충전을 할 수 있었다. 구호와 대원들간의 배려가 만나 2일차 행군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3일차>
 3일차 아침 해가 밝았다. 점호를 시작으로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굳어있는 몸을 풀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와 함께 뭉친 근육들이 쭉쭉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어느덧 대장정의 종착지인 대구가 코앞에 와 있는 듯하다.

 대장정의 3일차는 나에게 있어 가장 힘들면서 소중한 하루였던 것 같다. 옛말에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또한 3일째를 맞이하고 보니 몸도 마음도 대장정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실 이곳 국토대장정에 참가하게 된 가장 궁극적인 이유가 있다면 3달전에 오랜 암투병으로 고생하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니를 잃은 상처를 이곳 6.25저적지에서 숨져간 고인들에 비유하여 조금이나마 내 마음이 치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암 투병시 고통을 6.25 전쟁시 참담한 기억들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냐만은 개인적으로 커다란 위로와 함께 오히려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동안 수박 겉핥기식으로 지나친 6.25라는 현실을 직접 몸소 체험하고 난 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처진 마음때문인지 내가 맡은 staff이라는 역할을 십분 발휘하지 못한 것 같아 모든 대원들과 함께한 동료 staff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3일이라는 기한이 가장 위기이자 기회의 순간이 올 것이라는 정의가 내 삶의 패턴이 되버린지 오래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동료 staff과 실장님께 상담을 요청해서 처진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노력했다. 실장님과 동료 staff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수백 수억의 가치의 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상처를 녹여주는 격려의 한마디가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행군인솔에 집중하려고 할 즈음, 내 배꼽시계가 진동을 한다. 행군간에 많이 먹고 싶어도 적당량을 유지하기 위해 평소에 먹던 것에서 세 수저정도 덜 먹은 것이 화근이었다. 하지만 다행이도 우리 분대원들이 전날 받은 간식들을 먹지 않고 비상식량으로 남겨두었던 것으로 배고픔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생명의 은인?인 분대원들한테 뭐라도 보답을 해야 하는데 딱히 할 건 없고 staff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분대원과 우리 모두에게 win을 선사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내가 이기고 남도 이기는 전략! 이곳 대장정에서도 통하고 있었다.

 내 배고픔 해결도 잠시! 내 귀에 안 좋은 소식 한 가지가 들려와 마음을 숙연해지게 했다. 6.25 전적지 답사 대학생들 중에 한명이 중도포기를 결정했다는 말에 staff으로써 넓게 나아가 같은 대한민국 청년으로써 함께 완주할 수 있도록 도움을 못 준게 너무 안타까웠다. 나름대로 그 대원도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함께 참가한 동료로써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여러 생각들이 겹치는 날인 것 같다.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가던 중에 벌써 3차 숙영지인 선문대 로스쿨 입간판이 내 눈앞을 가렸다. 선문대의 높은 언덕길을 오르며 막바지 힘을 쏟아낸 대원들은 저녁에 있을 분대별 장기자랑에 열렬한 관심을 보였다. 있는 소품 없는 소품 총 동원해서 대원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역시 젊음은 소중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기가 있다면 우리 분대원 여자대원들이 보여준 차력 쇼였다. 비타500 유리병 밑바닥을 예술적으로 몸체와 분리시키는 장면, 나무 젓가락으로 보여준 수박바 만들기, 끊임없는 마빡이 행진등 대한민국 여성파워를 다시한번 실감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렇게 흥미로웠던 레크레이션 시간은 끝이나고 아쉽게도 대원들은 내일의 일정을 위해 침낭속으로 들어가 잔재미를 꿈속에서 맛보아야만 했다.

