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글씨확대글씨축소스크랩

광복절과 칼레의 시민

Written by. 하두철   입력 : 2012-08-10 오후 7:12:23
공유:
twitter facebook
소셜댓글 : 0

 프랑스 해안 도시 칼레 시청 앞에는 ‘칼레의 시민’이라는 조각상이 있다. 맨발에 속옷 차림으로 목에는 밧줄을 걸고 교수대로 향하는 여섯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비틀린 두 팔로 저항하는 듯 하는 몸짓,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채 두려움에 떠는 모습, 퀭한 눈동자… 그들의 공포에 질린 표정과 모습은 처참하고 처연하다.

 1347년,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를 공격했다. 도버해협에 연한 조그마한 도시 칼레 시민들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온갖 악조건 속에서 11개월 동안이나 영국군의 집중 공격을 견뎠다. 그러나 결국은 굶주림을 못 이겨 항복을 하게 되었다.

 분노한 영국왕은 칼레의 모든 시민을 죽이려고 했으나 주위의 탄원이 계속되자 새로운 항복조건을 제시했다. 다음날 아침까지 시민대표 6명을 뽑아 맨발에 속옷 차림으로 목에 밧줄을 걸고 성 밖으로 나와 성문 열쇠를 바치라는 굴욕적인 조건이었다. 여섯 명을 칼레 시민들 대신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어떻게 여섯 명을 뽑을 것인가. 그때 한 사람이 천천히 일어났다. “내가 그 여섯 중의 하나가 되겠소.” 사람들은 놀랐다. 칼레 최고의 거부인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가장 먼저 자원을 하고 나선 것이었다. 뒤를 이어 시장이 나섰다. 부자 상인과 그의 아들도 나섰다. 드디어 일곱 명이 되었다. 한 사람은 빠져도 되었다. 제비를 뽑자는 말도 있었지만 “내일 아침 장터에 제일 늦게 나오는 사람을 빼자”는 피에르의 제의에 모두가 동의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여섯 명이 모였다. 그런데 피에르가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 했다. 나오지 않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시 뒤 그의 집으로 찾아가 보니 그는 이미 죽어있었다. 죽음을 자원한 사람들의 용기가 약해지지 않게 하여 칼레의 명예를 지키도록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이들이 처형되려던 순간, 영국 왕은 임신 중인 왕비의 간청을 듣고 그 용감한 시민 6명을 살려주었다. 물론 칼레 시민들도 모두 구원을 받았다.

 그로부터 550년이 지난 1895년, 칼레시는 이들의 용기와 헌신을 기리기 위해 조각상을 제작하기로 하고 로댕에게 의뢰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칼레의 시민’이다.

 로댕이 10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인 이 작품은 칼레 시민들의 기대에 어긋났다. 영웅적인 선조들을 애국적인 모습으로 미화하기를 바랐는데, 늠름하기는커녕 두려움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댕은 공포에 떨면서도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나선 인간적인 참모습을 통해 그들을 죽음의 길로 나서게 한 것은 ‘사회적 신분에 걸맞은 도덕적 의무(noblesse oblige)’였음을 나타내고자 했다.

 행세하는 집안의 자손으로 허랑방탕하여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사람을 ‘파락호(破落戶)’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 안동에서 파락호로 이름을 날린 김용환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학봉 김성일 종가의 13대 종손이다.

 그는 노름을 즐겨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꼭 끼었는데,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몽땅 걸고 마지막 배팅을 했다. 만약 배팅이 적중하여 돈을 따면 좋고, 그렇지 않고 배팅이 실패하면 “새벽 몽둥이야”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그의 수하 20여 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쓸어 담아 유유히 사라지곤 했다.

 그렇게 노름을 하다 보니 종갓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수백 년 동안 종가 재산으로 내려오던 전답 18만평도 다 팔아먹었게 되었다.

 심지어는 외동딸이 신행 때 장롱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받은 돈이 있었는데 이 돈마저도 노름으로 탕진했다. 딸은 빈손으로 시댁에 갈수 없어서 친정 큰 어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울면서 가지고 갔다고 한다. 이 정도니 주위에서 얼마나 김용환을 욕했겠는가? 실제로 ‘도박에 빠지면 김용환처럼 된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김용환은 광복 다음 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파락호 노름꾼 김용환이 사실은 만주에 독립자금을 댄 독립투사였음이 사후에 밝혀졌다. 그간 탕진했다고 알려진 돈은 모두 만주 독립군에게 보낸 것이었다.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철저하게 노름꾼으로 위장했던 것이다.

