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의 불법폭력시위와 북한의 대남전략 상관성 여부
1. 序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시작된 촛불시위는 새 정부 초기의 국정 의욕을 무력화시키며 4개월여 지속되었다.
촛불시위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싸고 MBC 등 일부 언론매체의 왜곡된 정보전달에서 촉발되었지만, 시위의 발생과 전개 과정은 단순하지 않고 다층적 양상을 보였으며, 시간이 거듭될수록 불법폭력 시위 양상을 나타내었다.
촛불시위의 배경 요인으로는 외환위기 이후 지난 10년간 누적되어 온 반(反)글로벌화 정서와 양극화의 심화 현상을 들 수 있었다. 초기의 촛불시위는 시위중심세력이 분명히 포착되지 않았고, 자발적이며 비폭력적 양상을 보였다. 시위대는 ‘문화제’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면서 적어도 형식적인 면에서는 ‘시민 참여정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특징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포스트 모던적(post modern)’ 성격을 지닌 시위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 기존의 한국의 시위가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던 속성, 즉 반미적, 반정부적, 폭력적 성격도 ‘내재’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불안한 요소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으며, 점차 ‘깃발시위’의 양상을 보였다.
촛불시위를 남한내 이념투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은 시위 분위기를 ‘반미’(反美)로 몰고 가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고, 8, 90년대식 폭력시위를 연상케 하는 쇠파이프 부대가 등장했다. 이들은 초기에 시민 중심의 주류 시위대로부터 야유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의 영향력이 커졌다. 촛불시위는 처음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출발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이명박 아웃(OUT)’ 등 정권퇴진 이슈로 바뀌었는데, 이들의 조직적 행동전술이 시위대 전체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파악되었다.
촛불시위를 주도한 단체는 시위기간 중 조직된‘광우병국민대책회의’(이하‘대책회의')였다.‘대책회의’는‘6.15남북공동실천연대’등 친북반미 단체들이 2007년 9월 조직한‘진보연대’가 주축이었으며, 여기에‘참여연대’등 일부 시민단체 일부가 대책회의 상황실에 참여하였다. 이들 ‘진보연대’ 등이 촛불시위를 확대시키고 시위 구호를 ‘반미’와 ‘이명박 정권 타도’로 변질시킨 핵심이었다.
‘진보연대’는 2007년 9월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출범했으며 전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범민련남측본부, 민주노동당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국가보안법 철폐, 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파기, 신자유주의 반대, 강대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정책으로부터 자주권 쟁취 등을 강령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보다 8개월 앞서 2007년 1월 9일 민주노총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전국농민회총연합 등 전국 22개 단체를 아우르는 단일 조직을 출범시키기 위해 ‘한국진보연대 준비위원회’가 출범하였다.
이들은 출범식에서“진보운동의 혁신과 더 튼튼한 단결을 위해 연대체가 필요하다”고 밝히고, 공동준비위원장으로 민주노총 조준호 위원장,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 전국농민회총연합 문경식 의장, 전국빈민연합 김흥현 의장, 전국여성연대 윤금순 대표, 정광훈 민중연대 상임의장, 오종렬 전국연합 상임대표, 한상렬 통일연대 상임대표 등 8명이 맡았다. 이들은 단체 강령으로 민족자주,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민중 생존권 쟁취, 6·15공동선언 이행과 자주적 평화통일 등을 채택했다.
‘진보연대’의 오종렬, 한상렬 공동대표는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주요 임원이며, 효순-미선양 사건 범국민대책위,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맥아더 동상 강제철거 시도, 한미 FTA 반대 등 주요 ‘반미 시위’의 전면에 등장해온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초기 촛불사태의 발생 및 전개 양상을 요약하면 MBC ‘PD수첩’의 ‘인간광우병’ 사실관계(fact) 날조와 과장 →친북반미 세력의 촛불점화 → 좌파 성향 인터넷 매체들의 '뇌송송 구멍탁' 선동→촛불 확대(10년간 누적된 경제악화와 양극화 현상 + 이명박 정부의 인사정책 불만과 정치력 부재) → 민심 대폭발의 수순을 거쳤다.
요컨대, 이들 친북반미 단체들은 시위를 확대시키고, 촛불시위의 내용을 반정부-반미로 돌려놓으며, 폭력시위를 부추기는 역할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지난 9월 27일 국가정보원과 검·경(檢·警)은 ‘광우병국민대책회의’의 주축이었던 ‘진보연대’의 ‘6.15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이하 ‘실천연대’)에 대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잡고 전면 수사에 착수했다. ‘실천연대’는 6·15남북공동선언을 민간 차원에서 지원하겠다며 2000년 10월부터 활동을 시작한 친북단체이며, ‘진보연대’ 중 핵심단체라고 할 수 있다.
공안당국은 서울 성북구 삼선동 실천연대 사무실, 경기·대전 등 5개 지역본부 사무실, 김승교 ‘실천연대’ 공동대표 등 관계자 자택 등 전국 20여 곳에 대해 동시 다발적으로 압수수색을 벌여 최한욱 집행위원장, 강진구 전 집행위원장, 문경환 정책위원장 등 실천연대 지도부 5명에 대해 이적단체 구성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검찰은 이와 함께, 이 단체의 강진구 전 집행위원장이 지난 2004년 말 중국에서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관계자를 만나 북측의 지령을 받은 혐의를 포착하고, 강 전 위원장을 비롯해 최한욱 현 집행위원장, 문경환 정책위원장, 곽동기 한국민권연구소 상임위원 등 실천연대 핵심간부 4명에 대해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과 회합·통신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공안당국에 따르면, 강 전 위원장은 당시 통일전선부 관계자로부터 직접 북측의 지령이 담긴 문건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문건에는 "남한에서 주한미군 철수 운동을 더욱 강력하게 전개하라"는 내용이 담겼으며, 이를 입증할 수 있는 문건이 확보됐다고 공안당국 관계자는 전했다. 공안당국은 이 지령이 전달된 뒤 주한미군 철수와 관련된 실천연대의 활동이 더욱 강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촛불시위가 2개월을 넘기자 정부에 대한 신뢰와 권위, 대통령직(presidency)에 대한 권위도 급격히 추락했다. 특히 촛불사태가 '효순 미선양' 추모제와 6.15 남북공동선언 8주년을 거치면서 '미국산 쇠고기 반대'라는 겉옷을 걸친 채 정권퇴진, 반미(反美), 좌파 대결집으로 전환되었다. '광우병국민대책회의'는 스스로 '국민의 대표'를 참칭(僭稱)하면서 "정부에게 쇠고기 전면재협상을 명령한다"는 치기 어린 유인물을 돌리기도 했다.
