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러시아 왜 갔나?
강성대국 완성, 체제불안 극복, 식량조달 위한 窮餘之策(궁여지책)
북한이 금강산 재산권에 대해 강경 조치를 발표한 가운데 김정일은 러시아를 방문했다. 북한매체는 김정일의 방러 활동을 연일 신속하게 보도하며 동영상까지 공개하고 있다. 작년 5월과 8월에 이어 지난 5월 김정일의 방중 때와는 확연이 다른 모습이다. 김정일의 정상외교는 중국과 러시아에 국한되어 있으며 그것도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한 번씩 하면서 외유 길에 오르면 행여 암살이라도 당할까봐 비밀리에 숨어서 하는‘두더지외교’행태를 보여 왔다. 그런데 북한이 김정일의 러시아 행을‘비공식 방문’으로 규정하면서도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그만큼 이번 방러 성과에 대한 기대가 높고 대내외적으로 선전할 부분이 크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 러시아는 경제협력 강화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이해가 일치한다. 러시아는 자국과 인접한 북·중 양국이 밀착해 자국이 배제되는 것을 막으면서, 한반도에 행사하는 영향력도 유지하고 싶어한다. 러시아는 지난 8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러시아에서 북한을 통과해 남한으로 이어지는 가스관 건설을 위해 북·러 양국이 대화하고 있다고 언급할 정도로 적극적이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최근 김정일에게 보낸 광복절 축전에서도 "러시아와 남·북 간 가스화·에너지·철도 건설 분야 3자 계획을 비롯해 모든 방향에서 북한과 협력을 확대할 뜻이 있다"며 경협 의지를 보였다.
김정일이 러시아 방문을 추진한 데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북한은 작년에 일으킨 천안함·연평도 도발로 우리 정부와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강성대국'으로 선포한 2012년을 앞두고 세(勢)를 과시할 여력을 비축해야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있다. 그는 지난 5월 중국을 방문했으나 중국으로부터 원하던 만큼의 경제 협력은 얻어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와 관계를 개선해 한국과 미국, 중국을 모두 견제하는 효과를 올리려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즉 강성대국과 체제유지, 식량난 극복을 위한 궁여지책의 선택으로 보여 진다.
김정일은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환경과 체제 위기 속에서도 왜 러시아에 갔을까? 구체적으로 몇 가지 제시해 보고자 한다.
첫째, 한계상황에 달한 체제유지의 돌파구 마련이다. 최근 북한의 식량사정은 최악이다. 북한체제를 지탱하는 평양에서 조차 식량배급이 중단되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이다. 북한은 남한과 중국으로부터의 무조건적인 대북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수해 등으로 북한 인민들은 노골적으로 김정일 체제에 대한 비판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김정일은 러시아 방문을 통한 식량과 에너지의 안정적 확보가 체제유지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보고 있다. 김정일은 러시아 방문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과 그 성과를 주민들에게 과시하고 전파해 국내 정치에 활용하려는 의도도 갖고 있다. 김정일이 1주일이 넘는 방러일정을 소화해 내며 건강상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대외에 과시하는 것도 체제유지의 중요한 관건이다.
둘째, 경제·외교적 이유이다. 김정일의 이번 러시아 방문은 외교적으로 '중국으로의 쏠림'을 막고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발언권을 강화해 보려는 속셈이 짙다. 즉 북한이 과거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지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했던 '줄타기 외교'를 다시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러를 잇는 전력 공급과 시베리아 가스관 설치,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를 연결하는 사업 등 북ㆍ러간 경협이 주된 목적이 될 것이다.
남ㆍ북ㆍ러간 3각 경협은 남한과 러시아에는 물론 북한이 경제를 재건하고 권력세습과 강성대국을 건설하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북한이 폐쇄사회에서 벗어나 국제적인 규범을 지키며 대남도발 자제를 통해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야만 가능한 일이다. 동족을 상대로 도발을 일삼고 불법과 일방적인 재산 몰수ㆍ동결ㆍ매각을 자행하는 정권을 어느 국가, 어느 투자가가 믿고 투자에 나서겠는가.
셋째,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유인하기 위한 대 러시아 카드 활용이다. 김정일은 북러 정상회담을 통해 셋째 아들 김정은의 후계 구도를 굳건히 하면서, 6자회담 재개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목적도 갖고 있다. 북한으로서는 한미 당국의 ‘전략적 인내’를 돌파할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북한은 북러 경제협력을 중심으로 외자유치가 필요한 상황과 지지부진한 북미·남북대화에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의도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가 미국과 한국을 압박하는 최고의 수단으로 간주하고 있다. 미국은 국제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러시아가 동참하지 않는 대북압박정책은 무용지물이라는 데에 고민이 있다. 북한은 이런 틈새를 노려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강요하고 북미평화협정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넷째, 천안함·연평도 사태로 단절된 남한의 대북지원을 압박해 보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북한이 외교 영역을 중국과 미국에 이어 러시아로 확대해 가면서도 남측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 그 이유다. 북한은 21일 금강산관광지구 내 남측 재산권 문제와 관련해 "남측 부동산과 설비 및 윤전기재들을 비롯한 모든 재산에 대한 법적 처분을 단행한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인 것도 이런 의도와 무관치 않다. 이로 인해 한반도를 둘러싼 먹구름이 더욱 짙어질 전망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22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 한다”고 말했지만 속내는 답답함을 엿볼 수 있다.
