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몽금포작전"
국악인 김영임의 절창(絶唱)가운데 ‘몽금포 타령’이 있다.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 금일도 상봉에 임 만나 보겠네~’로 이어지는 가락이다.황해도 장연군 장산곶 남쪽에 있는 이 항구는 어업의 중심지이자 아름다운 백사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 이곳이 우리 전사(戰史)에서는 비극적인 장소로 불리고 있으니 이 또한 비극이다. 몽금포 바로 밑 장산곶은 북한의 해안포대가 집결해있는 곳이다. 2010년 11월23일 이곳의 포대가 불을 뿜자 그곳에 주둔한 해병대와 민간인이 다수 살상됐다.
이곳이 우리 전사상 최초의 보복공격지라는 것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우리는 지금까지 북한 공격에 일관되게 수세(守勢)적인 자세를 취해왔는데 ‘몽금포 전투’는 유일한 예외인 것이다. 이곳은 우리 해군이 북한에 응징을 가한 역사적 장소다.
1949년 8월17일 새벽 6시 황해도 용연군 몽금포(夢金浦)에 검은 물체가 접근했다. 하루전인 16일 새벽 2시 인천항을 떠난 대한민국 해군함정 5척이었다. 함정에 탑승한 아군의 의기는 높았다. 반드시 적을 격멸하겠다는 투지로 불타고있었다.
여명(黎明) 속에 몽금포 해변이 윤곽을 드러냈다. 이윽고 아군 특공대원 20명이 고무보트 5척에 나눠탄 채 항구로 돌격했다. 달콤한 새벽잠에 빠져있던 북한군 경비대는 보트가 육지에 접근했을 때야 눈치를 챘다. 그들은 모골이 송연했을 것이다.
놀란 북한군이 반격을 가해왔다. 해안초소와 부두에 정박한 함정에서도 총탄이 빗발쳤다. 예기치못했던 기습에 놀랬던만큼 저항이 거셌다. 그 와중에 적탄(敵彈)이 특공대를 이끌던 함명수(87·전 해군참모총장) 소령의 양쪽 넓적다리를 관통했다.
설상가상으로 뭍 근처까지 온 고무보트 중 4대는 기관고장으로 멈췄다. 바다에 멈춰선 보트는 북한군의 사냥감에 불과했다. 대장이 부상을 입고 보트가 움직이지 않으면서 아군 특공대는 전멸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부터 기적같은 광경이 연출됐다.
상황을 목격한 PG-302 통영함장 공정식 소령(88·전 해병대사령관)이 중기관총을 난사하며 동기 함 소령의 보트를 향해 돌진했다. 함 소령을 구한 뒤 302함은 37밀리 대전차포을 난사하며 앞으로 향했다. 적이 주춤대는사이 북 경비정 4척이 대파됐다.
302함 승조원들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육탄전을 벌여 북한군 5명을 생포하고 35급 제18호 경비정까지 나포해 남하한 것이다. 하지만 원래 이들이 목표로 했던 작전은 성사되지 못했다. 북한이 인천에서 나포한 보트를 평양으로 옮겨놨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 몽금포 전투는 한국 전사상 유일하게 가해진 대북 보복공격이다. 참전자는 특공대원 포함 200여명이며 생존자는 15명정도다. 당시 우리 해군 전체병력이 3000명 정도였는데 15분의1 이 출전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규모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런 혁혁한 전공(戰功)은 63년동안 베일에 가려있었다. 참전자들의 구전(口傳)과 몇권 안되는 회고록을 통해서만 전해졌을 뿐이다. 초대 해군참모총장이었던 손원일 제독, 함명수 전 해군총장,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이 남긴 기록들이 그것이다.
그랬던 몽금포 전투가 지난 6월 해군본부가 펴낸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에 수록됐다. 그렇다면 전사에 빛날 몽금포 전투는 왜 깊은 잠을 자고있었을까. 또 공식 전사에 등재되는데 오랜 세월이 걸린 이유는 무엇일까. 세월을 앞으로 돌려본다.
해방후 우리 군은 큰 위기를 맞았다. 좌우익의 세력타툼이 나라를 뒤흔들었는데 그 여파가 군에도 미쳤다. 국군, 즉 나라를 지킬 최후의 무력이자 국가의 간성(干城)인 군에도 사상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다음은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의 회고이다.