<4일차>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평소 같았으면 늦잠자고 일어나 아침식사를 하면서 KBS 아침마당 토요노래자랑을 즐겨보고 있었을텐데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 하늘이 어제 내 심정을 빼앗아 갔는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다. 곧 장대비가 쏟아질 분위기다. 내 예상이 맞았다. 빙고! 서둘러 우리는 아리따운 핑크색 판초우의와 병아리색 판초우의를 폼나게 차려입고 행군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어제 먹고 남은 음식물 쓰레기와 각종 쓰레기들을 분리수거하고 대원들의 배낭을 차에 추진하기위해 차곡차곡 알뜰하게 정리도 하면서 아침부터 진을 뺐다. 행군준비 완료와 동시에 선문대에서 먹은 아침밥이 소화가 되기도 전에 빗속을 뚫고 우리 대원들은 한발한발 힘차게 전진했다. 배낭을 트럭에 추진해서 대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평소에 듣던 분대구호며 파이팅구호도 358dB에 육박할 정도로 크기가 커져 있었다. 내리는 비들도 깜짝 놀라서 허공에서 맴돌고 있고 아마도 6.25참전 용사 혼령들도 깜짝놀라 도망갔을 수도 있겠다. 믿거나 말거나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목소리가 점점 밑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하루종일 내리는 비에 대원들도 많이 지쳐있었다. 판초우의의 방수력은 대원들 목소리처럼 약해져 결국 무용지물이 되었다. 오히려 물먹은 우의는 짐만 될 뿐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젊은이들이 아니기에 목적지인 조치원대대가 다가올수록 이를 악물고 첨벙첨벙 물을 튀겨가며 의젓한 자세로 변해가고 있었다. 드디어 조치원대대에 입성한 대원들은 환영하기 위해 나온 군인 아저씨께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4일차 행군의 결실을 맺고 있었다.

 만약 가장 힘들었던 날이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한다면 단연코 4일차 행군이 1위에 등극되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피로가 많이 누적되어 있는 상태에서 재향군인회와 여러 참전용사분들께서 준비해주신 간식들 덕분에 감사의 마음으로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다.

 비록 우리는 비와 사투를 벌이며 행군하였지만 6.25 전사자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이별의 고통과 식량난등의 난관에 직면하였다는 장면을 떠올리니 피곤한 기색이 물밀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렇게 4일차 일정은 이곳 조치원대대에서 조용히 마무리 되고 있었다.

<5일차>
 이제 제법 단추 구멍만하던 물집크기가 500원짜리 동전만해지는 5일차에 접어들었다. 어제 비를 많이 맞아서인지 오늘 아침 몸이 많이 무거웠다. 혹시 아직 물먹은 판초우의를 입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무거운 몸과 발바닥에 찌릿찌릿한 느낌을 받으며 점호장소로 이동했다. 다른 날과 다르게 ROTC 출신 대원의 육군 도수체조를 함께 따라해보는 영광?을 만끽할 수 있었다. 도수체조 덕분에 피로해서 조용했던 분위기가 금새 댄스장 분위기로 바뀌었다. 육군도수체조를 처음 접해보는 여자대원과 군 미필 남자 대원자들의 신기하다는 표정과 예비군들의 의젓한 표정이 한 곳에 어우러져 환상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전 대원은 조치원 대대 취사병들이 남보다 아침 일찍 기상해서 정성스레 만든 아침식사를 맛있게 먹고 아침이슬을 맞기 위해 첫 행군장소인 아침이슬 주유소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루 만에 구경하는 태양빛에 마르지 않은 빨래를 말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각자 배낭에 널려있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아마도 빨래가 다 마를 때쯤이면 종착지인 계룡대에 입성해 있겠지?

 대원들의 귓속에 좋은 소식이 감지되었는지 어디선가 소란스럽다. 가까이 다가가서 주의 깊게 들어보니 대원 왈! “오늘 계룡대에서 캠프파이어 한다던데.” “캠프화이어” 이 다섯 글자가 500원짜리 물집에 이어 5의 바톤을 넘겨 받는구나! 들뜬 마음때문인지 몰라도 물집으로 인한 고통도 지친 몸과 마음도 잠시 어디론가 떠나보낸 뒤 계룡대를 향해 “돌격 앞오로” 정신을 뿜어냈다.

