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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침몰과 북한의 대남전략 동향

좌파정권이 추진한 한미연합사 해체결정 등 훼손된 안보태세를 복원하고 왜곡되어있는 국민 특히 20~40대의 안보의식을 바로 잡는 계기로 삼아야

Written by. 박승춘   입력 : 2010-04-24 오후 8: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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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 내용은 4.23 '천안함 침몰 전말과 우리의 대응방향'을 주제로 개최된 긴급세미나에서 前국방정보본부장 박승춘(예비역 육군 중장) 장군의 발표내용입니다.<편집자 주>  

1. 들어가는 말

    천안함이 서해 백령도 근해에서 3월 26일 21:22분,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나면서 침몰된 지 거의 한 달이 되어 간다. 46명의 해군장병들이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국민들은 말할 수 없는 비통함과 분노를 느꼈으며, 이명박대통령께서는 희생당한 장병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다가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천안함 침몰 사건 초기에 사건원인을 두고 외부폭팔, 내부폭팔, 암석충돌 그리고 심지어 철판 피로 등 여러 가지 설이 제기 되면서 북한과 관계가 없는 것처럼 호도되었지만 민군과 유엔이 참여한 합동조사단이 인양된 함미를 1차 조사한 결과가 “갑판 아래쪽 바닥이 역(逆)V자 모양으로 솟구쳐 올랐고 절단면은 너덜너덜 찢겨졌다”고 발표되면서 천안함이 중(重)어뢰의 최근접 수중 타격에 의한 버블제트(일종의 물대포 현상) 1차 팽창으로 두 동강난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면서 북한의 소행일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우리가 과거의 국지도발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이것이 북한의 소행이냐 아니냐의 여부를 아래와 같은 4가지 요소를 기준으로 판단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도발 사건이 발생한 장소, 시간, 방법, 시기이다. 발생한 장소와 시간은 북한의 소행여부를, 방법과 시기는 도발을 일으킨 저의를 판단하는데 중요한 잣대가 된다.

    따라서 필자는 군복무기간 북한정보업무를 수행한 경험을 기초로 하여 천안함 침몰사건과 북한의 대남전략동향을 분석하고 1996년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부터 천안함 침몰사건까지의 일련의 사건을 통해 북한의 도발과 대남적화 전략의 연계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2. 장소, 시간 면에서 본 북한도발의 연관성

    먼저 이번 천안함 사건이 발생한 장소는 서해 백령도 근해로 지금까지 ‘99년연평해전’, ‘02년제2연평해전(서해교전)’, ‘04년NLL침범’, ‘09년대청해전’ 등 북한의 도발이 빈번했던 장소로 일차 북한의 소행으로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사건 발생시간이다. 언론에 보도된대로 천안함이 침몰된 시간은 21시22분이다. 이 시간은 장병들이 하루의 작전을 마치고 간편 복장으로 휴식을 취하는 취약시간이었을 뿐 아니라 설사 침몰 사실을 알더라도 야음으로 인하여 후속 구조활동이나 원인규명에도 제한을 받는 시간이었다.

    이는 북한이 2009년 10월 6일 군사분계선(MDL)에서 북쪽으로 42.3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임진강 상류의 황강댐에서 예고 없이 새벽 3시에 강물을 대규모로 방류하여 하류인 경기 연천군 일대에서 야영을 하던 6명이 실종된 사건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이처럼 천안함 침몰 사건은 장소와 시간 측면에서 보았을 때 처음부터 북한 소행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 명확한 근거를 찾아 판단했다면 혼란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3. 도발 방법과 시기로 본 대남적화전략과 연계성

    북한의 도발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대남적화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하면 북한의 도발은 대남적화통일 전략을 추진하기위한 도발인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도발은 우연이란 있을 수 없으며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고 준비하여 도발한다. 따라서 그 저의를 판단하는데 가장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도발방법과 시기이다.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시기를 선택하고 방법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가. 북한 도발의 시기별 분류

    먼저 6․25전쟁이후 북한의 군사적 비군사적 도발을 시기별로 분류하면 김일성 시대와 김정일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김일성은 노동당 중심으로 통치하였기 때문에 대남도발도 노동당 작전국이 주도하였고 도발형태도 청와대 기습사건이나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 특정 목적을 제외하고는 주로 대남공작을 위한 은밀침투가 주류였다. 그러나 ‘94년 김정일 집권 이후 군을 중심으로 선군정치를 실시하면서 대남도발도 인민무력부 정찰국이 주도하면서 정규군을 이용한 공개적인 도발을 주로 자행 하였다.
  반면 북한의 도발을 남한의 정치시기와 연관하여 분석하면 김영삼 대통령까지 즉 보수정권 시기에는 대남공작을 위한 은밀침투를 주로 자행했으나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시기 즉 좌파정권 시기에는 정규군을 이용한 공개적인 도발을 자행하면서 대남전략차원에서 특정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남북한이 서로 ‘짜고치는 고스톱’ 같은 도발을 자행하여 우리 국민의 판단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 시기와 방법을 치밀하게 선택하고 준비하여 자행하여 왔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시기에 와서는 박왕자 피살사건이나 연천 물폭탄 사건 등에서 보듯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마치 남북관계를 파탄내는 것처럼 유도하여 국민과 이명박 정부를 이간시키려는 목적으로 도발을 자행하고 있다.  