다시 말해, 지난 촛불시위가 한국사회에 던진 중요한 문제점은 우리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권위’(authority)가 추락하고 있는 세태에서 소수의 군중들에 의해 정부의 통치력이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까지 훼손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검찰의 ‘실천연대’ 수사에서 보듯 이들 소수의 핵심 군중이 다수의 시위대에 ‘정권 타도’라는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또 6. 15를 전후하여 촛불사태가 과격 양상을 보이는 동안 노동신문 등 북한 선전매체들은 촛불시위에 잇따라 지지 담화를 발표했다.
6월 13일 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과 조선농업근로자동맹(농근맹) 등은 “각계층 군중이 참가하고 있는 정권 반대투쟁은 단순히 쇠고기 시장 개방만을 반대하는 생존권 투쟁이 아니라 반인민적, 반민족적 정책 전반에 대한 저주와 분노의 폭발”이라며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에 전적인 지지와 연대성을 보낸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렇게 볼 때 대다수 국민과 평화적 촛불시위대가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든 아니든 관계없이, ‘남한의 불법폭력시위와 북한의 대남전략 상관성 여부’ 문제는 우리사회 안보와 관련하여 여전히 심중한 사안이며, 특히 이번 촛불사태를 통해 친북반미 단체들의 활동이 ‘여론정치’라는 이름의 대중영합주의 내지 대중추수(追隨)주의와도 결합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었다.
이 글은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발생한 촛불사태를 계기로‘북한의 대남전략과 남한의 불법폭력시위의 관련성’을 개괄해보는 것이 목적이다.
2. 2000년 이후 북한의 대남전략 변화
1) 북한의 전통적 대남전략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가 된 이후인 1974년 4월 북한의 주체사상은 ‘김일성주의’로 정식화되었으며, 김일성주의는 크게 3가지 영역에서 구현되는 것으로 선포되었다.
김정일은 74년 4월 논문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 하기 위한 당 사상사업의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사상사업의 최종 목표를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로 선포했다. 이는 1차적으로 북한의 김일성주의화, 2차적으로는 남한의 김일성주의화, 그리고 마지막이 세계의 김일성주의화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먼저 북한에서 김 부자(父子) 통치체제의 절대성을 보장하고, 남한을 김일성주의로 통일한 다음, 전 세계에 김일성주의를 전파하여 북한과의 연대세력권을 구축하겠다는 뜻이다. 김정일은 ‘세계적인 사업’을 구상한 것이다.
물론 이 같은 김정일의 구상이 실현될 리 없었다. 김정일은 그럴 만한 능력도, 이를 가능케 할 철학도 가지고 있지 않다. 김정일은 이와 같은 사상 사업을 통해 아버지 김일성의 권위를 절대화해주고 그 대신 김일성의 절대권력을 순조롭게 이양받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라는 구호에서 보듯이 ‘남한의 김일성주의화’는 곧 대남 전략을 의미한다. 이는 전통적인 북한의 대남혁명 노선과 동일하다. 북한의 통일전선전략은 전통적으로 두 가지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는‘무력통일 전략’, 또 하나는‘평화통일 전략’이다.
무력통일 전략은 주한미군을 몰아낸 다음 기습전, 전격전의 방법으로 남한을‘접수’하는 전략이다. 이 전략에서 최대의 걸림돌은 주한미군이다. 이 때문에 북한은 기회만 있으면 주한미군 철수를 들고 나온다. '자주화'‘민족공조’라는 용어는 궁극적으로‘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파기’를 의미한다. 김정일은 군 관계자들에게 “전쟁 1주일 만에 부산까지 밀고 내려갈 수 있으나 미군개입이 문제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김일성은 생전에‘100만 청년학생 양성론’을 내놓기도 했다. 청년학생 100만 명에게 호신술과 생존술을 훈련시킨 다음, 유사시에 권총 한 자루씩 쥐어주어 남한 후방에 일제히 뿌려놓고 보급은 알아서 하도록 하고 남한에 대혼란을 야기하겠다는 전술이다. 김일성은 “남북한 인민들은 같은 민족인 만큼 후방에 뿌려진 100만 명의 청년학생들이 남한 사람인지 북한 사람인지 미군이 제대로 식별하지 못할 것이고 이 같은 혼란을 이용하여 전격전으로 나가면 단시일 내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공산권 몰락과 중국의 개혁개방 성공, 그리고 1990년대 북한의 경제파산 이후 중국이 반대하는 조건에서 북한이 무력통일 전략을 현실화 할 것으로 진단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의 전통적 전략이 유효하다면 ‘평화통일 전략’이 있을 것이다. 전통적 평화통일 전략은 남한 내 지하당(黨) 건설, 각종 소요 유발 등 대남전선전술에 따라 남한에 친북정권이나 연북(聯北)정권이 들어서게 하여 최종적으로 고려연방제에 의해 통일하는 것이다. 김일성은 “우리는 2천만, 남한은 4천만이니 남한 인구 절반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면 우리 숫자가 배를 넘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김일성 사망과 1990년대 중반 ‘대아사 기간’ 이후 김정일의 절실한 과제는 핵개발 등을 매개로 한 ‘체제 유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김정일은 자신의 정권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존재인 미국, 남한에 대해 핵개발 등을 활용하여 대응하고, 특히 북한의 ‘잠재적 대체세력’인 남한에 대해서는 전통적 대남 접수전략 보다 남한 내부를 흔들면서 이익을 취하는 전략, 다시 말해 남한내에 북한에 우호적인 세력을 키우고, 적대적인 세력(보수세력)을 약화시키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이 때문에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6.15 실천’을 체제 유지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해왔으며, 이에 따라 남한 내 친북단체들도 ‘6.15 실천’이 2000년 이후 가장 중요한 사업과제로 되어 왔다.
