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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장군과 인천상륙작전의 의의

Written by. 양영조   입력 : 2008-09-10 오전 6: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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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륙작전의 구상과 발전

 북한군의 남친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위기를 넘긴 유엔군은 적을 일거에 포위 격멸할 목표하에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하고 대반격작전을 전개함으로써 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본 고에서는 이러한 작전의 계획과정과 작전양상, 그리고 결과를 정리하면서 인천상륙작전 시 맥아더 장군읭  할과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상륙작전계획은 북한의 남침 직후인 1950년 7월 초 맥아더 장군이 그의 참모장 알몬드에게 하달한 "서울의 적 병참선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상륙작전 계획을 고려하고 상륙지점을 연구하라"는 지시와 더불어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맥아더 장군의 구상은 북한군의 전진이 계속되어 병참선이 신장될 것을 예견하고 아군을 적의 후방 깊숙이 침공시켜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방어선에서의 반격부대와 연결작전을 전개하여 적을 일격에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맥아더의 작전참모부장 라이트 준장이 이끄는 합동 전략기획단에 의해 연구되었으며 '블루하트'라는 암호 명칭이 부여되었다. 이 계획은 안타깝게도 북한군의 신속한 전진으로 인하여 일단 취소되고 말았다.

 다시 연구를 재개하게 된 라이트 일행은 인천, 군산, 해주, 진남포, 원산, 주문진 등 해안지역을 상륙 대상지역으로 검토하고 '크로마이트'라는 작전명칭 아래 인천, 군산, 주문진 등을 상륙지로 하는 3개 안을 작성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인천이 결정되었다.

 이 계획은 본직적으로 그동안 추진되어 온 상륙작전 기본개념과 동일하였지만, 미 제1해병사단을 돌격상륙부대로 하여 인천-서울을 목표지역으로 결정하고 낙동강전선의 미 제8군과의 협조된 작전을 동시에 실시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상륙지에 대한 찬반논쟁과 확정

 맥아더 장군이 계획을 발전시키는 동안 미 합참은 상륙계획 자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였으나, 상륙지역을 인천으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완강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주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 해군참모총장 셔먼 대장, 그리고 미 해병대의 대표는 초기단계에서부터 반대의견을 제시하였다.

 해군측 반대의 이유는 인천지역이 조수, 수로, 해안조건에서 상륙작전에 많은 제한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에 상륙의 적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즉 인천항에 이르는 수로가 협소하고 간만의 차이도 10m 내외로 간조시 2∼5㎞의 광대한 갯벌지대가 형성되며 또 수심이 너무 얕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상륙지역에 대한 의견대립이 계속되자, 미군 주요 수뇌들이 극동군사령부에 모여 다시 상륙지 문제를 논의하였다. 콜린스 장군은 군산을 상륙지역으로 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는 인천은 거리가 멀어 제8군과 제10군단의 연결 작전이 어렵고 군산은 자연장애물이 없고 상륙 후에도 대전에 이르는 적의 병참선에 근접해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제의에 대해서는 셔먼 제독도 지지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에 상륙해야하는 이유에 대해 "적은 그의 후방을 무시하고 있고 병참선이 과도하게 신장되어 있으므로 서울에서 신속히 이를 차단할 수 있으며 그들의 전투부대는 사실상 모두 낙동강 일대의 제8군 정면에 투입되어 있는데 훈련된 예비 병력마저 없어 전세를 회복할 만한 능력이 거의 없다"라고 역설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전략적, 정치적, 심리적 이유를 들어 서울을 신속히 탈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때 그는 지도를 가리키면서 인천은 제8군이라는 '망치'가 북한군을 분쇄하는데 제10군단은 '모루'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워싱턴으로 복귀한 군 수뇌들은 존슨 국방장관, 트루먼 대통령에게 방문결과를 보고하였다. 결국 맥아더 장군은 국방장관과 대통령의 지지를 얻어냈으며, 미 합참은 8월 28일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공식 승인하였다. 이에 따라 맥아더 장군은 8월 30일에 인천상륙작전 명령을 하달하였으며, 9월 6일 상륙작전 날짜를 최종 9월 15일로 확정하였다.

 ▲ 한국 해병 용사들의 인천상륙 모습

 인천으로의 항진과 상륙작전 개시

 인천상륙작전 계획과정에서 해군은 극동해군사령관의 주도로 준비되었으며 8월 30일에 하달된 극동해군 작전명령에 따르면, 해군의 과업은 평양-원산선의 서해 봉쇄, 상륙일 이전의 해군작전 수행, 상륙돌격으로 인천교두보 확보, 후속부대와 전략예비 수송 등이었다.

 극동해군은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제7합동기동부대를 구성하고 제7함대사령관 스트러블 중장을 기동부대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인천상륙 일자가 다가오자 제7합동기동부대는 9월 초에 부산, 일본의 사세보, 고오베, 요코하마에서 상륙군 적재를 시작하여 9월 10일부터 인천으로 출항하기 시작하였다.

