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報勳)은 곧 안보(安保)다
“(정부에서) 말로만 잘 해 주겠다, 대우해주겠다고 하지 우리에게 오는 것도 없고, 보여주기 식이니까…”
2010년 11월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 당시 해병 연평부대의 정비소대에서 일병으로 복무하던 김진권 씨. 그는 적이 쏜 포탄에 복부를 관통당하고 오른쪽 발등에 중상을 입었다.
지난해 6월 의병 전역을 한 뒤에도 오랜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위장 기능의 대부분을 잃어 매일 약을 먹어야 하고, 오른쪽 발은 골반 뼈를 이식해 복구했지만 지금도 걷기조차 힘들어 목발에 의지해야 한다. 종일 누워 있거나 앉아있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아물지 않은 상처로 인한 신체적 고통보다 정부와 사회의 무관심이 그를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연평도 도발 1주기인 지난해 11월 23일 김 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키다 부상을 당했지만 제대로 처우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김 씨가 받은 국가유공 상이등급은 6급 1항으로 재해보상금으로 800만원, 월 100여만 원의 보훈급여금이 전부다. 김 씨 뿐 아니라 다른 부상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복부 관통 장기손상과 다발성 파편창을 입은 최주호 병장과 김징권 상병, 오른쪽 다리에 중상을 입은 이민욱 상병 등도 상이등급 5~7급 판정을 받았다.
정부 당국은 관련규정에 따른 합당한 처우라고 하지만 조국을 지키다 평생 감내해야 할 상처를 입은 젊은이들에게 과연 적당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욱이 일부 부상자들은 신체검사에서 유공자 기준 미달 판정을 받아 보훈병원에서 무료진료를 받는 것 외에 다른 혜택이 없는 상황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부상자 가족대표를 맡았던 김지용 상병의 부친은 “정부 당국자들이 1년 전 부상자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준다고 했지만 말 뿐이었다”고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실제로 정부와 사회가 북한의 도발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장병들에겐 나름 관심을 기울였지만 부상자들은 외면했다는 비판은 계속 제기돼왔다. 일각에선 부상자들에게 산업재해보다 낮은 상이 등급을 매겨 제대로 된 치료와 부상을 외면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국가를 위해 싸우다 부상했을 경우 학업과 취업, 재활을 정부가 모두 책임지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과 정부도 적극 추진하겠다는 약속도 어제 오늘 나온 게 아니다. 하지만 북의 도발로 국민적 관심이 쏠릴 때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왜 이런 상황이 빚어졌을까. 전문가들은 국가유공자들을 위한 보훈제도의 당위성과 중요성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가 미비한 데 원인이 있다고 지적한다. 일례로 주요 선진국(G20)의 일원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을 만큼 경제발전을 이룬 한국이 보훈정책에 쏟는 노력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미흡한 게 사실이다.
미국은 보훈국 예산이 한해 81조원에 달한다. 연방정부 전체 예산의 2.7%로 15개 부처 예산 가운데 6번째로 큰 규모다. 각종 보상금 제도는 물론 직업재활과 의료보호와 같은 보훈지원 체계가 잘 구축돼 있다. 전쟁 부상자들을 위한 종합병원은 170여 곳, 외래진료소 300여 곳, 요양원도 100여 곳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의 보훈병원은 대통령은 물론 상·하원 의원들이 진료를 받을 만큼 첨단 시설과 인재를 갖추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보훈정책을 국방부 산하 향군성과 전쟁피해자 사무국이 전담하고 있다. 연간 보훈예산은 약 63조원으로 450만 명의 유공자에게 각종 혜택을 주고 있다. 향군성은 전국에 100개 지부와 10개 재활직업학교, 15개 양로원과 보훈병원을 운영하면서 유공자와 제대군인들을 보살피고 있다.