또 한편, 김정일의 체제생존 전략은 전통적인 대남 부서에도 일정한 변화가 초래되었다.
2) 북한의 대남사업 기구, 역할과 기능
북한의 공식적인 대남사업의 대표부서는 노동당 통일전선부(통일전선사업부)다. 통일전선부 외에 대외연락부(연락부사회문화부)와 작전부, 35호실이 있다.
이밖에 인민무력부 내에 총참모부 정찰국, 국가안전보위부 내 남조선국, 반탐국(反探局) 등이 대남사업에 참여한다. 이중 35호실은 중앙당 본부청사에 들어가 있고, 나머지 3개 부서는 모두 ‘3호 청사’에 있다. ‘3호 청사’라고 하면 곧 대남사업 부서들을 의미한다.
북한의 중앙당, 3호 청사, 군부대, 군 대남사업부, 국가안전보위부, 군 보위사령부 및 각종 외화벌이 부서 등의 명칭은 유난히 ‘숫자’로 불려지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스위스 비밀은행 계좌 등 김정일의 개인 통치자금을 담당하는 곳은 중앙당 38, 39호실이다. 이처럼 ‘숫자’를 붙이는 이유는 명칭을 보아서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부서인지 모르게 위장하기 위해서다.
통일전선부는 해외에 있는 조총련, 범민련, 고려인협회, 재미재캐나다 등의 친북(親北)조직을 통해 대남사업을 벌이고 있다. 해외에서 활동한다는 점은 35호실과 같지만 노출된 활동을 한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공작원, 이른바 ‘고정간첩’을 보내는 부서는 대외연락부와 35호실이다. 대외연락부는 직접 남한에 공작원을 침투시키고 35호실은 외국에 공작원을 보내 대남사업을 하는 해외공작담당 부서다.
대외연락부는 공작원 교육과 국내외 지하당 구축이 주요 임무다. 대외연락부는 대남담당과, 해외담당과, 지원과 등을 두고 있다. 대남담당과는 남한 내 반정부 인사 포섭 및 지하당 구축과 1997년 이한영의 피살사건과 같은 테러임무도 담당하고 있다. 해외담당과 일본 중국 동남아 유럽 등의 해외교포 포섭 및 친남한 단체 와해공작 및 남한을 상대로 합법비합법적 방법으로 우회 침투하고 있다.
35호실은 공작원의 남한 침투 및 해외파견과 대남정보수집, 해외공작, 테러 등을 담당하고 있다. 1997년 7월‘깐수’사건과 1978년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 1987년 KAL기 폭파사건 등이 35호실 소행이다.
작전부는 공작원의 기본교육과 육해상 직접침투 후 주요시설 정찰, 무인 포스트 발굴 및 매몰, 테러와 장기간첩(고정간첩) 호송안내 임무를 하고 있다. 작전부에는 대남 육해상 작전과와 해외작전과, 지원과가 있으며 산하에 개성사리원(육상 연락소), 청진원산남포해주 연락소 등이 있다. 작전부는 산하에 공작원전투원 기본교육기관인 ‘김정일 정치군사대학’(구 금성정치군사대학)을 두고 있다. 작전부에서 길러내는 무장간첩을 ‘전투원’으로 부른다.
이렇게 볼 때 전통적인 스파이 활동 부서는 대외연락부 작전부 35호실이라고 할 수 있다. 통일전선부와 달리 노출되지 않는 ‘비합법 활동’ 위주이기 때문이다. 대남사업의 핵심 3개 부서는 김정일이 직접 통제하고 있다. 김정일이 대남사업을 관장한 것은 대략 1979년부터다. 1974년 후계자로 공인되고 당 조직비서 겸 정치국 위원으로 5년쯤 일한 다음 대남사업을 담당했다.
북한의 대남기구 중에서 특히 2000년 이후 합법기구인 통일전선부의 역할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3) 2000년 이후 통일전선부 사업의 확대
통일전선부에서 근무한 장철현(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원)은 “오늘날 남북관계는 ‘남한 정부와 북한 통일전선사업부와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며 “정치, 경제, 안보, 민간교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남북관계를 총괄하는 부서가 통일전선사업부이며, 대남공작 부서들 중 대남정책을 기획하는 두뇌 부서로서 선두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장 연구원은 “이는 권력의 집중화를 통해 조직관리를 최대한 단순화하고 실용화하는 북한 특유의 유일독재방식”이라며, “때문에 통일전선사업부의 속성과 조직구성, 전략전술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일전선부는 명칭 그대로 북한, 남한, 해외를 비롯한 광범위한 통일전선체 형성을 사업 목적으로 한다. 197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초까지 북한은 이른바 평화통일 방안(고려연방제 통일방안)에 기초하여 남한의 군사정권을 야당 중심의 민주세력으로 정권 교체를 하여, 그 정권과 연대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는 주한미군의 주둔과 중국의 개혁개방 등으로 무력통일 방안의 환경과 조건이 점차 약화되는 사정과 관련이 있다.