 계룡대에 들어서기 전에 막바지 한 시간 가량 연속적으로 이어진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많은 대원들이 의료차량에 있는 의료staff과 잦은 면담을 요청했다. 빗속을 뚫고 나온 4일차에 이어 두 번째 난코스에 접어든 것이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숨을 헐떡이면서 있는 힘껏 한발한발 내딛는 모습을 보니 아마도 6.25때 피난민들이 모습이 이랬을꺼라 상상해본다. 배낭을 메지 않고 인솔을 하던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저절로 손이 대원들 가방으로 옮겨졌다.

 짧은시간동안 등에 맺힌 땀을 시원한 바람으로 식혀 주면서 조그만 힘내자 라는 격려 말 뿐이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언덕을 10m 가량 앞두고 최고 절정의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전 대원은 우렁찬 파이팅 구호로 사기를 불어넣었다. 마침내 낙동강 최후 방어선을 늠름하게 지켜낸 용사들처럼 고지를 넘는 순간 감격의 눈물을 쏟아내는 대원들을 보았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말처럼 전 대원은 똘똘 뭉쳐 무언가를 해낸 기분이었을 것이다. 내리막에 이어 평지를 걷다보니 저 멀리 빨간 옷을 입은 군악대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정렬하고 있는 모습이 내 레이더망에 관측되었다. 육, 해, 공 3사 본부가 있는 이곳 계룡대에 난생 처음으로 와본다. 계룡대에 입성하는 순간 감동의 물결이 이어졌다. 주변에는 군대에서도 쉽게 구경 못한 별들과 함께 걷고 있다니 이보다 큰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국토대장정이 끝나고 4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눈앞에 별들이 아른거린다. 한편으론 지금 이 기분을 6.25때 목숨 잃은 용사 분들과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계룡대에서 준비한 캠프파이어와 맛있는 다과로 힘들었던 하루여정을 마무리하고 어느덧 내일이면 국토대장정 행군로의 반을 넘게 된다. 시작이 반이라고 전 대원은 이번 캠프파이어에서 활활 타오르는 장작 속에 그동안 느꼈던 감정과 힘들었던 기억들을 모두 불속에 던져 깨끗이 잊고 남은 반을 초심으로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오늘 하루 마무리 짓는다.

<6일차>
 사실 6일차쯤 접어들고 나니 바닥난 체력처럼 일기 쓰는 것도 귀찮아진다. 하지만 처음에 나 자신과 약속했던 것이기에 인내를 갖고 펜을 굴려본다.

 국토대장정의 추억으로 남을 것으로 여러 장의 사진과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일기가 아닐까? 훗날 귀여운 자식들에게 보여줌으로써 6.25전쟁의 암담했던 현실과 우리나라 역사의 일부를 일깨워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행복한 상상에 빠져본다.

 오늘 일정 중에 오전은 버스이동으로 영내교육을 받게 되었다. 덕분에 잠시나마 버스에서 꿀잠을 청할 수 있었다. 영내 투어 간에 육해공 본부가 모여 있는 곳을 볼 수 있었는데 가이드 군인아저씨의 설명으로 이곳이 북한 위성에도 잘 잡히지 않는 곳이라서 이곳에 위치시켰다고 한다. 계룡산에 살다간 용의 위력이 이렇게 셀 줄이야...

 공군 투어에서 3대의 전투 비행기를 관람하였는데 내부에 몰래 들어가 파일럿이 된 기분으로 조종석에 앉아보았다. 이참에 파일럿에 도전해볼까? 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군인아저씨의 하차명령에 파일럿의 꿈은 무산되었다.

