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선전포고와 광복군의 대일전쟁 수행
본 내용은 지난 10일 (사)한국광복군동지회와 (사)한국독립유공자회협회가 백범기년관에서 주관한 대일선전포고 71주년 기념식에서 실시한 한시준 단국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의 '대일선전포고와 광복군의 대일전쟁 수행' 제하 강연 내용임.(편집자 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중경에 정착하면서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한 후,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1941년 12월 8일 일제가 미국의 해군기지인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한 것이다. 일본의 선제공격을 받은 미국은 즉각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하고 전쟁에 돌입하였다. 이로써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미일간의 전쟁은 태평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이를 흔히 태평양전쟁이라 부른다.
태평양 전쟁의 발발은 독립운동자들을 비롯하여 임시정부가 바라던 일이었고 예견한 일이었다. 독립운동자들은 일본이 계속적으로 세력을 팽창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본과 중국·미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았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의 전략도 민족의 군대인 독립군을 양성하였다가 일본이 중국·미국 등과 전쟁을 벌일 때, 이들과 함께 대일전쟁을 전개하여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으로 세워놓고 있었다.
이러한 독립운동 전략에 의해 국외 각지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사업이 추진되었다. 독립군을 양성하는 것이 독립운동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1911년 서간도 유하현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것을 비롯하여, 일제가 패망하던 순간까지 각지에서 독립군 조직을 결성한 것이다. 지역적으로도 서간도·북간도·연해주·중국대륙 등 각지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심지어는 미국대륙과 하와이 등지에서도 헤이스팅스 소년병학교와 대한독립단 등을 편성하였다.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광복군을 창설한 것도 이러한 독립운동 전략에 의한 것이었다.
독립운동의 전략은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독립운동자들이 예견한대로 일제가 세력팽창을 계속 추진한 것이다. 일제는 1910년 한반도를 차지한 이래 1931년에는 만주지역을, 그리고 1937년에는 중국대륙을 침략하였다. 일제의 세력 팽창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필리핀·말레이시아·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일대로, 그리고 중동에서 독일과 만나겠다며 버마와 인도지역까지 침략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세력팽창을 보면서, 임시정부는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미일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한 인물은 황학수였다. 당시 황학수는 광복군 서안총사령부에서 총사령관을 맡고 있었다. 그는 1941년 6월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발행하는 『광복』 제 1권 제4기에 「美國的沿海防禦與太平洋防線」이란 글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미국의 해군과 공군의 군사력 및 그것이 태평양 연안에 배치된 상황을 각종 통계자료를 통해 분석하고, 미·일간에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였다. 광복군에서는 이미 6개월 전에 미·일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미·일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즉각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공격한지 이틀 후인 12월 10일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 명의로 다음과 같은 「大韓民國臨時政府對日宣戰聲明書」를 발표한 것이다.
우리는 3천만 한인과 정부를 대표하여 삼가 중국·영국·미국·네덜란드·캐나다·오스트리아 및 기타 여러 나라가 일본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것이 일본을 격패시키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므로 이를 축하하면서, 특히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1. 한국의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해 오고 있으며, 이제 하나의 전투단위로서 축심국에 전쟁을 선언한다.
2. 1910년의 합병조약과 일제의 불평등 조약이 무효이며, 아울러 반침략국가가 한국에서 합리적으로 얻은 기득권익이 존중될 것임을 거듭 선포한다.
3.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한다.
4. 일본세력 아래 조성된 장춘과 남경정권을 절대로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즈벨트, 처칠 선언의 각항이 한국독립을 실현하는 데 적용되기를 견결히 주장하며 특히 민주진영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원한다.
이는 한국도 이미 반침략전선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임시정부는 중국·영국·미국·캐나다·네덜란드·오스트리아 등 일본에 전쟁을 선포한 국가들과 함께 하나의 전투단위로서 일본과 전쟁한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일본에 대한 임시정부의 선전포고였다.