때문에 이 시기 대남전략의 특징은 남한 대중을 상대로 한 남한 내 야당 세력에 의한 민주주의 확산 유도전략이었다. 북한이 ‘민주주의 확산 전략’을 전개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남한의 민주주의를 강화시키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집권 여당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남한내 야당 세력을 지지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며, 이는 남한 체제를 교란약화시키는 것이 북한 대남전략의 1차 목적이기 때문이다.
통일전선부가 남한 내 민주화 세력을 중시했던 이유는 북한 입장에서 볼 때 남한내 민주화운동 자체가 정권을 반대하는 반정부 운동이었고, 더욱이 민족주의 의식을 자극시켜 ‘반미’까지 이끌어내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통일전선부의 기본 대남공작은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통일전선부는 평양시 중구역 연화동에 있는 한민전 초기 명칭인 ‘평양주재 한국민족민주전선대표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는 북한이 자신을 통일의 주체로 선전하는 한편, 남한의 민주세력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위장하여 거국적인 민주화운동을 통해 한반도의 통일을 지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1970∼80년대 북한은 동시에 남한내 민주주의 운동을 폭력혁명으로 확대하기 위해 지도세력 제거 등 폭력적 방법을 병행하였는데, 대표적 사례가 문세광 사건, 아웅산 테러, 현충문 폭파사건, KAL기 폭파 사건 등이다.
이같은 이는 남한 체제를 교란약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남한내 민주주의 세력 지원은 80년대 남한내 주사파의 형성과 확대과정에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남한 대학생 및 일반인이 한때 10만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같은 대남전략은 90년대 동구권 몰락 시기까지 진행되었다.
그러나 누적된 북한의 경제몰락과 공산권 붕괴, 이어진 90년대 중반 대아사 사태로 인해 북한의 공세적 대남전략은 7,80년대에 비해 상당히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2000년 6월 15일 김대중-김정일의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비합법 대남기구의 활동보다 합법 대남기구인 통일전선부의 사업이 크게 확대되었다.
1990년대 말부터 2007년 10월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 시기까지 통일전선부 사업의 기본 특징은 ‘햇볕정책 역이용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2001년 신년공동사설에서 '우리민족끼리' 전략을 공식 발표하기 전까지 과거의 평화통일 전략의 범위 안에서 햇볕정책 역이용 전략을 시험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6.15 정상회담 이후 ‘민족공조’를 부각시키며 '우리민족끼리'라는 표현을 대남전략전술의 기본 노선으로 활용하면서 남한내 친북반미 전략을 공식화하였다. 이후 북한의 ‘우리 민족끼리’ 전략은 햇볕정책 역이용 전략의 연장선에서 보다 구체화되고 정책화되었다.
또 이 시기부터 남한내 친북반미 진영은 인터넷 공간을 적극 활용하면서 음성적 활동에서 양성화 활동으로 크게 전환하였다.
하지만‘햇볕정책 역이용 전략’또는‘우리민족끼리 전략’은 동시에 80년대까지 북한의 공세적 대남전략에 비하면 잠정적이며 피동적 조치의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 배경은 내부적으로는 경제몰락과 부정부패 등 사회 시스템의 붕괴와 공산권 붕괴라는 결정적 외생적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
김일성 사망 후 90년대 중반부터 빗장을 걸어 잠그고 주민에 대한 극단적 감시와 통제로 체제를 유지하던 북한정권이 대화에 나올 수 있었던 배경도 갑작스런 독일식 통일을 원치 않는 한국의 국민정서와 그 기반에 토대하여 한국 정치권의 대북정책이 햇볕정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장기화되리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또 금강산이나 개성공단 등 제한적 개방정책으로 체제를 유지하려는 북한 정권의 이해관계에도 부합되기 때문에 선택한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북한의 남북대화는 대남전략인 동시에 생존전략의 측면을 갖고 있다. 때문에 2000년 이후 북한의 대남전략은 그 이전의 침투, 파괴 등 강성 접근보다 대화를 앞세운 경제이익 창출, 인물포섭, 정보 수집, 남한 내부 교란 등 유연성 접근을 우선시 해왔다.
또 7,80년대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을 앞세워 음성적으로 대남사업을 진행해 오던 통일전선 사업을 ‘우리민족끼리’ 이념을 부각시켜 양성화한 것이 매우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 구체 내용은 △남북관계를 경제적 이익에 국한시킬 것 △‘우리 민족끼리’ 이념으로 남한 내 북한 지지세력 확산 △남북화해를 이용한 반미 분위기 조성 등이다.
통일전선부는 1998년 이후 김정일의 햇볕정책 역이용 전략에 따라 사업의 범위가 늘어나면서 구성원이 종전의 1,500명 규모에서 3,000명으로 확대된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간 민간교류에서 북한은 통전부 인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또 인터넷이 광범위하게 도입된 남한의 현실에 맞게 사이버 침투를 위한 컴퓨터 업무 종사들이 늘어나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 등을 비롯한 인터넷을 통한 대남 선전전이 확대되었다. 통전부의 주요 대남 사업부서는 다음과 같다.
조국평화통일 서기국
조평통은 대외적으로 민간기구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통일전선부 본부의 모든 기능과 역할을 함축시킨 중요 부서로서 대남전략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조직이다. 회담과 관련한 연구와 실행, 인물포섭, 정보수집 등을 전담한다.
남조선문제연구소
남한에 대한 연구가 목적이기 때문에 연구자들로 구성돼 있다. 정치, 경제, 군사, 사회문화, 인물담당 등의 연구부서를 가지고 있다. 한국경제의 시장 조사, 주가 분석, 인플레 현황 등을 체크하여 향후 전망을 포함한 한국경제 보고서를 김정일에게 주 1회 보고한다. 남한의 주요 인물도 분석하여 김정일에게 보고한다. 북한에서 가장 큰 남한관련 도서관을 가지고 있다.