 영내 투어교육을 마치고 명예 전당 브리핑 시간을 보냈다. 이 시간에 인상 깊었던 것이 있다면 화려하게 장식된 인테리어 속에 담긴 각 메이커 부대들의 활약상들이 한눈에 쉽게 이해할 수 있어 좋았다. 특히 내가 근무한 강원도 양구에 가칠봉과 도솔산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관람하면서 은근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이런 걸 자부심이라고 하나? 이런 느낌을 가득안고 육해공 소개와 6.25전사 소개를 듣기위해 전 대원은 중강당으로 향했다. 시원한 음료수를 한 캔씩 받아들고 프리젠테이션에 임하는 군인장교분의 말씀에 경청했다. 그중에 병력감축에 관심이 쏠렸는데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더불어 병력감축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나 또한 생각해왔다. 예를 들면 전방 GOP 부대에 그동안 사람이 주야로 근무를 섰던 거와는 달리 극소수의 병력만 배치하고 감시카메라를 설치하여 인력 손실을 막고 효율적인 국방에 힘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하루빨리 통일이 돼서 철조망이 제거되는 것이지만 휴전상태에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게 현실이지 안더냐...

 마지막으로 6.25저사를 소개해주신 분이 내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는다. 똑 부러지게 설명하는 모습이 정말 본받고 싶었다. 그분은 내가 본 최고의 연설자였다.

 소개 중간중간 졸음을 참지 못해 마치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어 대는 rocker를 연출하는 대원들이 많았지만 졸면서도 분명히 6.25의 암담함을 깨닫고 있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전에 느슨한 일정으로 긴장이 풀린 대원들은 중식을 먹고 대전 현충원으로 참배하러 갔다. 현충원에 있는 묘비 앞에 한명씩 제초작업도 하면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비석 뒤에 쓰여 있는 날짜를 보니 6.25가 거의 끝날 무렵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분이 계셨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평화롭게 살고 있는 것이며, 그분들의 정신을 본받아 애국하는 자세를 몸소 습관화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7일차>
 7월의 첫째날 해를 이곳 영동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 제법 많이 따가워진 태양빛이 살갗을 거무스레 익히고 있다. 첫째날 찍은 디지털 카메라 속 내 모습과 비교해보면 흑과 백으로 확연히 구분 되 보인다. 마치 휴전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나누어진 것처럼 말이다. 이제야 정말로 내적으로나 외관상으로 6.25의 실상을 피부에 와 닿은 순간인 것이다. 내 피부가 정상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남과 북이 통일 되어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오늘도 힘차게 첫발을 내딛는다.

 첫날과는 다르게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도시를 빠져나와서 그런지 한산한 분위기 속에서 대장정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조용한 분위기가 더욱 위험한 만큼 언제 나올지 모르는 차량들 통제에 staff들은 신경을 항상 곤두세우고 있어야만 했다. 특히 2차선 도로에서의 차량통제는 처음보다 많이 발전된 의사소통으로 안전하게 대원들을 이끌 수 있었다.

 추풍령 고개를 넘어야지 오늘 하루의 끝이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계룡대 가기 전 언덕보다는 완만하지만 언덕은 언덕이다. 중식 후에 잠은 밀려오고 다리에 경련은 이어지면서 추풍령을 넘어야겠다는 굳은 의지 하나로 대원들은 전진 또 전진했다. 마침내 멀리서 보이는 경북 김천 경계지점을 알리는 커다란 비석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비석 앞에서 대원들은 힘이 아직 남아있는지 추억으로 남길 사진들은 열심히 찍고 있다. 한쪽에선 누가 와서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누워서 꿀잠을 청하고 있었다. 이보다 맛있는 잠이 어디 있겠는가!

 대원들은 이제 내리막 코스를 사뿐히 내려가 평지에 접어들었으며 곧 김천대대에 도착할 것이다. 7월의 첫날이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8일차>
 4일차에 이어 8일차에도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 끼어있다. 비올 분위기에 대원들은 미리 판초우의를 챙겨두고 출발준비에 있었다. 이제 대장정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첫날보다 몸은 피로하지만 마음속에는 많은 것을 담아두었으리라 생각한다. 6.25시절의 전적지를 답사하면서 느꼈던 점들부터 동료 대원들 간의 우애도 많이 돈독해졌으리라 생각한다. 힘듦 속에서 만난 인연이 훗날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다면 웃음으로 서로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하면서 이곳에 참석한 120여명의 대원들과 서울에서 함께 걸어온 날들을 생각하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고 본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열이 날땐 해열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땐 또 하나의 사랑, 취업에 실패하였을 때 따뜻한 격려말처럼 이번 국토대장정은 내 인생의 커다란 밑거름으로 작용할 거라 생각한다.