 미 해병 제1사단과 미 보병 제7사단은 각각 고오베와 요코하마에서 9월 11일에 출항하였으며 도중에 부산에서 출항한 국군 해병 제1연대와 제17연대 등과 합류하였다. 이렇게 하여 모든 함정들이 9월 14일까지는 서해 중부 해상의 약정된 집결지인 덕적도 근해에서 총집결하였다. 제7합동기동부대의 인천으로의 항진과 사전폭격은 상륙계획의 작전보안을 유지하고 특히 상륙지역과일자를 기만하기 위한 기만작전과 양동작전이 병행 실시되었다.

 상륙군 부대의 인천으로의 항진과 보조를 맞추어 목표지역을 제압하기 위해 제7합동기동부대의 공중폭격은 9월 4일부터 상륙시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맹렬한 사전폭격과 포격으로월미도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들만이 불에 타고 있을 뿐 정적이 흐르고 있었으며 인천시내는 검은 불길이 하늘을 메웠다.

 인천상륙은 9월 15일 새벽에 개시되었다. 이날 새벽은 구름이 잔뜩 끼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음산한 날씨였다. 02:00 월미도에 상륙돌격을 감행할 미 제5해병연대 3대대 상륙단의 선견대가 인천수로로 진입하기 시작하여 얼마 후 미 해군정보장교 클라크 대위가 밝혀주는 팔미도 등대의 안내를 받아 무난히 인천항에 이르렀다.

 이들은 05:00 고속항모부대의 함재기들이 어둑어둑한 하늘로 날아올라 월미도와 인천 내륙지역에 맹폭을 실시하고, 그 뒤를 이어 구축함의 첫 포탄이 월미도에 작렬하였다. 로켓포함이 녹색해안과 그 주변 북한군 진지에 대해 1천여 발의 포탄을 퍼붓는 동안 상륙주정 7척에 분승, 해상에 설정된 공격개시선을 통과하였으며, 08:00에 월미도를 확보하고 선 전체에 걸친 소탕작전을 정오쯤 완료하였다.

 인천시가지 소탕작전은 국군 해병 제1연대가 담당하였다. 9월 16일 아침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인천시가지 중앙을 통과하는 경인선 철도를 기준으로 남쪽지역은 제3대대가 북쪽지역은 제1대대가 분담하여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연대는 이날 시내의 주요 공공시설을 장악하고 야간에는 시내외 주요 지역에 대한 경비와 순찰을 강화하였다.

 상륙작전의 결과와 의의

 인천상륙작전 시 아군의 손실은 인천으로부터 서울에 이르는 동안 가장 결렬한 전투를 치렀던 미 제1해병사단이 전사 4백 15명, 부상 2천 29명, 실종 6명으로 가장 많은 손실을 보았으며, 그 다음으로 한국해병대가 전사 97명, 부상 3백여 명, 그리고 실종 16명이었다. 미 제7사단중의 제32연대도 전사 66명, 부상 272명, 그리고 실종이 47명이었다. 따라서 국군과 유엔군의 총손실은 대체로 약 4천여 명 정도였다.

 이에 비하여 북한군의 직접적으로 입은 손실은 사살이 1만 4천여 명, 포로 7천여 명, 전차 손실 50여 대에 달하였다. 한편 이 작전과 관련하여 북한군이 38도선 이남에서 입은 총손실은 전사상 20여만 명, 포로 13만 5천여 명 등 총 33만 5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 작전 이후 북한군은 공격능력이 소멸되고 저항능력마저 거의 상실되었다.

 따라서 인천상륙작전은 야심적인 작전계획의 수립과 신속한 준비과정, 그리고 과감한 작전 수행 등으로 요약되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세계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장애요인을 극복하고 성공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말미암아 전사의 한 장을 장식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제반 악조건을 기습달성의 수단으로 이용하여 상륙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작전수행상 악조건이 때로는 기습달성의 중요한 요소로서 역이용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입증하였다.

 인천상륙작전에 반대의 입장이었던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작전의 성공보고를 받은 후 맥아더 장군에게 축전을 보내어 "귀관이 수립한 공세이전 계획, 시기의 선택, 그리고 그 실행은 참으로 훌륭하였다"고 극찬하였다. 이 작전의 성공은 전쟁원칙이 적절히 반영된 결과였다.(konas)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

 출처:自由誌(성우회발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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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펜타곤    수정

    와우! 맥아더는 역사에 빠질수 없는 인물</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8-09-18 오후 3: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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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imck247    수정

    본소년병은 마지막 인 낙동강 항전에 참여한 생존한 소년병이다 참우로 메가더 작전술은 세계에서 증명할 장군이다, 2차대전 일본을 폐망도 메가더 장군위 전술를 세계적으로 명을 증거한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8-09-10 오후 3: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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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akwj3697    수정

    풍전등하의 이나라가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다면 김일성의 적화통일로 수천만명의 학살과 포토피플이 이 한반도에서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이된다 오늘의 한국이 존재한다는 것은 한 장수의 지략과 추진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는 제2의 6.25와 같은 정쟁은 없어야할것이며,만약을 위해 전쟁발발 요소를 완전히 없애버려야한다고봅니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

    2008-09-10 오전 9: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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