그리고 일본과의 전쟁은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왜구를 완전히 몰아낼 때까지, 또 일본이 완전히 패망할 때까지 혈전을 전개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광복군, 연합군과 함께 대일항전을 전개
광복군은 일제와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연합군들과 함께 대일전쟁을 전개하였다. 인도도 버마전선에 대원들을 파견하여 영국군과 공동작전을 수행한 것이 그 하나다. 인도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이 광복군 측에 대원들의 파견을 요청한 것이 그 계기였다.
영국군은 일본군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일본군에 대한 심리전과 정보 수집·포로심문 등이 필요하게 되었다. 영국군측의 요청이 있게 되자 광복군에서는 한지성·문은국 등 대원들을 선발하여 1943년 인면전구공작대란 이름으로 파견하였다.
인도에 도착한 광복군 대원들은 캘커타의 영국군 총사령부에서 훈련을 받고 영국군에 배속되었다. 당시 영국군은 버마 남쪽의 랑군(Rangoon) 항으로부터 북부의 라시오(Lashio)를 거쳐 중국의 곤명으로 이어지는 ‘버마公路’ (장개석 정부를 지원한다는 뜻에서 援蔣 Route라고도 함)를 확보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수송로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어 차단되자 이를 타개하고자 한 것이다.
광복군 대원들은 영국군과 함께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여하였다. 광복군 대원들이 처음 참여한 것은 1944년 초 영국군과 일본군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임팔(Impal)전투였다. 이후 티딤(Tidim)·띠마플·비센플 등 각지에서 전개된 전투를 비롯하여, 만달레이·랑군상륙작전 등 1945년 7월 일본군이 버마에서 완전히 패퇴할 때까지 영국군과 함께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미국의 전략첩보기구인 OSS(Office of Stragic Services)와도 공동작전을 추진하였다. OSS와의 합작은 연합군으로 참전하려는 광복군측의 전략과 대일항전의 첩보활동에 한국인들을 이용하려는 미국측의 상호 이해관계에 의해 이루어졌다.
OSS와의 합작은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이란 이름으로 추진되었다. 내용은 광복군 대원들에게 OSS훈련을 실시하고, 이들을 한반도에 투입시켜 적후활동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광복군 대원들에 대한 OSS훈련이 실시되었다. OSS훈련은 1945년 5월부터 실시되었고, 두 곳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제2지대가 서안에서 싸전트 대위 책임하에 훈련을 시작하였고, 다른 하나는 제3지대가 안휘성 입황에서 윔쓰 대위를 책임자로 실시되었다.
훈련은 첩보활동을 위한 특수훈련이었다. 과정은 우선 1기생 50명을 선발 3개월 동안 훈련을 실시하였고, 1945년 8월 4일 제1기생 훈련이 완료되었다.
OSS훈련이 완료되면서 임시정부와 미국측 사이에 국내진입작전이 추진되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8월 7일 서안으로 가 제2지대 본부에서 OSS 총책임자 도노반(William B. Donovan)과 마주 앉았다.
이 자리에는 한국측 인사로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과 제2지대장 이범석 등이, 미국측에서는 OSS간부들이 참여하였다. 여기서 OSS훈련을 받은 광복군 대원들을 국내에 침투시켜 적후활동을 전개 한다는 한·미간 공동작전이 합의되었다.
광복군 대원들의 국내진입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대원들이 국내에 들어가 활동할 작전지역이 정해졌고, 이를 수행하기 위한 자금과 장비 등을 마련하였다. 준비가 완료되고 국내진입에 대한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중 일제의 항복소식이 전해졌다. 일제의 항복소식이 중국에 알려진 것은 8월 10일 저녁이었고, 중국의 방송과 신문들이 이 소식을 알렸다.
광복군이 인도 버마전선에서 영국군과 한께, 또 미국 OSS측과 공동작전을 추진한 것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 전쟁에 참전하려는 전략에 의한 것이었다.
미국측과의 국내진입작전은 실행 직전에 일제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면서 좌절되었지만,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자주적으로 쟁취하려는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나타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Konas)
한시준 (단국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 백범학술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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