다섯째, 러시아와의 안보군사적 협력 강화를 노리고 있다. 북한과 러시아는 2000년 2월 9일 ‘조러 친선선린 및 협조조약’을 맺고 양국은 ‘안보위협 발생시 즉각 접촉’ 조항을 추가해 제한적 군사협력의 길을 열어놓았다. 특히 북한이 현 시점에서 군사적으로 對러시아 접근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북한이 여전히 소련제 무기 체제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제 무기 및 무기 부품 없이는 군사력의 유지가 불가능하다는데 있다. 이것은 곧 북한이 경제적으로 아무리 중국에 치우치더라도 군사력 분야만은 러시아와 협력을 강화해야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입장에서 이번 러북 정상회담을 통해 기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러시아는 한반도에서의 미국과 중국에 버금가는 동등한 참여를 확보하고, 남북한과 균형된 관계를 바라고 있다. 이는 강대국 지위 유지와 개혁의 성공적 수행을 위한 유리한 국제환경 조성에 목표를 두고 실용주의적, 현실주의적, 전방위외교를 추진해 온 러시아의 일관된 정책과도 일치한다.
특히 최근 들어 러시아는 親서방주의 정책 유지 등으로 약화된 對한반도 영향력의 회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러시아의 對북한 접근 정책은 양국 관계를 과거의 전통적인 동맹 관계로까지 회복시켜 줄 가능성은 적지만, 한반도 문제 해결과정에서 발언권을 강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한 관계에서도 압박카드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외교정책을 간주하고 있다.
한국의 대러 정책에는 문제가 없는가?
이명박 대통령이 김정일 러시아 방문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선 한국정부의 대러 정책에 일관성이 없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국제관계의 본질적 변화와는 상관없이 러시아를 무조건 부정적인 국가로 인식하고 소련의 해체 이후 역대 한국 지도자들은 러시아를 냉전의 패배자로 인식하여 경시해 온 것이 사실이다.
두 번째는 한국은 소련 붕괴이후 탈냉전이라는 새로운 조건하에서 양국관계의 다면적인 심화발전에 중점을 두지 않고 북한의 배후에서 포위하는 시각에서만 러시아를 조망하였다.
세 번째는 한국의 외교적 시야가 미국에 지나치게 고착되어 한계가 있다. 북한 당국이 미국과의 직접대화와 평화협정체결을 끈질기게 매달리는 노력만큼 한국이 대러 관계를 유지 했다면 천안함 이후 러시아의 대한 정책은 아마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한국의 대러시아관은 서방이 만들어낸 편견에 사로잡혀 과도할 정도로 왜곡되어 있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한국은 그 동안 주변 4국 중 상대적으로 가장 적은 관심을 기울였던 러시아에 대한 외교적 관심을 제고하면서 한반도 평화 통일 과정에서 호의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대러 외교 비중을 확충, 주변 4국에 대한 균형된 외교를 펴 나가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김정일의 러시아 방문 목적이 어느 정도 성취될 지는 미지수다. 돌아가는 내외 정세가 반드시 그의 편에만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첫 방문지로 러시아 극동의 부레야 지역에 도착한 김정일은 러시아 전통 복장을 한 여인들로부터 빵과 소금을 대접받았다. 이는 러시아 사람들이 손님을 맞이할 때 사용하는 전통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외국의 정상에게는 없던 방식이다. 러시아가 북한의 최고지도자를 대접하는 데 이 빵과 소금은 등장시킨 것은 무슨 의미일까? 러시아 전통에 의하면 빵은 환영, 소금은 개방을 뜻한다고 한다. 아마도 러시아 당국자들이 김정일의 이번 러시아 방문을 계기로 북한이 한층 더 개방의 길로 나설 것은 주문하는 무언의 압력인지도 모른다.
김정일은 폐허가 된 북한의 경제력 부흥 없이는 북한을 통치하기에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으며 중동에서 불고 있는 자스민 혁명의 열기를 피하기 위해서도 제한적이나마 북한이 개혁 개방으로 나가지 않고서는 북한체제가 붕괴될 수 있다는 점을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간과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것은 그동안 남한의 퍼주기식 북한 경제지원의 단절과 북한에 대한 봉쇄 정책이 북한을 개방으로 유도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한국정부가 취해온 대북단절과 봉쇄정책은 시의 적절한 것이며 북한 스스로가 남북한 상호 신뢰의 여건을 쌓아가면서 한반도 평화유지가 북한의 발전에 긴요하다는 정책적 변화를 깨달을 수 있도록 유도하여 남북관계를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 김정일이 3차례 중국방문과 이번 러시아 방문이 우물 안 개구리의 행태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konas)
조흥래(재향군인회 안보문제연구소장)
- 입력 된 100자 의견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