101 연락소
대남 심리전을 담당한다. 신문, 문예물, 삐라나 각종 인쇄물, 인터넷 침투를 목적으로 활동한다. 제작물을 한국인 명의로 또는 해외동포 명의로 작성한다. 생산된 제작물을 남한에 침투시켜 통전부의 대남전략에 맞게 남한 정세를 유도하거나 왜곡하는 역할을 한다. 제작물은 신문, 월간잡지, 삐라, 각종 인쇄물들, 소설, 시, 가사, 인터넷 동영상, 사진, 필름제작 등이다.
김정일을 선전하는 제작활동도 하고 있으며, 노동신문이나 조선중앙통신, 조선중앙TV총국, 민주조선 등을 비롯한 주요 매체에 배포한다. 노동신문 5면은 101 연락소의 독점 게재물이다. 한국인 명의의 서사시, 논설, 정론 등을 비롯한 남조선 관련 글을 싣고 있다. 2002년 후 5국과 인터넷 담당 부서를 26 연락소로 옮겼다.
26 연락소
일명 ‘구국의 소리방송’으로 불린 이 연락소는 남한 내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위장돼 있다. 전파방송을 통한 대남심리전과 함께 한국내 간첩, 통전부 영향 하에 있는 좌익세력, 친북파들에게 전파를 통한 지령전달을 목적으로 한다. 한국의 인터넷 도입 발전에 맞게 101 연락소의 5국을 추가하고 1999년부터 ‘구국의 소리방송’을 폐지하고 ‘우리민족끼리’ 인터넷 연락소로 바뀌었다. 인터넷 사이트는 ‘우리민족끼리’ 외에 수십 개가 존재한다.
813 연락소
강남출판사, 평양출판사, 목란출판사로 불리는 813 연락소는 통전부내 대남침투용 도서들과 전단지, 잡지, 신문, 위조 신분증을 비롯한 각종 서류들을 인쇄하는 출판연락소다. 인원은 100여명이며, 제작물들을 남한의 생산품과 똑같이 모방하기 위해 모든 자재를 일본 조총련을 통해 들여오는데, 비용은 조총련 산하 대동무역 회사에서 담당하고 있다.
평양주재 한국민족민주전선 대표부(한민전)
한민전은 북한의 전통적인 대남 전위기구이다. 한민전은 남한 내에서 활동하는 것처럼 위장해왔는데, 한반도 전역에서 북한이 대표성과 합법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날조하기 위한 것이다.
한민전은 남한 내에 광범위한 친북조직이 존재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그 전위조직으로 자칭하며, 구국의 소리방송이나 26 연락소의 인터넷 침투를 통해 남한내 간첩, 친북좌파 세력에게 통전부 정책에 맞는 행동을 지령하거나 유도한다. 7, 80년대부터 남한내 각종 행동지침, 폭력시위 등은 한민전을 통해 지시가 하달되었다.
해외의 한국인들을 포섭하는 공작도 한민전 산하 지사에서 담당한다. 한민전은 정치분과, 선동분과, 보도분과로 나누어져 있으며, 본사 인원은 50명, 지사인원은 60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최근 한민전 활동에 범민련 활동이 추가되었다는 분석이 있다. 또 한민전은 2002년 이후 ‘반제민전’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교류 1과(대남교류)
남한내 친북 조직을 담당한다. 조평통 산하에 민주노총, 범민련, 통일연대 등 친북조직 담당과들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통전부가 친북조직 관리를 주요 사업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남한 체제의 약점을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예컨대 남북간 협상이 제기될 때 남한은 야당, 언론, 시민단체들을 설득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북한은 친북단체들을 활용하여 여론을 유리하게 확산시키거나 협상전략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다. 지난해 일심회 간첩단 사건에서 나타나듯 미군기지 이전 반대투쟁, 반FTA, 국가보안법 철폐 등 여론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3. 북한 노동당의 ‘보도 방향’과 남한내 폭력시위의 관련성
북한의 신문, 방송 등은 남한을 비롯한 외국의 뉴스를 일괄적으로 조선중앙 통신으로부터 받는다. 예를 들어 6자회담 뉴스는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하고, 조선중앙방송 등이 이를 인용 보도하는 형식이다.
북한 매체는 남한 및 해외관련 뉴스를 철저히 노동당의 지침에 따라 보도한다. 그 구체적인 과정을 보면, 먼저 조선중앙통신이 노동당 선전선동부 출판보도과에 남한과 외신 자료, 사진, 동영상을 보고하면 출판보도과에서 해당 선전 자료를 선정해 김정일의 승인을 받아 보도 지침을 내려준다.
조선중앙통신의 남한 및 국제담당 부서는 5국 2세포이다. 5국 2세포가 남한과 외국의 뉴스를 받아 노동당 선전선동부 출판보도과에 보내주는 한편, 자체적으로 참고신문과 8호 통신, 남조선 정세분석, 기자 참고자료 등을 만든다.
노동당 선전선동부는 조선중앙통신이 제출한 자료에 근거하여 해당 사진, 동영상, 외국 및 남한의 신문 방송 보도 내용에 대한 보도지침을 내려준다. 기사 내용은 어느 수준까지, 어떤 사진을 몇 장 정도 게재하는 것까지 지침을 준다. 북한의 출판, 언론 매체들이 거의 똑같이 남조선 관련 뉴스와 외국소식이 보도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전선동부 출판지도과는 해당 자료를 매체에 내려 보낼 때 그 내용을 바탕으로 어떤 논설, 사설 등을 게재해야 할지 지정해 준다.
출판 보도 부문의 경우 모든 신문, 방송, TV에 매월 초 노동당 선전선동부 출판보도과에서 내려 보낸 ‘월간 보도방향’이 전달된다. 이 ‘월간 보도방향’에서 남한이나 일본, 미국 등과의 국제문제에 대처하는 기사, 논설, 사설, 사진 등을 어느 방향에서 어떤 강도로 써야 하는지 규정해 준다. 예를 들면 10월의 경우 다음과 같이 지침이 하달된다.