“1948년부터 1년간 우리 군은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군내 좌익(左翼)이 함정 4척을 납북하고 9척을 납북하려다 실패했습니다. 정장(艇長)이 살해된 적도 있었죠.” 당시 참전자 가운데 최고령인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은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해군뿐이 아니었다. 육군 8연대 예하 2개 대대 병력 전체를 이끌고 북으로 향하기도 했다. 2개 대대 병력이 한꺼번에 북으로 향한 것은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아마 그대로라면 한국군은 6·25를 맞기 전 이미 궤멸될만큼 깊은 내상을 입고있었다.
문제는 그곳이 육군만의 고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해군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잇따랐는데 이렇게 뒤숭숭한 상황에서 군은 다시 충격적인 사건을 맞는다. 1949년 8월10일 인천항에 정박한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트 장군의 전용보트가 납북된 것이다.
엿새뒤 인천항에서는 이승만대통령이 직접 관함식(觀艦式)을 가질 예정이었다. 북한이 이런 일정에 찬물을 끼얹기위해 대담한 선제공격을 가해온 것이다. 북으로 끌려간 보트의 행선지는 이태영 첩보부대장에 의해 몽금포에 계류된 것으로 밝혀졌다.
경무대 대책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응준 육군참모총장,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등이었다. 군의 최고 수뇌부를 앞에 두고 노(老)대통령은 한탄했다. 오랜 세월 이국을 떠돌며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투사의 절규였다.
“대체 어찌된 일입네까. 육군과 해군참모총장들이 김일성만 도와주니 말입니다. 2개 대대 병력이 한꺼번에 김일성에게 투항하더니 그것도 모자라 바다에선 동해에서 태극기 단 함정이 올라가고, 서해에선 성조기를 탄 보트가 올라가니 말입네다. ”
대통령과의 대책회의가 끝날 때까지 두 총장은 입을 열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우리 군의 머릿속에는 ‘보복공격’이라는 단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속수무책, 즉 두손을 묶여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은 해방직후 한국군을 표현하기에 적합했다.
회의를 마치고 경무대를 빠져나올 때였다. 당시 손 총장을 보좌했던 정보감 함 소령은 손 총장에게 응징을 제안했다. “총장님, 이번에야말로 특공대를 동원해 북한에게 본보기를 보여줘야합니다. 그렇지않다면 유사한 일이 계속 벌어질 것입니다. ”
몽금포 작전은 바로 이런 사연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었다. 대담한 응징은 보기좋게 들어맞았다. 승승장구했던 북한 김일성은 이 패배 직후 허약해보이던 한국군의 능력을 다시보게 됐다고 한다. 겁을 먹었는지 당분간 대남 공격을 멈추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작전 후 엉뚱한 결과를 낳게 된다. 군이 곤욕을 치르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미국이 시비를 걸었다. 미국은 무초 대사를 통해 ‘해군의 38선 월북작전’에 항의했다. “왜 미국과 사전에 상의조차 하지 않고 단독 작전을 폈느냐”는 것이었다.
한미간 갈등을 김일성은 대담하게 이용했다. 6·25가 남침(南侵)이냐 북침(北侵)이냐의 논쟁이 몽금포 작전에서 시작된 것이다. 김일성은 “6·25를 일으키게 된 것은 남한이 몽금포 작전으로 대북도발을 했기 때문”이라며 선전·선동전을 편 것이다.
이 주장에 중국·소련이 빠질리 없다. 북한을 위해 억지도 마다하지 않는 그들이기에 김일성이 몽금포작전을 거론하자마자 가세해 북침설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것이다. 나중에 국내 좌파학자들에 의해 확대재생산되면서 6·25북침설은 기승을 올렸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6·25북침설은 근거를 잃게된다.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멸망하면서 90년대초 러시아 비밀문서가 공개된 것이다. 이 문서에서는 김일성이 스탈린을 방문해 대남 선제공격시 지원을 요청하는 대목들이 조목조목 나온다.
상황이 이렇게 변했는데도 존립근거를 잃은 6·25북침설과 달리 몽금포 작전은 계속 금기(禁忌)같은 단어가 됐다. 소련이 멸망한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이상하게도 우리 군은 스스로의 자랑스러운 전과를 인정치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이번에 최윤희 해군총장의 ‘결단’으로 마침내 제자리를 만난 것이다.
몽금포작전 63주년을 앞두고 만난 공정식 장군은 쓸쓸한 감회를 감추지 못했다. “생존한 노병들은 ‘양철훈장’조차 탐내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이라도 이 전투가 국민들에게 알려지고 참전자에게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주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그는 지금의 대한민국도, 독도도 당시 해군이 없었으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몽금포작전 후 북한 대남도발을 멈췄다. 적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도발하는 적에겐 응징밖에 해결책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정말 중요하게 새겨들어야할 말이다.(konas)
문갑식(조선일보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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