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敵'표현, 아직은 필요하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참여정부의 안보정책 구상집인 ‘평화번영과 국가안보’에서 북한에 대한 ‘주적’(主敵) 개념 대신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으로 대체한 것은 현 시점에서는 시기상조의 조치로 보인다. NSC측은 "세계적 추세, 국민의 안보의식, 군 내부의 교육 필요성, 남북관계 등을 고려해 주적개념을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또 "주적 개념을 담은 국방백서가 발간된지 4년이 지났으며, 그 사이에 안보 상황 등이 많이 변하지 않았느냐"며 "올 5월 국방부가 국방백서를 재발간할 경우 재검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국방백서 발간의 주무부처인 국방부의 차영구 정책실장도 "백서 발간은 정부의 안보정책 구상 틀 내에서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말해 결국 '주적' 표현은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NSC측이 주적개념 재검토의 이유로 내 세우는 '안보상황의 변화'나 '남북관계의 진전'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핵·미사일 등을 포함한 북한 군사력이 남한에 덜 위협적일 만큼 줄고 북한이 대남 혁명전략을 포기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또 북한은 '선군정치'를 강조하면서 군과 주민들에게 전쟁의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남북관계의 진전'도 군사적 긴장완화 부분에서는 전과 달라진게 조금도 없다. 지난 13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합의한 장성급회담 약속도 북한의 일방적인 불이행으로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아직도 남북한 군대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밀집배치되어 있으며 군사적 긴장의 강도가 전과 다를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만 주적 개념을 없앤다면 최전방에서 '주적'을 향해 총부리를 겨냥하고 있는 장병들에게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주적(main enemy)은 말 그대로 많은 적 가운데 가장 큰 적이란 뜻이다. 중국, 러시아 등이 ‘잠재적 적’ 으로 분류될 수 있는 마당에 우리 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북한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보수·진보 논쟁의 범주에도 들지 않으며 정치적 흥정거리도 아닌, 한반도의 실존적 현상이다.
우리가 왜 국민개병제를 실시하는가. 북한의 대남 적화를 막아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야 한다는 확고한 이념과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는 젊은이들을 의무적으로 군대에 보내고, 그 젊은이들은 말없이 이 신성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주적이 폐기되어야 한다면 국민개병제도 모병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주적 개념 없이도 북한의 위협에 능히 대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역으로 주적 표현을 유지하고도 얼마든지 남북 교류를 할 수 있다.
전문가들도 ‘주적’ 개념 수정이 국민 안보의식 붕괴로 확산되지는 않아야 한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재향군인회 안보연구소 정창인 박사는 “북한의 테러와 핵위협이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주적표현을 꼭 바꿀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며 “북한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주적표현 삭제를 요구했기 때문에 이렇게 정부가 말을 듣고 있는데, 굳이 주적이라는 표현을 빼야한다면 우리정부도 ´남한에 대한 적화통일 전략´ 표현 등을 빼달라는 역(易)제안을 했어야 했다. 그래야만 우리 국민도 안보문제에 대해 안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 박사는 이어 “김대중 정부부터 현재정부까지 북한에 대처하는데 있어서 법적체계 없이 정권차원에서 북한을 대하고 있는 게 문제”라며 “6.25 전쟁 이후 우리 헌법에서는 분명히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명시돼 있고,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표현을 바꾸는 건 현재 북한 위협을 잘못 평가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 박사는 또 “특정정당이나 개인이 갖고 있는 북한에 대한 호감으로 이런 식으로 법적체제 정비 없이 정책을 변화시키면 법적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것은 반드시 국민의 이해를 구한 후, 법 체제를 이룬 후에 접근해야 옳다”고 충고했다.
한국국방연구원의 백승주 박사는 “외교문서에 주적을 표기하는 것은 유연성 있게 대처할 수 없다고 보지만, 우리는 북한과 전쟁이 끝난 상태가 아니라 정전.교전상태이기 때문에 주적의식은 반드시 가져야 한다”며 “따라서 외교문서 외에 국방부 문서나 군 교육에 있어서는 반드시 ‘주적’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 박사는 또 “표현의 문제가 인식자체의 논란으로 확대될 수 있는 우려가 있기 때문에 우리도 참여정부의 이 같은 움직임을 일관되게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물론 한반도 주변정세나 남북관계의 발전적 변화에 따라 주적 개념도 장차 사라져야 할 대상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남북 군축 등이 급진전되고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바뀌어야 하는 등 갈 길은 아직도 멀다. 주적 개념 삭제에 신중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국방부가 오는 5월 발간할 ‘국방백서’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 우리는 지켜볼 것이다. (k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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