[10월 보도방향]
ο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의 위대성 선전
- 노동당 창건 10월 10일과 관련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당 창건 업적과 조선노동당의 위대성 선전을 강화할 것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당 창건 업적을 칭송하는 논설, 정론, 위대성 기사들을 집중적으로 편집할 것.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당 창건 업적을 깊이 학습하는 조직, 단체, 기관 기업소들에 대한 소개 편집물을 집중적으로 방송할 것
- 10월 17일‘타도제국주의 동맹’결성 72돌을 맞으며‘ㅌ ㄷ'의 기치를 이어온 조선노동당의 순결성과 주체성에 대한 선전을 강화할 것
*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발표하신 노작“조선노동당은 영광스러운 전통을 계승한 자랑스러운 당이다”에 대한 사설, 논설들을 현 정세의 요구에 맞게 방송할 것
*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발표하신 노작 “조선노동당은 영광스러운 전통을 계승한 자랑스러운 당이다”에 대한 노작 학습을 잘 해 나가고 있는 해당 단위에 대한 긍정 기사, 개별적 일군들에 대한 소개 편집물을 내보낼 것
* 영광스러운 전통과 조선노동당의 영광 찬란한 업적을 깊이 학습하고 있는 고등중학교, 대학들에 대한 편집물을 내보낼 것
‘월간 보도방향’은 이밖에 △사회주의 애국교양, 우리민족 제일주의 교양 △ 당의 선군정치, 군민일치 교양 △사회주의 경제건설(공업, 농업) △계급교양, 미 일 제국주의 반대 교양 등으로 매월 바뀐다.
‘월간 보도방향’을 받은 매체들은 정치부, 문화부 등 각 부서 특성을 고려하여 보도내용을 세분화 해주며 기사 작성을 분담받은 부서들은 각 기자들에게 마감 날짜를 지정해 써야 할 글을 분담해 준다. 부서별로 기사, 논설 등이 완성되면 출판 검열을 마쳐야 한다. 방송의 경우 검열 과정은 다음과 같다.
ο 기자는 작성한 기사를 해당 부서장의 검열을 받고 사인을 받은 후 편집원에게 넘긴다. 부서장은 글이 해당 목적에 맞게 작성되었는지, 현 정세와 당의 방침대로 씌어졌는지 검토하고 사인한다.
ο 편집원은 문장과 단어, 철자가 틀린 곳이 없는지 검열하여 편집부장에게 넘긴다. 편집부장이 다시 글을 보고 총체적인 검토를 한 후 그날 작성된 원고들을 모두 묶어 출판검열국(매 도, 시에 있음)에 가져간다.
ο 출판검열국의 신문, 방송 검열원들은 원고를 읽고 이상이 없으면 ‘국가검열 승인’ 도장을 찍어 준다.
ο 검열을 마친 글을 편집원이 편집하여 편집장, 초급당 비서, 방송위원장의 승인을 받고 사인을 받은 후 편집실 방송편집원과 방송원에게 넘겨주어 방송편집을 한다.
ο 편집부장이 방송을 들어보고 이상이 없으면 초급당 비서와 방송위원장의 승인을 받는다.
ο 방송위원장은 다음날 방송 편성표를 당 선전선동부 출판보도국에 가져가 승인을 받은 후 방송한다.
신문, 방송 등 북한의 모든 매체는 이와 같은 당의 지도 아래 보도된다. 이 때문에 남한에 대한 보도는 모든 매체가 보도방향과 수준이 거의 동일하다.
촛불사태가 ‘반미’ ‘이명박 아웃’ 등 정치적 성격으로 변질되어 최고조에 이른 ‘6. 10 항쟁’ ‘효순 미선양 추모’ ‘6. 15 8주년’ 전후하여 노동신문 등은 남한의 촛불시위를 부추겼다.
6월 10일자 노동신문은 ‘투쟁전통은 살려야 빛난다’는 제하의 논설에서 “6월 인민항쟁은 그 완강성과 격렬성에 있어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전인민적 항쟁이었다”며 “남조선 인민은 6·10 민주항쟁기념일 21주년인 10일, ‘6월 항쟁’의 전통을 살려 반정부 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선동했다.
노동신문은 또 ‘반역도당에게 차려진 단호한 징벌’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대규모 촛불집회는 친미사대에 환장돼 남조선 사회의 자주화와 민주화, 조국통일을 악랄하게 반대하는 이명박 일당에게 내려진 응당한 징벌”이라고 주장했다. 기사는 이어 “지금 이명박 역도에 대한 남조선 인민들의 치솟는 분노가 거대한 촛불바다가 돼 남조선 전 지역에 펼쳐지고 있다”며 “남조선에서 새로 출현한 정권이 불과 3개월도 못돼 인민들의 버림을 받고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빠져보기는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고 비난했다.
또“남조선 인민들은 이명박 일당의 회유기만 술책에 절대로 속아 넘어가지 말아야 하며 최후의 항복을 받아낼 때까지 전민 항쟁의 불길을 세차게 지펴 올려야 할 것”이라고 폭력시위를 선동했으며, 조선중앙방송도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노동신문의 이같은 보도방향은 과거에는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 사회의 잘못된 모습을 선전하려는 목적이 강했으나, 2000년 이후에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남한 내 친북반미 단체들을 부추기는 목적이 우선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노동당의 지도 아래 모든 언론보도 매체가 똑같은 내용을 보도하기 때문에 노동당 통일전선부의 영향 아래에 있는 남한의 친북반미 단체들에게 인터넷 등을 통하여 일정한 방향의 보도 지침이 내려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남한내 친북단체들의 인터넷 웹사이트도 주장하는 내용이 대동소이한 것이다.