 대원들 모두가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말보다는 생각에 잠겼는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행군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마터면 졸다가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생각 속에 잠긴 대원들을 이끌고 칠곡대대 동원 생활관으로 입소했다. 지금까지 지내온 숙영지 중에 가장 깨끗하고 시설이 만족 할만 했다. 칠곡대대에서 서로 간에 롤링페이퍼를 작성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를 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몰랐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고 친목도모에도 한몫 한 것 같다. 롤링페이퍼를 끝으로 칠곡대대의 내무실은 소등에 들어갔다.

 하늘도 우리 대장정을 돕고 있는 모양이다. 새벽에 잠시 화장실을 갔다 오면서 밖을 나가보니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침에는 약간 축축한 바닥으로 행군할 때 먼지가 나지 않도록 해주는 배려가 어찌나 고마운지 이번 대장정은 운도 좀 따라주는 것 같다.

<9&10일차>
 드디어 마지막 행군 날이다. 칠곡대대에서 목적지는 대구 제2군사령부다. 행군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는 서울에서 낙동강 방어선까지의 6.25전적지를 몸소 체험하게 된 격이다.

 갑자기 어느 대원의 말이 생각난다. “6.25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에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처음에는 대장정이 시작하기 전 본래 이미지를 되찾고 싶어하는 의미인줄 알았는데 이해력이 느린 나로써는 뒤늦게야 우리나라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생각할 수 있었다. 아마 그 대원뿐만 아니라 모든 대원들이 6.25를 간접체험한 입장에서 다시는 이런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랬을 것이다.

 칠곡대대 위병소를 나서자마자 군경합동으로 에스코트를 해주어서 마치 대통령 된 기분이었다. 120여명으로 줄줄이 이어진 행렬이 편도 3차선도로 중 중앙선 부근 1차선을 모두 점령해서 걷고 있다니 이런 호화스런 대접을 또 언제 받아보겠는가? 나중에 내가 문화부 장관이 되면 받을 수 있을까?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오전의 행군일정을 마무리하고 이제 staff들의 힘으로 최종 목적지인 대구부대로 가야만 했다. 마지막까지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다. 언덕길 2차선 도로에서 선두차량을 통제하면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낸 것이 오히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한 기분이었다. 역시 사람은 바빠야 한다.
 칠곡 중학교를 지나 드디어 마지막 한 코스 대구 2군 사령부만 남겨두고 있다. 국토대장정 행렬은 마지막 횡단보도를 건너고 나서야 멀리 보이는 군악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문을 통과하는 순간 그동안 고생한 staff들과 모든 대원들이 서로 껴안으면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가슴 한구석이 찡했다. 하지만 다른 대원들처럼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좀 더 고생해야 나오려나? 대신에 기쁨을 표시하기위해 환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행군종료를 축하하기위해 분대별 우렁찬 구호가 파도쳤고, 어느 부류에서는 수고한 동료를 위해 행가래를 선사하고 있었다.

 드디어 6.25 전쟁의 종결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난 9박10일 동안 답사 단장님, 부단장님, 실장님, 팀장님과 미운정 고운정 함께 나누던 옆 동료와 대원들을 인솔하기위해 한발 더 바삐 움직여준 staff 여러분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6.25전적지 답사 국토대장정 1기 staff으로써 정말 소중한 추억을 만들고 가며 앞으로도 이어질 2기, 3기,......10기,....100기까지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konas)

 이재형 (경기대학교)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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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태순    수정

    뭐야 짜증나 ㅅㅂ</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9-05-09 오전 10:57:31
    찬성0반대0
  • 자랑스런 조국    수정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님의 말대로 6.25전적지 국토대장정이 앞으로도 계속,영원히 지속되어 더 많은 우리의 젊은이들이 조국,자유대한의 의미를 다시한번 되새겨보고 나라사랑의 참 뜻도 의미하시기 바랍니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8-08-07 오후 10: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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