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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하랴! 혜원·규원을... 구출할 건가?

Written by. 이현오   입력 : 2011-09-26 오전 10: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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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1986년 가족과 헤어지는 날로 끝났다. 가족을 붙잡고 용서를 빌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더욱 제발 죽지만 말고 살아있어 주기를 소원한다.”

 윤이상이라는 또 다른 이상주의(?)자의 회유와 꾐에 빠져 조국을 배신하고 북한 김일성의 품을 찾아 사랑하는 부인과 어린 두 딸을 대동한 채 북으로 들어갔던 한 철부지 이상주의자가 참담한 북한체제와 겉과 속이 다른 금수와도 같은 독재자의 행태를 확인한 뒤 가족을 남겨두고 탈북, 26년 동안 오매불망 꿈에도 잊지 못할 가족을 그리며 죽음보다 더한, 그 어떠한 죄값으로도 속죄할 수 없는 어리석기만 했던 지난날의 과오를 짓씹으며 내뱉은 말이다.

 9월5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한 북한인권단체가 주최한 ‘북한정치범수용소 해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린 날 한 초로의 남자가 청중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기자회견 내내 눈을 감고 머리를 숙인 채로 발표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자유대한민국의 촉망받는 엘리트 서울대생에서, 독일 유학생으로, 다시 월북 대남방송요원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사지(死地)로 몰아 넣은 장본인 오길남 박사였다.

 오길남씨는 당시 재독 유학생으로 반정부 활동을 벌이다 밀파된 북한공작원과 역시 재독 음악가인 윤이상, 경제학자 송두율 등의 회유와 종용에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85년 부인 신숙자씨와 두 딸 혜원, 규원을 데리고 월북했다. 이후 대남간첩 훈련인 밀봉교육을 받고 칠보산 연락소 '구국의 소리' 대남방송 요원으로 배치돼 남한 내에서의 지하당 방송을 위장한 이 방송의 대북 선전요원이 된 것이다.

 그러던 중 이듬해인 1986년 11월 독일에서 유학중인 한국인 학생 두 명을 포섭해 데려오라는 북한당국의 지령을 받고 독일로 향하던 중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남편 오 박사의 일생일대의 오판으로 인해 아내 신숙자씨와 두 딸 혜원(당시 11세), 규원(9세)자매는 1987년 말 악명 높은 북한의 제15호 관리소인 요덕수용소에 갇히게 됐다. 그로부터 26년 세월이 흘렀다.

 그 날 오 박사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깊은 상념에 잠겨 있어 보였다. 북한에서 모진 삶을 겪다 북을 탈출한 탈북자들이 정치범수용소의 인권유린 참상과 탄압실태에 대해 절규하듯 토로할 때는 차마 듣기가 어려운지 두 눈을 꼭 감은 채 가끔씩 어깨만이 미세하게 흔들릴 따름이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보통의 보편적 인간이 겪어야 할 시련치고는 너무나 가혹하고 참담한 시련이 그와 그 가족에게 엄습한 채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음에야!

 이미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처럼 오 박사는 서울대에서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 독일로 건너간 유학생 출신이다. 그런데 당시 박정희 정부의 유신에 반대하며 역시 독일 유학생인 스로가 '경계인'이라고 자처한 송두율 등과 함께 1974년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를 만들어 반정부활동에 나섰다.

 이후 오 박사가 1985년 유학 생활 15년 만에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자 "좋은 조건으로 북에서의 교수직과 아픈 아내를 고쳐주겠다"고 감언이설로 꼬득인 윤이상, 송두율, 김종한 등의 회유와 평소 북한을 동경하던 이상에 의해 신숙자씨의 결사반대에도 고집을 꺾지 않고 북행을 결행한 것이다. 1986년 12월13일이었다.

 그러나 북한사회를 체험하면서 다시 남편이 해외 유학생 포섭을 위한 공작원 역할을 하게 된 것을 알게된 신숙자씨가 "내 사랑하는 딸들이 짐승처럼 박해 받을망정, 파렴치하고 가증스럽고 저열한 범죄 공모자의 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청순한 사람들(포섭대상 유학생)들을 음모의 희생물로 만드는 역할을 맡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말과 탈북 권유로, 코펜하겐에서 탈출한 그는 이후 독일에서 가족 송환운동을 펼쳤다. 결과는 실패였다. 결국 그는 1992년 5월 귀국해 당국에 자수했다.