호주의 보훈예산은 약 8조9000억원으로 전체 국가예산의 5.5%에 달한다. 이처럼 주요 선진국들은 국가유공자를 국민적 영웅으로 삼아 최선의 예우와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와 비교해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한 해 보훈예산은 약 3조원으로 전체 예산의 1.7%에 그치고, 종합병원 등 의료시설도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다. 전상자를 포함한 국가유공자에 대해 처우와 지원 체계도 선진국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6·25 전쟁으로 굳건한 안보가 국가생존과 직결된다는 교훈을 절감한 나라. 지구상에서 가장 호전적 집단과 무력 대치하는 한국이 보훈의 중요성을 이처럼 경시해선 안 된다는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다 죽거나 다쳤을 때 나와 내 가족을 국가와 사회가 외면한다면 어느 누가 국가 존망의 위기에 총을 들고 전선으로 달려갈 것인가. 이런 측면에서 ‘보훈은 곧 안보’라는 공식은 부인할 수 없는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적탄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지옥 같은 상황에서 철모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르고 한 치 주저함이 없이 적진을 향해 포격을 한 젊은이들은 살았든 죽었던, 아니면 다쳤든 모두 국민적 영웅이고, 그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 한다.
천안함 폭침사건과 연평도 포격도발 이후 우리 사회에 20대를 중심으로 북한의 실체를 인식하고, 애국심과 안보를 중시하는 ‘신(新) 안보세대’, ‘P(Patriotism) 세대’가 등장했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국가를 위해 헌신한 유공자와 그 가족을 정부와 사회가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올바른 안보관과 애국심을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키는데 중요한 촉매제가 될 것이다.
다행히 최근 이 같은 분위기가 사회 일각에서 뿌리내려 주목을 끌고 있다. 기업체들이 연평도 포격도발로 부상을 입고 전역한 장병들이 희망할 경우 우선 채용하기로 한 것이다. 일부 기업은 연평도 부상장병들이 본인이 원하면 모두 정규직으로 채용할 방침이라고 한다. 여기엔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킨 젊은이들이야말로 기업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검증된 인재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류진 풍산그룹 회장은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장병들을 국가가 예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업도 이들에게 일자리 제공 등을 통해 사회에 기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노병용 롯데마트 사장은 “청년들이 국가를 위해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기업의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말했다.
구본상 LIG 넥스원 부회장도 “부상당한 해병들을 외면한다면 나라도, 기업도 존재할 수 없다”고 밝혔다. 국가안보와 보훈을 위해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줘 흐뭇하다.
기업뿐 아니라 정부와 우리 사회 전체가 젊은이들이 보여준 애국심의 값진 대가를 지불하고, 이를 소중히 기억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6월 현충일 기념사에서 “보훈제도 선진화로 나라를 위한 희생과 헌신에 합당한 보상과 예우를 다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또 박승춘 보훈처장은 지난해 연평도 포격 1주기 언론 기고를 통해 “굳건한 안보의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때 보훈의식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말이 가슴깊이 와 닿는다”고 했다.
김정은의 후계세습 구축과 김일성 출생 100주년, 북의 강성대국 원년, 한국의 총선과 대선 등 굵직한 이슈들이 겹친 2012년 한반도는 과거 어느 때보다 격랑이 몰아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이 후계 승계과정의 혼란과 극심한 경제난으로 붕괴 위기에 직면하면서 그 탈출구로 대남 무력도발을 감행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북한의 ‘불장난’을 막는 최선의 방책은 국가안위를 지키는데 너와 내가 따로 없다는 확고한 안보의식이라는 데 이론이 없을 것이다. 이 같은 안보의식은 보훈정신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에서 샘솟는다는 사실을 절감할 때라고 본다. 보훈이 없으면 안보도, 국가미래도 없다는 인식이 2012년 우리 사회 전반에 확산되길 기대해본다.(konas)
* 이 글은 월간 '자유' 1월호에도 게재됨.
윤상호(동아일보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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