지난 9월 28일 ‘실천연대’ 간부들을 구속한 공안당국에 따르면 ‘실천연대’의 혐의는 단순히 북한 체제를 찬양·고무(국가보안법 7조 위반)하는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전해졌다. 9월 27일 전국적으로 압수수색을 벌일 당시 제시된 영장에는 ‘인터넷 방송 6·15 TV를 운영하면서 북한의 언론 보도 내용을 그대로 전재하는 등 북한 자료를 공개적으로 유포했다’는 혐의가 적시된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넷 방송 6·15 TV’의 방송 내용이 ‘북한의 언론보도 내용을 그대로 전재한’배경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노동당의 지침에 따른 보도방향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남한 친북반미 단체들 중 인터넷 방송 등을 비롯하여 보도 형태를 갖춘 웹사이트는 수 십 여개로 파악되며, 민중의 소리, 통일뉴스, 자주민보 등2000년 이후 이른바 ‘제도권’으로 진입하여 합법적 공간에서 친북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도 늘어났다. 이들은 형식적으로는 노동당의 지침을 받고 있지 않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보도의 행태와 방향을 분석해보면 노동당의 보도 방향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남한에서 활동하는 친북반미 단체들은‘실천연대’를 비롯하여‘진보연대’'청학연대'‘민노총’'전교조'‘한총련’등이 있으며, 이들 중 주류세력은 상당수 80∼90년대 주사파 활동 경험을 갖고 있다.
이들 단체들 및 구성원들은 구공산권의 붕괴와 북한경제의 몰락, 김일성의 사망, 만성화된 식량난 등으로 인해 80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숫자는 줄었다. 그러나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2000년 이후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음성(陰性)지대에서 양성(陽性) 지대로 이동한 것이 특징이다.
이들 단체들은 80년대 사고방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실천연대’'진보연대’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 왔지만 이들 친북운동의 뿌리는 8, 90년대 친북 주사파들이 주도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범민련),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등에 닿아있다.
이들은 8,90년대‘북한방송 전문 청취팀(Broadcasting Team, BC팀)’을 운영하며, ‘구국의 소리’'구국의 횃불’'구국의 광장’'바른 삶’'애국’'새 세대’'새 날’등의 여러 이름으로 북한방송의 녹취 간행물을 제작하여 이를 전국 지부에 내려 보내 학습하게 하였다. 최근(1999년) 북한의 대남공작부서에서 운영하는 ‘구국의 소리’ 방송이 중단되었지만 인터넷을 통해 내용 공급을 계속하고 있다. 그 결과 한총련의 연간 사업계획(흔히 ‘총노선’이라 부름)과 같은 공식문서들을 보면 북한의 대남방송과 글자 한 자도 틀리지 않는 똑같은 문구를 매우 쉽게 발견할 수 있다.
4. 친북반미 단체 활동의 陽性化 현상
1990년대 구공산권 붕괴 이후 한국의 학생운동은 급격히 퇴조했다. 2000년 이후에는 한총련이 학생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하였다. (중략)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친북운동의 새로운 특징은 그동안 북한과 거리를 두던 노동계와 시민운동 단체들이 대세를 의식하면서 이에 합류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민노총과 민노당이 친북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민노당 중앙위원회는 북한 핵무기 보유선언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밝히려는 결의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는 그만큼 당시 민노당 내부에 주사파 계열의 목소리가 컸다는 증거이다.
노동계와 시민단체들이 친북운동에 합류하면서 이들을 포괄하기 위한 단체들이 조직되는데 ‘6.15남북공동선언실현과 한반도평화를 위한 통일연대’(통일연대)가 대표적이다. 2001년 3월에 발족한 통일연대는 전국연합에 민주노총, 민노당, 민변 등이 추가된 모양새를 갖고 있으며(참여연대는 참관), 그 후 반미친북활동의 대부분이 통일연대의 이름으로 이루어져 왔다.
아울러 2003년 5월 전국연합, 민노당, 민노총 등이 전국민중연대를 만들어 반미친북활동을 전개해왔다. 이처럼 기존의 전국연합, 한총련 등에 의해 국한되었던 반미친북운동에 노동계와 시민운동 등이 가세하면서 그 세가 커지게 되었으며, 사회적 영향력도 확대되었다. 결국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이 친북활동을 사회적으로 합법화, 대세화 시키면서 비롯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친북단체들은 좌파 정권 10을 거치면서 합법적 공간에서 활동해왔으며 심지어 노무현 정부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한나라당 정갑윤 의원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2007년 실천연대는 ‘한반도 평화구축’ 사업 명목으로 정부로부터 비영리단체 보조금 6000만원을 지원 받았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앞으로 좌파 정권 10년동안 친북반미 단체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은 사실이 계속 밝혀질 것으로 예상된다. 실천연대는 산하의 ‘한국민권연구소’(대표 김승교)와 함께 2005년 12월 ‘先軍정치 토론회’ 개최를 시작으로 북한 핵개발 지지, 주한미군 철수 등 친북반미 공개활동을 계속해왔다.
또 실천연대의 하부조직인 ‘6.15공동선언실천 청년학생연대’(청학연대)는 2005년 ‘12월 투쟁지침’을 통해 12월 8일~10일 개최된 '북한인권국제대회'의 각종 행사를 방해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청학연대는 '북한인권국제대회'에 대해 “북의 체제를 헐뜯고 반북여론을 조장하기 위한 대회”라며 북한인권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향후 6자 회담과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투쟁지침을 통해 조직적으로 북한인권국제대회를 방해하고, 북한인권운동을 주도하는 대학생들과 물리적 충돌을 빚기도 했다.