 오길남 박사가 가족들의 소식을 들은 것은 탈북 후 윤이상으로부터 재입북종용과 더불어 1991년 받은 몇 장의 사진과 육성녹음 테이프가 전부다. 오 박사는 이 날 "이후 국제엠네스티를 통해 생존해 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했고, 이후 요덕수용소 출신 탈북자를 통해 1999년까지 살아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이후로는 생사조차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북한 요덕정치범수용소 출신이기도 한 탈북 강철환 기자는, 1987년 말에 요덕수용소에 갇힌 신숙자씨가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하고, 방에 불을 내 가족이 함께 자살하려고 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고 정치범수용소 참상을 폭로하면서 보고하기도 했다.

 지난 20일 미 연방하원 외교위원회 산하 아프리카 인권소위원회에 탈북자 출신 김영순 씨와 김혜숙 씨가 증언대에 섰다.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의 전부인인 성혜림의 친구였다는 이유로 요덕수용소에 갇혀야 했던 탈북자 김영순 씨는 "짐승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9년 동안 갇혀 살면서 나는 가족도 잃고 피눈물 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제발 2천300만 북한 주민들이 나와 같은 삶을 살지 않도록 구해주세요"라고 절규했다.(자유아시아방송)

 김혜숙씨 또한 "북한과 같은 사회를 빨리 없애 주십시오. 그리고 북한주민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정치범수용소를 없애주시고 자유를 모르는 북한주민들에게 자유와 행복을 찾아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고 호소했다고 방송은 전했다.

 아직도 20만 주민이 생지옥과도 같은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오 박사는 "누구에 의해 북으로 가게 되었는지, 이름을 정확하게 밝혀 달라"는 요청에 "1985년 독일 거주 중 북한 공작요원 윤이상에 의해 입북하게 됐다"고 밝혔다. 참으로 이래서 또한 인간사는 아이러니인가 보다. 부인 신숙자씨가 통영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통영의 딸'이고, 윤이상 씨 또한 통영시민이 자랑스러워하는 '통영의 음악가'이기 때문이다.

 최근 경상남도 통영을 중심으로 우리사회가 나서 혜원·규원 자매를 구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고 있다. 젊은 대학생들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고 있다. 통영에서 시작된 개신교계 내 움직임이 전국적인 움직임을 가시화하고 있다. 창원에서도 주민 궐기대회가 일면서 확산되고 있다. 민간 차원의 서명운동이 6만명을 돌파하면서 신 씨 모녀의 생사확인과 송환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최근 국회에 제출됐다.

 그동안 생사가 불투명했던 신숙자씨와 오혜원·규원 양이 평양 인근 통제구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 납북자 가족 대표가 북한 내부소식통을 인용했다. 류우익 통일부장관도 신(69)씨 모녀와 관련, "통일부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라고 밝혔다.

 류 장관은 지난 20일 국회 통일부 대상 외교통상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신씨 등에 대한 송환요구를 할 것인가'라는 한나라당 이윤성 의원의 질의에 대해 "현재 신씨 등을 우리(통일부)가 보호하는 상태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 한다"고 답변하면서 이 같이 말했다.

 이제라도 대한민국이 나서야 한다. 사회시민단체가 나서야 한다. 정부가 분명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를 내야한다. 더 이상 우리가 침묵으로 일관해서는 안 된다. 우리사회는 아직도 6.25전시 10만 여명에 달하는 민간인 납북자로부터 시작해 휴전 이후 현재까지 북에 의해 강제로 납북된 KAL기 승무원, 어부, 종교인, 청소년 등 500여 명의 민간인과 560여명으로 추측되는 생존 국군포로 등 필히 해결해야할 숱한 문제와 아픔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모든 납북자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어야 할 사안이지만 그 중에서도 신씨 모녀 사건은 우리사회에서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한 하나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한 가족의 비극적 문제 해결을 위해 범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촉진될 때 정치권과 정부가 후속해서 나서지 않을 수 없으며, 국군포로문제, 납북어부, KAL 승무원 문제 해결 등으로 연이어 파급해 나갈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국제사회도 가시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나는 가족을 파멸로 이끈 바보였다. 나는 꿈에서 아내와 두 딸에게 호소한다. 짐승의 꼴이라도 좋으니 제발 살아만 있어달라. 나는 아내와 딸들에게 용서조차 구할 수 없는 사람이다." 한때 조국 대한민국을 배신하고, 그 가족의 삶마저 송두리째 내던져버린 남자. 오길남 박사의 폐부를 찢는 절규가 다시금 들려오는 것만 같다.

 11살, 9살 어린 소녀가 35·32세로 변모될 정도로 숱한 세월이 흘렀다. 이제 더 이상 흘려야 할 눈물이 없을 정도로 메마른 세월이었겠지만 이제부터라도 더한 아픔과 시간이 빼앗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konas)

이현오 (코나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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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0-24 오전 10: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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