    따라서 96년 강릉잠수함 침투사건부터 천안함 침몰사건 까지 북한의 주요 도발 사례를 대남전략차원에서 그 시기와 방법을 분석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96년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1996년 9월 18일 새벽,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해안으로 북한 상어급 잠수함 한 척이 공작조를 복귀시키기 위해 해안으로 접근하다 바위에 걸려 좌초되면서 시작되었다. 상어급 중형잠수함에 25명의 승조원들이 칠성산, 오대산, 향로봉이 위치한 강원도 정선군, 평창군, 고성군 등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도주하면서 무려 49일간에 걸쳐 대침투작전이 실시되었고, 무장공비 1명을 생포하고 13명을 사살되었으며, 승조원 11명은 사체로 발견됐다. 작전 기간 중 우리 측은 11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4명이 피살되는 인명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북한 잠수함 승조원 25명을 포획하기위한 49일간의 장기간의 대침투 작전과정은 TV와 언론을 통해 운동경기처럼 거의 생중계되면서 국민들을 북한의 군사적 위협과 남북 긴장상황을 실감할 수 있게 만들었고, 이는 ‘97년 대선에서 남북화해 협력과 긴장완화를 주장하는 김대중 후보의 공약에 국민들이 지지를 보내는데 기여했고 김대중 후보는 당선 후 소위 ‘햇볕정책’을 추진하면서 국민 정신무장을 해제하고 반미감정을 주입하였고 그 결과가 2002년 효순이․미선이 사건으로 나타났게 되었다.

   (2) ‘99년 제1차 연평해전’

    북한경비함이 99년 6월 6일부터 매일 북방한계선을 넘어와서 몇 시간씩 한국 영해에 머물다 돌아가곤 했으나, 해군은 ‘선제사격 절대 금지, 확전 금지, 서해 북방한계선(NLL) 고수, 슬기롭게 대처’라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작전 지침에 따라 자위권을 행사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다가 9일째 되는 6월 15일 오전 북한 경비정 4척이 북방한계선 남쪽 2㎞ 해역까지 내려오자, 한국 해군이 고속정과 초계함 10여 척을 동원해서 오전 9시 7분과 9시 20분 두 차례에 걸쳐서 선체를 충돌시키는 밀어내기 식으로 공격을 감행했고 충돌공격을 받은 북한 경비정 등산곶 684호가 25㎜ 기관포로 우리 측 고속정 325호에 선제공격을 가해 오자 한국 해군이 초계함의 76㎜ 함포와 고속정의 40㎜ 기관포 등으로 응사해 북한 어뢰정과 경비정을 명중시켰으며, 이 교전에서 북한 어뢰정 1척과 중형 경비정 1척 등 2척이 침몰했고 다른 경비정 3척도 크게 파손된 채 퇴각하였고, 우리 군도 고속정과 초계함 등 2척도 북한 어뢰정이 발사한 27㎜ 함포를 맞아 선체 일부가 파손되었고 장병 7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99년 제1차 연평해전’이다. 이 교전에서 남북한 정규 해군이 서해에서 근 일주일 동안 대치하는 장면이 그리고 6월 15일 쌍방해군 함정이 충돌하면서 북한함정의 선제사격으로 교전이 발생하고 쌍방이 상당한 피해를 보는 상황이 국민들에게 전파됨으로써 또다시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꼭 1년 후인 2000년 6월 15일 남북한 최초의 정상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되었고 정상회담 마치고 성남비행장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의 제1성이 “이제 전쟁은 없다”고 했을 때 많은 국민들이 열광했다.

    이와 같이 제1차 연평해전은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적인 회담으로 만들었고 북한은 6.15공동선언에서 연방제통일을 인정받았으며 지속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안정적으로 추진 할 수 있도록 그 발판을 제공하였다.

    (3) 2002년 제2연평해전

    제2연평해전은 2002년 6월 29일 북한경비함 등산곳 684호가 NLL을 침범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으로 쌍방간의 교전은 오전 10시 25분부터 31분간 진행되었다. 선제사격을 못하는 우리 해군 참수리357호 경비정이 북한경비함의 NLL침범을 차단하기 위해 접근하자 북한경비함의 기습사격으로 참수리 357호는 258발의 포탄을 맞고 예인 중 침몰했으며 이에 우리 해군도 북한 경비정(등산곶 684호)을 향해 76㎜ 함포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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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석흥    수정

    지금이라도 친북좌파성향의 재판관과 각 기관 및 부서에서 암약하고있는자들을 징치하기 위하여 비상계엄을 선포하고국가 보안법에따라 사법처리의 수순을 밟아야 올바른 정부라 할 것이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10-09-19 오후 7:3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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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태한    수정

    맞은 자가 때린 자를 말로 욕하는 것을 나무랄 수 없다. 부당하지도 않다. 그런데 왜 맞았는가? 누글 한대 또는몇 대 때렸을 때 그 이상의 보응을 받는다면 다시는 그 사람을 때리지 못할 것이다. 이스라엘을 보라. 우리는 왜 그렇게 못하는가? 겁나서? 북한을 불쌍히 생각해서? 같은 동포라서?</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

    2010-08-03 오전 8: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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