청학연대는 상임대표단체로 범청학련 남측본부, 통일시대 젊은 벗,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등이 참여하고 있다. 이 단체는 인터넷 포털 ‘다음’에 카페(http://cafe.daum.net/615youngtongil)를 개설하여 2007년 ‘전국 청년학생 선군정치 연구발표회 공개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친북반미 양성화 활동에 앞장섰다.
이들은 하부 단위에 연구주제를 내려 보내면서 구체적인 지침도 첨부하여 선군정치의 정당성을 유도하였다.
▲연구주제 설정 => 중앙 기획위원회에서 제출한 기초적인 연구주제 틀을 비롯하여 각 단위별로 자유롭게 주제를 선정한다. (처음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만큼 방대한 주제와 자료는 삼간다).
=> 자기 특색을 살릴 수 있는 주제 설정을 지향한다. (예: 과학과 공학 연구 학생들은 선군정치의 국방공업과 과학을 연구, 북한학, 통일학, 정치외교학을 연구하는 학생들은 선군정치의 시원, 통일과의 관계, 한반도 정세에 미치는 영향, 문화관련 연구학생들은 북한의 문화, 경제를 연구하는 학생들은 북한의 경제, 진보정당운동에 참여하는 청년학생들은 대선과 맞물려 선군정치에 대한 정치적 연구).
=> 연구발표 글, 연구후기, 세미나후기 등을 글을 작성하여 인터넷에 발표
=> 선군정치 바로알기 포스터전시회(가) / 선군정치 바로알기 출판물 독서 전시회(가)
이밖에 민중의 소리, 통일뉴스, 자주민보 등 친북반미 성향의 군소 인터넷 매체들은 친북단체들의 양성화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들 인터넷 매체들은 주로 2000년 이후 나타났으며, 6.15 공동선언 실천을 주장하면서 북한의 대남 노선과 같은 편집방향을 보여왔다.
이들 친북매체 중에는 특이한 사례도 발견되는데, 과거 북한으로부터 받은 지침을 곧이곧대로 해석하여 현재의 북한당국보다 더 교조적인 경우도 있다.
주로 노동신문을 인용하는 ‘자주민보’는 김정일도 인정한 북한 식량난을 적극 부정했다. 이 매체는 2008년 5월 미국의 대북 식량 50만 톤 지원이 언론에 보도되자, ‘대북 쌀지원 하며 아사 운운, 더 큰 문제 야기’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북한주민의) 아사 운운하는 것 자체가 북의 입장에서는 존엄의 훼손이며 모독으로 될 수 있다”며, 북한의 식량난을 부인했다.
매체는 “북의 최근 생활경제정책은 단순히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수준이 아니라 삶의 질과 복리를 증진하기 위한 쪽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이는 새해 공동사설에서도 강조했던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또 “낙농업을 발전시켜 고기와 치즈, 요구르트 같은 유제품 생산을 늘리고 과수원을 확대하여 풍요로운 먹을거리를 생산하는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은 북의 언론을 통해 거의 매일 보도되다시피 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특히 이 매체는 북한을 방문한 노길남 ‘민족통신’ 대표와의 인터뷰를 인용, 미국이 북한에 50만t의 식량을 지원하기로 한 사실에 대해 “식량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사료로 만들어 가축도 기를 수 있기 때문에 북은 미국의 인도주의적 식량지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주민보’는 북한을 대변해온 대표적 친북매체인데, 북한을 그냥 ‘북’이라고 표기하여 한국을 인정하는 ‘북한’의 ‘한’(韓)도 단어에도 거부감을 나타낸다.
이같은 현상은 북한당국의 이미 오래 전에 내린 지침을 그대로 고수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5. 결론
4개월 여 촛불시위를 주도한 단체는 광우병국민대책회의’(이하 ‘대책회의’)였다. ‘대책회의’는 2007년 9월 조직된 ‘진보연대’가 주축이었다. ‘진보연대’는 촛불시위를 ‘반미’와 ‘이명박 정권 타도’로 몰고 가면서 평화적 시위를 폭력시위로 변질시킨 핵심세력이었다.
또‘진보연대’를 결성한 모(母)단체는 ‘6.15공동선언실천연대’였고, 검찰은 김승교, 강진구 등 ‘실천연대’의 핵심 인물들을 체포하면서 북한 통일전선부와의 관련성을 밝혔다.
따라서 남한의 불법폭력시위와 북한의 대남전략과의 관련성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 관련성의 뿌리는 80, 90년대 주사파에 닿아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지난 10년간의 대북 유화정책으로 인해 친북반미 단체들이 북한의 대남전략의 영향을 더욱 직접적이고 능동적인 형태로 받아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 친북단체 활동의 양성화 현상은 대북정책을 둘러싼 南南갈등과 우리 사회의 좌우 갈등을 증폭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으며, 이같은 영향의 결과 ‘진보연대’ 등 친북단체가 촛불시위를 불법폭력시위 양상으로 변질시키는데 핵심적 역할을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에 비해 친북단체와 주사파는 상대적으로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잘못된 대북정책을 거치는 동안 우리 사회는 올바른 방향성을 상실하고 현상적 평화와 본질적 평화를 구분하지 못했고, 국내적으로는 좌우갈등의 내상(內傷)이 깊어졌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이같은 사회갈등의 심저(心底)에는 반미친북 단체의 활동이 놓여져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 그보다 더 깊은 심저에는 북한이라는 존재가 있음을 통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장기간 계속된 촛불사태는 ‘6.15 8주년’을 거치면서 변질되어 정권퇴진, 반미(反美)로 전환되면서 결국 ‘한국사회 흔들기’로 귀결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앞으로도 제2, 제3의 촛불사태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계기는 反세계화, 反美 코드로 인해 촉발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전망되며, 만약 그럴 경우 친북반미 단체들은 또 다른 ‘얼굴’로 폭력시위를 주도할 가능성이 잔존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Konas)
손광주(데일리NK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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