 김용환은 독립군 자금을 만들기 위해 노름꾼, 파락호라는 욕을 먹으면서도 끝까지 함구하며 살았다. 임종 무렵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독립군 동지가 머리맡에서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나?”라고 하자 “선비로서 당연히 할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 할 필요 없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

 김용환의 무남독녀 김후옹 여사는 아버지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았다. 훈장을 받던 날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담아 ‘우리 아배 참봉 나리’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 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 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까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 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 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리
내 생각한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 진데…

 제주도에 김만덕이란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육지와 섬을 오가는 상인들을 상대로 숙박·요식업은 물론 물건을 보관해 주는 창고업에서 돈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받는 금융업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상권을 장악한 ‘큰 손’이었다. 김만덕을 거치지 않고서는 장사를 할 수 없다고 할 정도였고 소상인들을 수탈하는 사재기로 원성 또한 적지 않았다.

 정조 대에 제주도에 혹독한 기근이 들었다. 석 달 넘는 가뭄으로 비 한 방울 안 내리더니 느닷없이 폭풍우가 몰아쳐 산사태가 나고 들녘은 물에 잠겼다. 이런 엄청난 재앙이 4년 동안 지속됐다. 돌림병까지 나돌아 제주 전역에는 목불인견의 참상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이때 김만덕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백미 500석을 구매했다. 이 중 450석을 아무 조건 없이 제주 관청에 기부해 굶어 죽는 난민들을 구제토록 했고 나머지 50석은 자신의 친인척들에게 나눠주어 목숨을 부지케 했다. 이후로도 만덕은 제주 물산을 육지 쌀과 교환해 도내 각 관아에 수시로 기증했다.

 전남 구례의 99칸짜리 가옥 운조루(雲鳥樓)에는 누구나 열 수 있다는 뜻의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적힌 200년 된 쌀뒤주가 있다. 배고픈 사람은 누구든 이 뒤주를 열어 쌀을 퍼갈 수 있었다. 운조루의 주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베푼 쌀은 한 해 수확량의 20%나 됐다고 전해진다.

 그렇다고 동네사람들이 운조루의 쌀만 믿고 게으름을 피운 것은 아니었다. 자기보다 더 배고픈 사람을 위해 웬만하면 운조루 뒤주를 찾지 않으려고 열심히 일했다. 손만 뻗으면 언제나 쌀을 구할 수 있지만, 가능하면 스스로의 노력으로 생계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 뒤주에 손대는 일을 줄였던 동네사람들의 마음은, 나눔을 실천했던 운조루 주인과 일맥상통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운조루의 ‘타인능해’ 정신은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삼영화학그룹 창업주 이종환 명예회장은 2002년 개인재산 3천억 원으로 장학재단을 세워 지금까지 자신의 재산 90%가 넘는 8천억 원을 출연했다. 그는 “격렬한 경쟁시대에 돈을 버는데 거칠 수밖에 없었고, 똥 돼지 같이 돈을 벌었다”며 남은 생은 선으로 악을 씻으며 살겠다고 말한다.  

 우리는 외국의 사례를 부러워하면서, 우리 사회에는 기득권층의 의무이행이 부족하다고 비난한다. 옳은 지적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탓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우리 선조들 중에도 우리가  본받아야 할 ‘칼레의 시민’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것을 발굴하고 교훈 삼는 일에 그동안 너무 소홀했다.

 칼레의 시민들도 550년 동안 역사에 묻혀 있다가 로댕의 조각상을 통해 세상에 알려져 영웅으로 추앙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의 자극제가 되고 있다. 이제 광복 67주년이 되었다. 아직도 스스로의 가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정신적 광복을 위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러면서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우리의 위대한 정신적 유산들을 찾아 선양하고 그를 따라 실천하는 일에 나서야 할 때이다.

하두철(국방대학교 군 전임교수)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관련기사보기
facebook twitter 책갈피저장 메일보내기
소셜댓글
로그인선택하기 트위터 페이스복
원하는 계정으로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여 주십시요.
입력
    • 입력 된 100자 의견이 없습니다.
1
로그인하세요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